소설리스트

흑백무제-817화 (817/963)

817화. 다시, 무림맹으로 (3)

“흐음.”

문서들을 확인한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개판이구먼.”

문서들엔 아홉 조직의 내부 정보에 관한 내용이 한가득 정리되어 있었다.

애초에 이걸 정리한 이들의 조직 내 권한이 크지 않았기에 상세한 조사는 무리였다. 다만, 현재 조직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들여다보기엔 충분했다.

묵룡부의 정보력과 내부인의 협조가 합쳐지니, 극히 비밀스러운 사업을 제외하면 상당한 수준까지 알 수 있었다.

“이런 놈들이 흑도를 주름잡고 있었으니.”

사실 말이 흑도지, 그들이 빨아먹는 골수는 무림인이 아니라 민초들의 것이었다.

두세 문파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미래 없이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당장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일대 산을 무자비하게 벌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살기 위해 일대를 망가트리는 게 아니라, 더 큰 부(富)와 권력을 얻기 위해 수만 명의 민초를 착취하고 있었다.

욕망은 곧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큰 원동력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도가 심했다.

“뿌리부터 뜯어고쳐야겠어.”

놀라운 건, 그 작업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흑도 문파들이 백도 문파들만큼 오랜 역사를 쌓지 못하고 스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기반을 다질 줄만 알지, 그걸 유지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럴 만도 했다. 배신과 협잡이 당연시되는 흑도 무림에서, 미래를 위해 온건한 방법으로 주춧돌을 쌓기란 절대 쉽지 않다.

더 쉽고 확실한 방법들을 택하니 빠르게 강해지지만, 더 강한 힘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백도 정파는 그렇지 않다. 더 강한 힘에 무너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회복한다.

그것이 역사의 힘, 탄탄한 기반을 지닌 문파의 저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력은 민중의 지지와 문파의 선한 영향력, 그로 인해 발휘되는 역사와 명성에서 나온다.

‘예전에도 멀쩡했던 문파는 이 중 둘밖에 없었다.’

흑제성 시절, 그 파란만장했던 전란에서 제 이름을 지키고 있던 문파는 녹림채와 월영문 정도였다.

나머지는 모조리 사라지거나 삼교에 넘어갔다. 특히 상단들은 대놓고 삼교를 도와 중원 남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더랬다.

그것이 돈의 힘이다. 강호의 낭만이니 명성이니, 무력이야말로 무림인의 꿈이자 목표라며 말들 많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돈만큼 중요한 게 없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그놈들은 똑똑했지.’

삼교가 중원을 공략하기 위해 가장 많이 신경을 쓴 부분이 바로 황궁과 금력이었다.

흑제성 시절에는 황궁과 얽히지 않았지만, 중원 전역에 퍼져 있는 관리 중 대부분이 돈에 혹해 썩어 버린 건 알고 있었다.

더하여 그 시대 상단들은 애국심이나 자존심 같은 것이 없었다. 가져다 바칠 대상만 바뀔 뿐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삼교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삼교가 시종일관 중원을 압도했으니까.

잘 유지되었던 경제의 흐름을 끊어 두니, 민심이 불안해지고 관부와 무림의 힘도 약해졌다. 부정부패가 판을 쳤고, 온갖 사건 사고가 터졌다.

그 불안정함이 극에 달했을 때.

바로 그때, 삼교는 중원을 밀고 내려왔다.

“…….”

왜일까?

문서들을 보며 혀를 차던 연호정은 문득 한 가지 의문에 휩싸였다.

‘왜지?’

이내, 턱을 쓰다듬는 연호정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흑도를 정리하려다가 든 생각.

바로 전장(戰場)의 위치였다.

“……전쟁이 벌어질 거라면, 굳이 중원에서?”

연호정이 눈이 번뜩였다.

전생에서의 오랜 전쟁, 그리고 회귀 후에도 이어지는 파상 공세.

놈들은 중원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애초에 새외보다 중원 땅이 풍요로우니, 넘치는 힘으로 중원을 공략하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떤 목적에서건 놈들은 중원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중원은 그것을 막으려 한다.

그리고 중원은, 이전과 달리 일차 방어에 성공했다.

“…….”

차돌처럼 꽉 막힌 인식의 문제였을까.

‘물론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걸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 막막했다. 애초에 그걸 알아볼 시간에 대비부터 하는 게 우선이기도 했다.

그 생활을 몇 년이나 하다 보니, 상황을 반전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놈들의 잔당이 중원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싹 청소가 되었어. 개방과 흑도의 정보단이 입을 모아 그렇다고 한 거면, 적어도 한동안은 이쪽에서 개판을 치진 못한다는 것이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게 세상이다. 다만 이 정도로 청소가 되었다면, 당장은 큰일이 터지진 않을 것이다.

“…….”

습관처럼 검지로 문서를 툭툭 건드리던 연호정이 사람을 불러 물었다.

“부주님께서 지금 뭐 하고 계시나?”

“십이지신분들과 술자리 중이십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일이 끝나면 술이나 같이 마시자고 했었다. 생각할 게 많아서 그쪽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알겠네. 나가 보게.”

“예.”

양천 역시 바쁘게 살고 있다. 중간에서 칼춤을 추는 건 연호정이었지만, 그 여파를 어떻게 감당할지와 다음 일에 대한 고민은 양천의 몫이었다.

‘이건 내일 말해 봐야겠군.’

그때였다.

“소부주님.”

“음?”

“일행분께서 서신을 주고 가셨습니다.”

“들어오게.”

서신을 받은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사람을 시켜서 전했나?”

“그렇습니다.”

“알겠네.”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이 거처를 나섰다.

서신에 적힌 곳은 묵룡부 안이 아닌 밖이었다.

휘영청 뜬 달빛. 가득 쌓인 눈 덕분에 세상이 밝았다.

운치 있는 언덕에 올라선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등을 돌린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패율이 말했다.

“여기서 철기단의 훈련이 잘 보이더군.”

“언제 보신 적 있습니까?”

“폐관 들어가기 전에 자주 봤었지. 경치도 좋고, 널찍하니 홀로 수련하기도 괜찮았어.”

“그랬군요.”

스르릉.

소검과 단창을 뽑아 든 패율이 몸을 돌렸다.

달빛을 등진 패율의 모습은 상당히 어두워 보였다. 와중에 두 눈은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담이 약한 사람이 보면 졸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눈빛은 담담했고, 패율의 눈빛은 서늘했다.

잠시 후.

슉!

짧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패율이 연호정에게 접근했다.

훅!

바람을 가르는 단창이 단숨에 연호정의 목을 노렸다.

빠르고 효율적인 움직임이었다. 직선의 움직임에 효율이고 뭐고 할 게 있겠느냐마는, 패율이 움직인 시점은 연호정의 날숨이 끝나고 들숨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상대의 호흡을 읽고 공격한다. 고수의 기본 소양이나, 그 상대가 성천의 강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스륵.

한 발을 뒤로 빼 몸을 돌리는 간단한 동작으로 그 빠른 패율의 창격이 길을 잃었다.

‘……?’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공격이 빗나갈 걸 예상하고 짧게 돌아 검격을 내칠 줄 알았더니, 뻗은 단창을 회수하지 않은 채 겨드랑이 밑으로 소검을 찔러 오고 있었다.

팍!

탄력적인 보법으로 검을 피한 연호정이 어느새 패율의 등 뒤에 섰다.

파파팡!

후방으로 접근할 걸 예상한 모양이었다. 상중하 삼단의 각법을 내치는데, 그 속도가 섬전처럼 빠르고 날카로웠다.

터터텅!

오른손 하나로 삼 연타를 내친 연호정이 그대로 거리를 좁혀 주먹을 질렀다.

빠르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공격일 것이다. 연호정은 패율이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패율은 자세를 낮추고 단창과 소검을 교차해 권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쩌엉!

쇳소리와 함께 패율의 신형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그게 전부였다. 가벼운 대련이라 제대로 힘을 싣진 않았지만 그래도 성천의 일격인데, 밀려 나간 것 빼고는 아무 충격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공이군.’

관일창법, 관일검법을 완성하며 얻은 강력한 기공술의 힘이었다. 단순히 무공의 위력을 강하게 만드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주인의 신체를 훌륭하게 보호해 주는 멋진 신공이었다.

스르륵.

교차한 창검을 내린 패율이 자세를 낮추었다.

“봐주는 거냐?”

“진짜로 합니까?”

그때였다.

‘……!’

패율의 왼발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순식간에 그의 온몸으로 번졌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공격이 들어오기도 전에 어딜 노릴지를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패율의 의도는 명백했고, 창날이 노리는 살기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기세가 너무 강렬해서, 점(點)으로 느껴지던 목표 지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치 밀도 높은 먹물을 손으로 꾹 눌러 번지게 하는 것처럼, 패율의 창이 노리는 목표 지점도 점점 커져서 상체를 다 잡아먹을 정도였다.

‘대단하다.’

냉병기 특유의 살기는 존재하지만 패율 본인의 살기는 없다.

이것은 거대한 투기였다. 투기가 빛처럼 형상화되어 상대를 노리는데, 깊고 방대한 상단전을 지닌 연호정조차 타점(打點)을 읽을 수가 없었다.

연호정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래서 무공지로(武功之路)에는 끝이라는 게 없는 것이다.’

자신보다 한참 약한 상대의 독특한 무도(武道)에 감탄하게 된다. 분명한 약자지만, 약자의 무공에도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패율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었다.

파아아아악!

강궁의 화살처럼 날아든 패율의 단창이 순식간에 연호정의 상체를 노리고 쏘아졌다.

그 공격에 다른 의도는 없었다.

오로지 뚫는다는 의지, 관통하겠다는 의지만 순수하게 남은 창격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정직하면서도 막을 수 없는 거력을 품고 있었다.

파아아아아앙!!

바닥에 깔린 눈이 좌우로 흩어지며 솟구쳐 오르더니, 창날이 쏘아 낸 경풍을 따라 원을 그리면서 날아갔다.

아름답고 화려한,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무도가 엿보이는 멋진 일격이었다.

스르륵.

연호정의 어깨 부근이 살짝 베였다.

피육은 다치지 않았지만, 옷이 베였다. 아홉 조직의 후계자들과 싸울 때 패율이 상처 입은 그곳이었다.

창을 회수한 패율이 담담하게 말했다.

“역시 안 되는군.”

“그렇군요.”

“나름대로 영혼을 실은 일격이었는데.”

영혼을 실은 일격.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패율은 자신이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일격을 선보였고, 연호정은 그것을 넉넉하게 피해 냈다.

그러나, 피해 냈다고 해서 패율의 무공이 별 볼 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단하십니다.”

“그랬나.”

표정은 담담했지만, 연호정은 속으로 무척 놀라고 있었다.

‘상단전을 썼다.’

영혼을 실은 일격이라는 말은 최선을 다했다는 말임과 동시에, 극한의 고수들이 운용하는 상단전의 힘까지 끌어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정도일 줄이야.’

관일창은 더 이상 하나의 외가 무공이 아니었다.

내공심법은 물론 상단전까지 아우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신공과도 같았다.

“어떠냐? 이 무공으로 성천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성천에 도달하는 것은 사람이지 무공이 아닙니다.”

“안다.”

“다만, 성천의 강자에게 어울리는 무공이냐 물으신 거라면…….”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천의 무학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패율이 흡족한 표정으로 자세를 풀었다.

“…….”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연호정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내가 할 말은 창에 다 담았다.”

“…….”

“또 보도록 하자.”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