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화. 갈등의 씨앗 (7)
의정군과의 한바탕 싸움은 이각이 지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놀랍게도 연호정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멀리서 적당한 무형탄으로 대열을 흐트러트린 묵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병들 또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자잘한 찰과상이 대다수였고, 골절상이나 큰 내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싸움이었지만,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닌 환영식에 가까운 대련이었다. 당연히 피를 볼 필요도, 그럴 수도 없었다.
“놀랍군.”
모용우는 혀를 내둘렀다.
“무극을 연 절대고수는 일인 문파급의 전력을 낼 수 있다고 듣기는 했네만, 상상 이상이야.”
하지만 놀란 건 연호정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떤 훈련을 한 겁니까?”
“음?”
“놀랍도록 잘 연마되어 있어요. 예전에도 한 몸처럼 움직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하, 고생 좀 했지.”
“개개인의 기량도 크게 늘었고, 당황스러울 수 있는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도 발군입니다.”
“예전에 자네가 잘 가르친 덕분이기도 하고, 제갈 군사 덕분이기도 하지.”
“아, 그러고 보니 아연이는?”
“잠시 본가에 갔다 온다고 했네. 아마 며칠 안으로 돌아올 걸세.”
“그렇군요.”
그때, 팽만호가 연호정에게 냅다 달려들었다.
연호정이 가볍게 그의 어깨를 밀었다. 달려들던 팽만호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으헉!”
“뭐 하는 짓이냐.”
“반가워서 그렇지!”
“징그럽다, 이놈아.”
“하하하!”
팽만호뿐만이 아니었다. 과거 멸사군 시절 군병들이 연호정 주변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연호정의 얼굴에 아련함이 감돌았다.
무당의 옥청, 아미의 송연경과 창수들, 화산의 윤호와 동호는 물론 점창의 척강과 곤륜의 여국까지.
어디 그들만이 전부일까. 멸사군의 군병들 모두가 소중한 부하들이었다. 멸사군만큼은 아니지만, 탕마군의 군병들 역시 친근감 넘치는 수하들이었다.
처음 중원을 종횡하며 함께했던 이들.
그 모두를 찬찬히 돌아보던 연호정이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호담과 군평이 안 보이네?”
“…….”
반가움 가득했던 군병들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졌다.
연호정과 묵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모두가 바빴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연제가 천하를 종횡하며 삼교와 싸울 때, 우리 역시 몇 번의 출정을 거쳤지. 흑도라고 하기에도 뭐한 악랄한 놈들은 시시각각 나타나기 마련이고, 개중에는 무시하기 힘든 수준의 전력을 구비한 놈들도 많았어.”
“…….”
“하남 동부에 악신회(惡神會)라는 집단이 있었네. 당당하게 악신을 표방하는 놈들이었어.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막강했지.”
“그랬군요.”
“잘 싸워 주었다네. 그중 군평은 놈들이 붙잡고 있던 인질을 구해 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침투했었지. 호담은 그런 군평과 인질들이 나올 퇴로를 열고 있었어.”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끝내 살리지 못했네.”
전투 부대의 숙명이었다.
소중한 전우들이지만, 동시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들을 살고 있다. 대의(大義)라는 목표와 의정군 소속이라는 자부심 아래 살고 있으나,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우이기에 서로가 더더욱 소중하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더더욱 강해진 군병들이다.
새로 충원한 사람들, 한 번 본 적 없는 인물들이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본래 그들이 있었어야 할 자리에서 없어져 버린 인연들 때문이었다.
‘호담, 군평.’
두 사람은 명문 출신이 아니었다. 멸사군에 몇 없는 낭인 출신 무사들이었다.
끝까지 이 악물고 버텨 낸 이들이었고, 그 독한 정신은 오히려 명문의 고수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었다. 둘 다 실력이 처지는 쪽에 속했으나,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움직이던 이들이었다.
연호정은 눈을 감고 두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름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기억의 묘지에 담아 두었다.
모용우가 손뼉을 쳤다.
“애도는 우리가 많이 해 줬네. 죽은 전우들이 축 처진 우리를 보고 좋아할 리도 없고, 오늘은 그럴 자리도 아니잖나.”
“그렇습니까.”
“자, 오랜만에 왔으니 술판이나 벌여 보세. 식당에 미리 말해 두었으니 곧 음식과 술이 배달될 거야.”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일꾼이 음식과 술을 가져왔다.
연무장 바닥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연호정은 문득 생각했다.
‘익숙하군.’
흑제성의 전우들과도 꼭 한 번씩 이렇게 맨바닥에 앉아 술을 마셨다.
전투가 끝났을 때도 그랬고, 훈련이 끝났을 때도 그랬다. 전투가 끝났을 때는 죽은 전우들을 위해 마셨고, 훈련이 끝났을 때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미래의 나를 위해 마셨다.
이 환경이, 웃음 가득한 술자리가 잘 맞는 옷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하긴, 원래 깜냥도 안 되는 놈이었지.’
흑제성의 성주, 묵룡부의 소부주.
좋은 성주도 못 되었고, 좋은 후계자도 되기 힘들 것이다.
연호정은 언제나 병사들과 함께했다. 함께 나서서 싸우고 울고 웃었다.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많이 컸군.’
천하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하지만 그 사실에 뿌듯함이 느껴지거나 뭔가를 이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선 자리는 언제라도 털어 낼 수 있는 자리다. 목적을 위해 이런 위치에 도달했을 뿐, 어떤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없었다.
다만, 사회적 신분으로 봤을 때 많이 큰 건 사실이었다.
‘도달한 위치가 높을수록, 내 밑에 사람이 많을수록 더 크게는 봐도 섬세하게는 못 본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출정 날짜가 잡혀 있습니까?”
“아직은. 애초에 의정군은 유군 부대일세. 훈련을 위해 맹에 있는 시간이 많지만, 굳이 명이 떨어지지 않아도 나가서 천하를 돌아보겠지.”
“하긴, 정식으로 출정 명령을 받는 건 다른 부대들이겠지요.”
“우리도 받기는 하지. 하지만 조금 더 자유롭지.”
“그랬지요.”
그때, 옥청이 말했다.
“사부님과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어디서 들었어?”
“무당에서 따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구만. 아니 그런데, 굳이 그렇게 불편하게 안 해도 돼.”
“예?”
“이제는 대수도 아닌데 뭐 하러 그리 깍듯하게 대해? 나이도 많으면서. 그냥 이놈 저놈 해도 상관없다.”
옥청이 황당하다는 듯 연호정을 보았다.
“대수는 아니지만 무림 최고 반열에 오른 고수가 되셨잖습니까? 오히려 대하기 더 어려워요.”
“뭔 웃기지도 않는…….”
“사부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언젠가 사달을 낼 사람이라고. 마음에 들면 쫓아다니되, 원체 위험한 사람이니 이왕이면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양반다운 말이구만.
“그리고 뭐…… 한번 대수는 영원한 대수, 이런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어떻게 편하게 하겠습니까?”
“너도 참 팍팍하게 산다.”
그 순간 팽만호가 보란 듯이 연호정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편하게 대하라면 편하게 대해야지. 안 그런가, 연 소협?”
“다른 사람은 그래도 너는 그러지 마라.”
“왜!”
“대가리 깬다.”
“……허험.”
헛기침을 하던 팽만호가 돌연 낄낄거렸다.
“그래도 성천의 고수 어깨에 팔도 둘러 보고, 나도 출세했구만.”
“푸하하하!”
군병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과 욕설이 마구 오고 가는 술자리였다. 연호정은 이 자리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연신 술잔을 주고받던 중 송연경이 물었다.
“어땠어요, 흑도는?”
군병들이 궁금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던데?”
“그게 다예요?”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거기서 거기지. 백도 무림에도 악랄한 놈이 있는가 하면, 그쪽 동네에도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많다. 흑도네 백도네 하면서 대립하고 있지만, 그쪽 동네 사람들이라고 눈 세 개 달린 건 아니잖냐.”
조용히 있던 묵비가 툭 던지듯 말을 더했다.
“오히려 더 살판났지. 때려죽여도 괜찮은 놈들이라고 신명 나게 주먹을 휘두르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피 냄새가 진동하더라.”
“내가 언제?”
“기억도 안 나나 보네요, 하도 많이 두들겨 패고 다녀서.”
“허.”
또 한 번 웃음보따리가 터졌다.
그들의 술자리는 그런 식이었다. 대개 물어보는 건 군병들 쪽이었고, 답하는 건 연호정과 묵비 쪽이었다.
그렇게 신명 나는 술자리로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얼추 군병들끼리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하자, 모용우가 물었다.
“특명 전권 대사로 왔다고?”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기에 굳이 대사 자격으로 왔다는 것은, 아무래도 맹주 선출 때문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두고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기야 하겠지.”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없지만…….”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조심해야 할 걸세.”
“어떤?”
“맹 외에 있을 때는 몰라도, 맹 내에 있을 때는 종종 부대장들끼리 모임을 가지기도 한다네. 상부에서도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라, 한 번씩 자리를 열고는 하지.”
“흐음.”
“느끼고 있겠지만, 연제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네.”
“당연하겠지요.”
“그래, 잘 알고 있겠지. 다만, 자네를 나쁘게 보는 사람은 말단보다는 상부에 몰려 있다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예,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별일이야 있겠느냐마는, 무슨 일이 터져도 연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걸세.”
묵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내정 간섭(內政干涉).”
“……아!”
“연제는 공식적으로 묵룡부 측의 사람이야. 아무리 가까운 동맹 사이라고는 하나, 연제가 이쪽 정치에 끼어드는 순간 난리가 날 걸세. 특히 연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여론을 선동해서라도 연제를 옭아매려 하겠지.”
모용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제의 능력이 출중한 것은 알지만,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듯싶네.”
“당연히 그래야지요.”
연호정이 잔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척이라도 해야겠지요.”
* * *
다음 날.
“……!”
아들을 보는 남궁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대단하구나.”
“아닙니다.”
차분하게 차를 마시는 장남을 보며, 남궁인은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언제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것이냐?”
“일 년이 조금 안 되었습니다.”
“허어.”
남궁인은 연신 감탄했다.
장남 남궁표의 나이가 어느덧 서른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직 젊지만, 또한 청춘이라고 할 수는 없는 나이였다. 무림인으로서 슬슬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시기이긴 했다.
하지만 무종지벽을 뚫고 고고한 검기(劍氣)를 내뿜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과거 십 년 안에 자신을 넘을 거라 했던 말도 오만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제왕검형은?”
“후반부까지 전부 익혔습니다.”
남궁인은 더더욱 놀랐다.
‘아버지께서 전부 전수하셨구나!’
자격이 되지 않는 자에게는 혈육이라도 검을 전수하지 않는 분.
그런 분이 남궁표에게 모든 것을 전수하였다는 건, 남궁표의 재능이 정점에 달했음을 인정하셨다는 뜻이리라.
“대단하다. 그리고 잘했다. 정말 장하구나!”
“아닙니다. 고비가 많았어요. 다 조부님께서 많이 도와주신 덕입니다.”
“허허, 누가 돕든 자신의 경지는 자신이 개척하는 법. 내 너를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나.”
남궁표가 미소를 지었다.
몇 년의 세월 동안 폐관을 했음에도, 오히려 그 전보다 더 어려진 것 같았다.
“그리고 좋은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음?”
“조부님께서 현이와 함께 맹을 방문한다고 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