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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826화 (826/963)

826화. 삼세(三勢)의 주인 (1)

“흐음.”

문서들을 훑어보는 양천의 눈은 유독 진지했다.

“이렇게까지 빨리 정리가 될 줄은 몰랐구나.”

“그러셨습니까.”

“워낙 등 돌리는 놈들이 많지 않으냐. 여기에 줄 대고, 저기에 줄 대고. 그야말로 난리지. 나는 내 이름값이면 알아서 모여들 줄 알았는데,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어. 묵룡부를 세우기까지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순수 흑도인인 양천조차도 흑도를 규합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흑도 무림인들이 등에 칼 꽂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서 그렇다.

신뢰라고는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흑도 무림에서 살아왔으니, 양천 역시 그들의 특성을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다는 건, 그만큼 흑도의 규합이 어렵다는 의미였다.

“방법을 달리하셨다면 그보다 빨리 규합했을 것입니다. 흑도가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는 건, 달리 말하면 누구보다 강자를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렇지.”

더 강한 쪽에 붙어야 생존할 확률이 올라간다. 그런 면에 있어서 확실히 흑도는 남달랐다. 힘의 흐름을 백도 정파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알아챈다는 뜻이니까.

“결국 네가 한 일은, 이 많은 흑도 문파들한테 이곳에서 가장 강한 놈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려 준 셈이 되었구나.”

“그렇습니다만, 기실 간단합니다. 아홉 조직의 수장들을 물갈이하고 새 주인을 앉혔으며, 나아가 그들과 불리한 조건으로 거래했던 이들에게 연락하여 합리적인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제가 한 것은 고작 그것뿐입니다.”

고작 그것뿐이 아니었다.

연호정은 백서와 함께 흑도 무림 전체에서 날아드는 정보들을 발 빠르게 분석하여 약점이 될 만한 곳에 힘을 실었고, 배신할 것 같은 문파는 먼저 쳐 냈으며, 신뢰를 보여 주는 문파에겐 더 많은 지원을 약속했다.

일견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묵룡부의 힘과 영향력을 생각하면 기실 이러한 정책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세부적인 일 처리에선 차이가 나겠지만, 누구나 냉정을 되찾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묵룡부의 수뇌부가 모두 멍청해서 이와 같은 일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현상 유지 후, 점진적인 발전을 원했다. 흑도를 규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피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책이 소극적이었고, 대국을 보는 안목은 있었으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바로 그것이 묵룡부의 패착이었다.

흑도답게 시작했다면, 흑도답게 끝을 맺어야 했다. 묵룡부의 시작은 흑도였음에도, 정작 유지 부분에서는 백도 무림에나 어울리는 기울어진 상식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연호정은 그 흐름을 바꾸어, 모든 일을 흑도답게 시원하고 발 빠르게 진행했다.

같은 편이 되면 상생할 수 있다. 배신하면 우리가 먼저 칼을 꽂는다. 거래는 상식적으로 하며, 충성을 맹세하면 더 많은 이득을 보장한다.

정신론적인 충성의 개념이 아닌, 실질적인 보상 제도를 넣었다. 물론 그 효과가 크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정책을 바꾸고 시행한 시간을 생각하면 심상치 않은 변화였다.

“십이지신과 장로들이 더 합리적이고 발 빠른 조직 개편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생각하셔야 할 것은 더 빠르고 확실한 정책이 아닌, 이러한 정책으로 손해를 보는 문파들을 다독일 만한 방안들입니다.”

“손해라.”

“이러한 정책으로 많은 문파가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만, 반대로 손해를 보는 문파도 적지 않을 겁니다.”

“다 안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 안고 갈 수는 없어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티 정도는 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이외의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하셔야 합니다.”

“그들 이외?”

“손해를 본 문파들이 어떤 짓을 하겠습니까?”

“……막 나가겠지, 아무래도.”

“모두가 그러진 않겠지만, 대다수는 그러겠지요. 아마 묵룡부의 눈 밖에 났다는 생각도 들 겁니다.”

“즉, 챙겨 줘야 할 문파는 잘 챙기되 아닌 문파들은 허튼짓하지 않도록 확실히 주시하라는 뜻이로구먼.”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역시 사부님과는 대화가 됩니다.”

양천이 문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변화는 심상치가 않구나.”

“묵룡부에는 성천에 이름을 올린 고수가 둘이나 있습니다. 하나가 있을 때보다 확실히 더 끌리겠지요.”

“물론 그것도 그렇지. 다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양천이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속도로군.”

“예?”

“너의 이 상식적인 정책들은, 한 끗만 잘못 디디면 득보다 실이 커질 수 있는 것들이야. 적어도 우리 흑도에서는 그렇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가능케 하였다. 상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 그 답은 속도에 있다.”

“……!”

“백도 무림이었다면 봉기가 일어났겠지. 하지만 흑도는 그렇지 않아. 이 놀라운 속도와 과감함, 그리고 분명한 보상을 약속하는 정책들에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

“흑도든 백도든, 대하는 방식에 차별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 판명되는 순간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집단의 성격과 욕심을 알아내는 것이지.”

양천이 옆에 놓인 탁자에 문서를 두었다.

“흑도의 성격에 맞게 속도 하나로 모든 걸 가능케 하였으니, 너의 안목이 참으로 놀랍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알아봐 주시는군요.”

“알아봐야지. 서로 주고받는 게 사제지간이라지만, 이런 부분에서까지 제자에게 배우면 무슨 낯으로 살아가겠느냐.”

말은 쉽지만, 이 방식의 효율성이 극대화된 이유를 꿰뚫어 보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단순히 합리적인 정책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뭔가 상식적이지 않고 파격적인 정책이었다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달라지셨다.’

양천의 안목은 예전에도 뛰어났다.

하지만 근래 보여 주는 양천의 지식과 혜안은 이전과 또 다른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계속 배우고 분석하는 것이지.’

흑도 무림의 총수, 성천에 이름을 올린 절대자.

거기에 믿음직스러운 후계자까지 있으니, 무림인으로서 이뤄 낼 만한 건 다 이뤄 냈다고 볼 수 있다.

한데도 양천은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빠르고 날카롭게.

그것은 양천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 공부와 배움이, 무공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무신(武神)에게는 명상이나 육체 단련만 수련인 게 아니다.

걷다가 밟은 낙엽 한 장이 내는 소리를 듣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게 고수의 세계인바, 한 번도 파 보지 않은 행정과 각종 정책을 공부하는 양천의 무공은, 조만간 또 한 번 도약의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연호정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쨌든 그간 고생이 많았느니라. 밤잠도 설쳐 가며 여기저기 오만 곳을 쑤시고 다니더니만, 기반 하나는 확실하게 쌓았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연호정답지 않은 투덜거림이었다.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후계자 자리 내어 달라고 그리 당당하게 말했으니, 최소한 값은 치러야 할 것 아니냐.”

“그걸 값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멀기도 멀었지요.”

“당연히 그래야지. 이 정도로는 턱도 없느니라.”

한결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자, 한잔 받거라.”

“좋지요.”

술을 받은 연호정이 주향을 맡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뭔 술입니까?”

“모른다.”

“예?”

“백서가 직접 담근 술이다. 담그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한 해에 몇 동이 얻지도 못한다.”

연호정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그 양반이 그런 것도 하는군요.”

“이 딱딱한 흑도 무림에서 자기 자신을 잘 붙잡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 백서가 그중 하나지. 수양을 위해 이것저것 건드려 보던 중 술 담그는 재미에 푹 빠진 모양이다.”

양천이 턱으로 잔을 가리켰다.

“마셔 보거라.”

연호정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크허, 이거 왜 이렇게 독합니까?”

“그렇지?”

“이렇게 독한 술은 처음 마셔 봅니다. 그래도…….”

코를 몇 번 벌름거리는 연호정의 표정이 제법 우스꽝스럽다.

“뒷맛이 묵직하고 좋은데요?”

“첫 잔에 놀라고, 두 잔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지. 그리고 석 잔을 마시는 순간 중독된다. 이 술이 그래.”

“중독까지는 모르겠고, 흔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확실히 아닙니다. 비슷한 종류를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럴 때나 꺼내는 것이다.”

잔을 든 연호정이 멈칫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오늘 밤에 떠나려는 거 아니었느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끔 생각하는 건데, 네 녀석은 쉬고 싶다고 하면서도 쉬는 걸 정말 싫어하는 것 같더라. 어떻게 일 끝났다고 바로 출발하느냐?”

연호정이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빨리빨리 처리해야지요. 저쪽 동태도 심상치 않다고 하던데.”

“그래도 하루 정도는 쉬고 가지?”

“가면서 쉬면 됩니다. 무작정 달려가진 않을 테니까요.”

“누가 널 말리겠느냐. 한 잔 더 받거라.”

“좋지요.”

그렇게 두 잔의 술이 연호정의 위장에 들어갔다.

양천은 마시지 않았다. 그저 연호정의 잔만 채워 줄 뿐이었다.

“사부님은 안 드십니까?”

“너 석 잔 주고 내가 다 먹을 거다.”

“석 잔만 주시게요?”

“잔말 말고 막잔 받거라.”

“예.”

마지막 잔을 비운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부님 말씀대로군요. 석 잔 마시니까 계속 마시고 싶습니다.”

“웃기지 마라. 이제부터 이 술은 내 거다.”

술병을 자신 앞에 내려놓은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왼손을 들었다.

“해 봐.”

엉거주춤 따라 일어난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뭘 말입니까?”

“쳐 보라고.”

“……?”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수련은 한 것 같은데, 어디 내 얼굴에 먹칠하지 않을 수준은 되는지 보자.”

순간 연호정의 우권(右拳)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쩌어어어어엉!!

연호정의 주먹을 받아 낸 양천의 손바닥에서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이이이익!

주먹과 맞닿은 손바닥 위로 허연 연기가 올라왔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치는구먼.”

“전사력(轉絲力)을 구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보통 무공이 아니에요.”

“당연하지. 평생 연마해도 모자랄 거다.”

양천의 손이 그대로 태사의 쪽을 향했다.

우우우우우웅!

거대한 무언가가 두둥실 떠 날아왔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쿵! 촤르르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놓인 것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광룡부(狂龍斧)와 교룡쇄(蛟龍鎖), 그리고 흑백쌍룡부(黑白雙龍斧)였다.

“네가 맡겨 놓은 물건이다.”

“…….”

“다시 가져가거라.”

“예, 그래야지요.”

그동안 너무 바빠서 이 애병들을 잊고 살았다. 어쩌면 잠시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일부러 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랬다면,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철컥! 철컥!

흑백쌍룡부를 등허리에 교차해 차고, 교룡쇄를 소매 안으로 빨아들여 상체를 휘감게 하였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새삼스레 소름이 돋았다.

마지막으로 광룡부를 든 연호정이 보란 듯 어깨에 걸쳤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네 물건인 모양이다. 아주 잘 어울리는군.”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일 끝나면 곧장 돌아오도록 해라. 아직 네가 할 일이 많아.”

“물론이지요.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사실 그쪽 동네 정치질은 별로 재미도 없습니다.”

“허허허.”

양천이 편하게 의자에 앉았다.

“자주 연락하고.”

“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대전을 나섰다. 너무나도 담백한 헤어짐이었지만, 어색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쿠구궁!

대전의 문이 닫히고.

‘…….’

양천은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이 점점 빨갛게 부어올랐다.

“예의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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