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44화 (844/963)

844화. 태풍의 핵 (1)

“…….”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던 천효락이 순간 멈칫했다.

여인, 화향(火香)이 물었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세요?”

“……아니다.”

천효락이 유쾌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군. 무림맹, 무림맹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거대할 줄은 몰랐다. 이건 뭐 작은 국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야.”

화향이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 대단한 무림맹에서 손님 접대를 이따위로 하다니, 주인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당장에라도…….”

“아서라. 원체 우유부단해서 그렇지, 무림맹만 한 용담호혈도 없다. 수뇌부 중 하나만 와도 나는 물론 너까지 강제로 지옥행이야.”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화향의 익살스러운 대꾸에 천효락이 피식 웃었다.

공무 등 대외에 얼굴을 비칠 때는 철저한 상하 관계를 중시하지만, 사적으로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했다. 거의 남매지간이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부터 천효락의 호위자로 키워진 화향이었다. 다른 부하들과는 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 주인님 말씀이 맞아요.”

“음?”

“우유부단함이요.”

화향이 눈을 빛냈다.

“그간의 정국을 보면 언제나 한발 뒤처졌잖아요? 우수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도 활용을 못 하는 느낌이에요.”

“네 말대로다. 우수한 사람은 많지. 하지만 효율적으로 움직이질 못해. 이건 분명 무림맹의 고질적인 문제다.”

“그러게요. 그런 걸 보면 확실히 묵룡부주가 걸물은 걸물이네요.”

“투왕 양천의 능력이 뛰어난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그렇다고 해서 무림맹의 잠재력을 무시해도 되느냐 하면, 그건 또 얘기가 다르지.”

“맹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천효락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화향은 손님 접대에 박하다고 말했지만, 그간 세상에 나온 적 없는 마인의 방문에도 외성의 가장 좋은 객당을 내어 준 건 충분히 대우해 준 것이라고 봐야 했다.

내성으로 들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신마림이라 해도 느닷없이 찾아온 무림맹 인사를 내성에 들이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잡아 죽이자는 수뇌부들부터 진정시키는 게 우선일 것이다.

아마 지금쯤 이 사태를 어떻게 두고 봐야 할지 한창 회의 중일 터였다.

“소위 백도라 자칭하는 이들은 협의, 정의를 위해서 칼을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보자. 협의는 제쳐 두고서라도, 정의(正義)라는 것은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지 않으냐?”

“그렇지요.”

“생각이 다른 이를 힘으로 굴복시킨다? 그것 또한 정의인가?”

“정의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렇지.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테지.”

화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무림에 발을 들이지 않으면 되지 않나요?”

“너에게 선택권이 있었느냐?”

“네?”

“내 호위 이외의 길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느냔 말이다.”

화향은 당황했다.

“주, 주인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저는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하, 너의 충성에 대해 논하자는 게 아니다. 어쨌든 너에게도 선택권은 없었어. 그리고 무림에 나고 자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도 달리 선택권은 없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고, 그 이외의 길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지.”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부모를 바꿀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태어났으면, 빨리 이 상황을 이해하고 살아남기 위해 돌파구를 찾는 게…….”

“그게 당연하지. 하지만 세상에 사람은 많다. 개중엔 강자도 있지만 약자가 훨씬 많지. 그리고 그런 약자들까지 안고 가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이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화향이 입맛을 쩍 다셨다.

“정말 속 편한 것들이네요.”

천효락이 빙긋 웃었다.

“나도 약자였다. 하지만 너를 붙여 줘서 살아남았지.”

“주, 주인님! 그건 경우가 다릅니다!”

“다르지만, 크게 보면 다른 것도 아니다. 적어도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천효락의 눈이 깊어졌다.

“달리 말하자면, 그래서 이들이 대단한 것이다.”

“네?”

“그간의 역사를 보자. 백도 무림은 언제나 한발 뒤처졌지. 약자들을 끌어안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의견을 무시해선 안 되니 이견을 조율하고, 누구 하나 손해를 덜 봐야 하니 급진적인 정책이 잘 튀어나오지 않는다.”

“…….”

“하지만 힘이 하나로 모였을 때, 그들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괴수가 된다.”

“왜 그렇지요?”

“모두를 끌어안고 가니 약자들이 모인다. 하나하나만 보면 별것도 없지만,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중원의 칠 할 이상이 백도로 분류되었다.”

“……!”

“약자는 아무리 모여 봤자 약하다고 생각하는 바보들은 하나로 모인 다수의 힘을 절대 이해하지 못해. 그간 무수히 많은 난(亂)을 겪고도 이 중원이라는 대지를 백도 무림이 주도하고 있는 이유가 분명한데도 말이다.”

화향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왠지 그 바보 중 하나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섬서에서 우리가 마주쳤던 녹림도들을 보자. 그들은 하나하나가 약해 빠진 산적들이야. 하지만 그동안 그들은 명문과 얽히는 게 아닌 이상 한번 엮인 상대를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보복하곤 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글쎄요?”

“당장은 힘들고 고되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그게 이익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아!”

“맥락은 다르지만, 백도 무림도 그러하다. 약자들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이지만, 훗날 큰 위협을 맞이했을 때 모두가 힘을 합치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천효락이 피식 웃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갖진 않았겠지. 다만 중요한 건 본능이고 천성이다. 그들은 그렇게 커 왔고 성장했다. 그래서 지금의 백도 무림이 있는 거야.”

확실히 보는 안목이 다르다고 화향은 생각했다.

그녀에게 세상은 단순한 것이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강자가 곧 포식자다. 그리고 포식자에게 먹히는 것은 곧 약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만 굴러갔다면 굳이 신마림이 지금까지 은둔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백도 무림에서도 이단아가 튀어나와 버렸다.”

순간 화향의 눈이 번뜩였다.

“연호정이요?”

“그래. 패왕이라 불리는 연호정이다.”

“……솔직히 저는 믿기지 않아요. 아직 이립에도 이르지 않았는데 성마지경(成魔之境)을 돌파하다니요?”

“지금 대사형도 성마경을 뛰어넘지 않았더냐? 물론 연호정과는 십 년이 넘는 격차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천효락의 입에서 대사형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화향의 얼굴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떠올랐다.

신마림의 대공자는 마도 무림 역사상 손에 꼽히는 천재였다. 당장 림주인 혁련휘가 성마를 이룬 나이를 생각해 보면, 대공자의 재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대공자보다 훨씬 어린 연호정은 진즉 성마경을 이룬 것도 모자라 비왕을 격살하고 성천에 이름을 올렸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작자인가? 천재란 말로도 형용할 수 없다. 천 년 역사에 다시 나기 힘든 괴물이 따로 없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어요. 중원 무림이 난세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천하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천하 모두를 속일 수 있다면, 그 힘으로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연호정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은 건 사실이었다.

그때, 천효락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떠올랐다.

“그건 이제부터 확인하면 되겠구나.”

“네?”

“손님 맞을 준비를 하거라.”

천효락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그 미세한 목소리의 변화만으로도 화향의 자세가 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재빨리 탁자를 정리하고 천효락의 뒤에 시립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안에 계시오?”

굵은 목소리였다.

가만히 들어 보면 그렇게까지 굵은 건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굵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 전체가 진동하는 것 같다. 딱히 내공을 발산하는 것도 아니고, 지닌바 기도는 오히려 범부만 못할 정도인데도 그렇다. 천효락 자신이 상대의 명성에 긴장했기 때문인지, 상대의 형용키 힘든 능력 때문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들어오십시오.”

덜컹.

방문이 열리고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크다.’

작은 키는 아니다. 아니, 평균보다 확실히 큰 키다.

하지만 기골이 장대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골격만 보면 키 큰 학자 같달까.

그러나 천효락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훅!

선선한 바람처럼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는 선비의 외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더니, 이내 방 천장을 뚫고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

잠시였다.

아주 잠시에 불과한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에 불과한지라 천효락의 오감을 흐트러트리진 못했다.

그러나 오감을 흐트러트리진 못했을지언정 그의 정신과 마음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었다.

치링.

기묘한 쇳소리가 났다.

몸에 걸친 병장기가 없는데도 그런 소리가 난다. 몸 어딘가에 쇠사슬 비슷한 것을 지니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천효락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신마림의 천효락이라 합니다.”

화향은 내심 깜짝 놀랐다. 주인님의 목소리가 진득한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주인님이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상대는 단둘밖에 없었다.

신마림의 대공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신마림주(神魔林主)였다.

‘설마 저자가 정말로 성마경을……?!’

사내, 연호정이 웃으며 마주 포권했다.

“전(前) 무림맹 소속원, 현(現) 묵룡부 소부주 연호정입니다. 마도 무림의 인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어인 말씀이십니까? 저야말로 천하제일의 재능을 타고난 당대 최강의 장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수라…… 역시 들여다보고 계셨습니까?”

“무안할 뿐입니다.”

연호정이 웃으며 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면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당연히 허락하실 것 같아, 미리 사람을 시켜 차를 부탁했습니다.”

천효락이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무력만큼이나 대단한 지혜의 소유자라고 칭송받는 분답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고작 이런 일로 지혜 운운할 건 아닙니다.”

“자리하시기 전에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천효락이 조금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만약 제가 자리를 허가하지 않았다면 어쩌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럴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셨군요?”

“……!”

“하하, 글쎄요. 그런 상황은 고려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소문이라는 것도 믿을 게 못 됩니다. 제겐 그만한 지혜나 눈치가 없는 모양이에요.”

천효락의 웃음이 조금 어색해졌다.

“자칫 잘못하면 오늘 망신을 당하겠습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토록 거친 세상에 망신 정도면 다행이지요.”

“……!!”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의 집 앞마당에서 칼이야 뽑겠습니까.”

천효락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지금껏 애써 숨겨 왔던 긴장이 두 눈 가득 실리기 시작했다.

“앉을까요?”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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