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1화. 삼세(三勢)의 주인 (6)
제갈문호가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의 무시무시한 대결은, 그 빠르고 매서운 공방만큼이나 순식간에 끝이 나 버렸다.
‘이럴 수가…….’
공공대사의 좌측 어깨에 올려져 목을 노리는 검.
실질적인 피해는 모용군이 훨씬 더 많이 입었다. 공공대사 역시 내외상을 입었지만, 아직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반대로 모용군은 호흡까지 거칠어져 있었다. 호흡을 기반으로 내공을 쌓는 내가고수에게 있어 호흡이 흐트러졌다는 것은 기량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공공대사가 패배를 인정했다. 제갈문호는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후우. 후우.”
거칠어진 호흡을 안정시킨 모용군이 검을 회수했다.
공공대사 역시 자세를 풀었다. 여전히 고요하고도 담백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그리고 자태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용군의 눈빛은 흔들렸고, 공공대사의 눈빛은 담담했다.
잠시 후.
“제가 이겼군요.”
“그렇소.”
모용군이 입을 다물었다. 공공대사 역시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반 각 후.
“왜 백보(百步)를 지르지 않았습니까?”
“허허, 백보를 구사할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모용가주의 검이 빨랐소. 마지막에 그 벼락을 닮은 검, 정말이지 놀라운 무리(武理)로 가득하였소이다. 내 오랜만에 개안(開眼)했소.”
“대사께서 백보를 질렀다면, 십중팔구 제 패배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소.”
“부인하시는 겁니까?”
“패배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거란 말이오.”
“…….”
“백보를 끝까지 질렀다면 모용가주께서는 그대로 죽음을 맞으셨을 것이오. 그리고…….”
공공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빈승 역시 팔 하나는 날아갔을 것이외다.”
“예, 그랬을 겁니다.”
“우리는 같은 동료요, 맹우(盟友)이자 백도 정파의 무림인이오. 제아무리 실전과 같은 비무라 한들, 진정 상대를 죽일 수는 없잖소. 하물며 빈승은 불자(佛者)외다.”
공공대사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흉흉한 무공을 주고받은 주제에 불자라고 말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하오.”
“…….”
“또한, 모용가주께서도 알고 계셨잖소? 내가 주먹을 멈추리라는 걸.”
“읽고 계셨습니까?”
“동귀어진에 가까운 한 수. 마지막 힘을 쥐어짠 그 일검을 구사하면 저 땡중은 반드시 백보를 거둘 것이다. 결코 나를 죽일 수 없으니까.”
“…….”
“그러한 판단에서 나온 회심의 일격 아니었소?”
모용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한 판단이었소. 그 찰나의 순간, 빈승의 한계를 읽고 모든 걸 던진 것만으로도 모용가주의 결단력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오.”
“…….”
“결국 빈승으로 하여금 주먹을 거두게 하였으니, 모용가주의 승리요.”
“……그렇군요.”
모용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사님 말씀대로 제 승리입니다. 하지만…….”
구름이 많이 낀 하늘은 당장이라도 눈을 퍼부을 것처럼 서늘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 어둠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모용군은 눈을 감았다.
“아직 대사님께 비하면 멀었군요, 저는.”
“그렇지 않소.”
“승부에서는 이겼지만, 대사님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승부를 가리는 데에 변명은 필요치 않은 법. 공공대사가 패배를 자인했으니 모용군의 승리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모용군은 승리의 희열을 맛볼 수 없었다. 실질적인 실력만 보면 아직 공공대사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얻은 무력이지만, 역시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군요.”
모용군은 지옥 같은 고통이라 말했다.
고작 몇 달, 얼마 되지도 않은 폐관 수련이었다. 그 정도는 성장이 막힌 절정고수라면 누구라도 도전할 만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달이라는 기간이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안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었느냐다.
당가 사태 속에서 연호정의 성장과 암왕의 무력, 당가주의 비기 등을 보며 큰 충격을 받은 그였다.
무림인에게 정치력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무력이었다. 모용군 역시 수련에 소홀하지 않았지만, 그들처럼 영혼과 목숨을 던져 수련한 지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폐관에 들었다. 전장을 전전할 수도 없는 위치였고, 그런 것으로 발전할 만한 무력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폐관에 들어 검을 휘두른 적은 거의 없었다. 무공 상승의 목표를 위해 든 폐관은, 어느새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고통,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의 싸움이 주가 되었다.
모용군은 고뇌했다.
나는 대체 왜 폐관에 들었던 것일까? 단순히 무인으로서의 욕심 때문에? 경쟁자들에 대한 질투로 인하여? 그도 아니면…….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경쟁자들은 끊임없이 발전할 테고, 세상을 바꿔 가고 있을 텐데. 이리 고민할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휘두르는 게…….
그런데 강해지면 그 힘으로 난 무엇을 할 거지? 더 강해진다 한들 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나는 무림맹주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망가져 버린 것인가.’
초조하고,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서글펐다.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과 고뇌는 한순간이지만 모용군의 무력을 퇴보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경쟁자들이 서로 하나 되어 자신을 압박하는 그 상황에서 좌절과 실망, 불안과 착잡함으로 생애 처음 무너져 내렸다 한들.
모용군은 그곳에서 매몰되지 않았다. 애써 부정하고 거부했지만, 종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속여선 안 된다는 강한 자존심이 그를 지탱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솔직해졌다. 그리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삶에 당당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상태를 인정하고,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 그 순간.
사고의 한계가 확장되는 그 벼락과도 같은 순간에, 모용군은 어느새 자신의 검이, 무공이 태산의 팔부 능선을 오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깨달음, 그리고 깨달음.
인도(人道)는 곧 무도(武道)라, 한계를 넘어 높이 날아오른 자에게 무(武)의 신(神)은 육체라는 대가보다 더 가혹한 대가를 요구한다.
정신, 영혼.
지옥과도 같은 번뇌 속에서 명징하게 빛나는 스스로를 찾을 수 있다면, 그 고통의 순간을 이겨 낸 무의 종자에게 신은 비로소 길을 열어 주게 마련이라.
정신이 붕괴될 것 같은 자괴감을 이겨 내고 날아오른 모용군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막강한 무력을 손에 넣었다. 잘못 이해했던 신공의 구결도, 검리(劍理)도 막힘없이 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도.
연호정은커녕 공공대사에도 미치지 못한다. 거의 다 따라잡았지만, 종이 한 장 차이라도 분명한 차이였다.
그것이 서글펐고 허무했으며, 동시에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고개를 든 채 눈을 감은 모용군을 보며, 공공대사가 말했다.
“진심을 담아 말하는데, 모용가주께서는 결코 스스로를 폄하할 필요가 없소. 모용가주의 무공은 이 땡중의 무공과 차이가 없소.”
“위로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위로가 아니라 진심이오. 승부를 떠나, 모용가주가 시종일관 이 땡중에게 밀렸던 것은 깨달음의 차이가 아닌 무공의 상성 때문이라고 보오.”
“상성.”
“소림의 무학은 완벽을 무너트린 균형이오. 더 강하게 발전했고, 더 탄탄하게 다져졌소. 그러나 모용가주의 검은 소림 무공 이상의 극단적인 파괴력을 추구하는바, 균형 잡힌 소림의 무공과 부딪치면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소.”
“그렇군요.”
공공대사가 쓰게 웃었다.
“무학에서의 불리함을 그 무학을 익힌 사람의 성정을 간파하여 역전시켰으니, 과연 모용가주의 안목은 대단하오.”
모용군이 눈을 떴다.
“아무리 대단한 무공도 결국 익힌 사람의 몫이다…….”
“그렇소이다.”
고개를 내린 모용군이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웃으며 모용군을 마주 보았던 공공대사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사라졌다.
“……모용가주?”
“대사님.”
“말씀하시오.”
말없이 공공대사를 보던 모용군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였다. 단순히 예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큰 공경이 담긴 제대로 된 인사였다.
“감사했습니다.”
공공대사는 당황했다.
“어찌 이러시는 것이오?”
“대사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모용가주.”
“다만, 그때의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물론 지금이라고 대사님의 가르침을 모두 수용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대사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가르침을 내려 주셨는지 압니다.”
공공대사는 더더욱 당황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모용가주에게 조언이나 도움을 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예를 취한 모용군이 허리를 폈다.
“대사님.”
“…….”
“무림맹을 잘 부탁드립니다.”
“……모용가주?”
공공대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대체 어찌 이러시는 게요?”
모용군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 저 멀리 떨어진 제갈문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군사.”
흔들리는 눈으로 두 사람을 보던 제갈문호가 입을 꾹 다문 채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꾸밈없는 그 미소, 이전의 모용군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내 전에 말한 바 있을 것이오. 나와 군사는 적이 아니라고. 이유인즉, 군사는 무림맹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예, 그러셨습니다.”
“군사 덕분이오.”
“예?”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군사 덕분이오.”
제갈문호 역시 공공대사 못지않게 당황했다.
“모용가주. 그게 무슨…….”
“어디 고마운 사람이 군사 하나뿐이겠소? 다른 봉공들에게도, 그리고 무림맹의 무사들에게도 감사할 뿐이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모용군의 언행은 두 사람의 심박수를 조금씩 올리고 있었다.
모용군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오는구려.”
광활한 천공은 여전히 어두웠다.
먹구름 가득한 늦겨울 하늘에서, 이번 겨울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눈송이들이 하늘하늘 내려오고 있었다.
“내 동생 우는 독하디독한 나와는 달리 여리고 착한 아이외다. 그래도 무사다운 강단과 뛰어난 안목, 결정적인 순간에 판세를 결정짓는 지혜가 있으니 앞으로 크게 될 녀석이오.”
“……?”
“의정군의 대수로서, 차후 무림맹의 기둥으로서 부족함 없이 클 터이니, 두 분께서는 많은 지지와 애정 어린 질책으로 그 재능을 꽃피워 주길 부탁드리오.”
“모용가주.”
모용군이 웃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번 해는 유독 눈이 많이 내리는구려. 그래도 그 하얀 눈이 멋들어진 백도 무림맹의 경관을 해치진 않소.”
사방에 크고 헐벗은 나무들만 가득하지만, 모용군의 눈에는 그 너머 광활하고 고풍스러운 맹의 건물들이 보였다.
그 자신이 언제나 보고 원해 왔던 무림맹의 풍경이.
“말수가 많지 않으나, 점창 장문인의 능력이 무척 출중하다고 보았소. 장로원에 머무를 만한 분이 아니니, 공석이 된 봉공 자리에 점창 장문인을 앉히면 차후 무림맹의 앞날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공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모용군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을 등진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공터를 빠져나갔다.
제갈문호의 얼굴에 충격이 일었다. 공공대사가 눈을 감았다.
“모용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