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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847화 (847/963)

847화. 태풍의 핵 (4)

번쩍!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노인의 신법 속도가 일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순간적으로 점이 되어 버린 노인을 보며 남궁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엄청나시구나.’

조부님의 무공은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이다. 남궁현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조부님의 진짜 무공을 본 적은 없었다. 가르침을 주시면서 한 번씩 기막힌 검예(劍藝)들을 보여 주실 때면 눈이 다 황홀해질 지경이었지만, 그 검으로 적을 상대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조부님과 겨루어 목숨이라도 부지한 자가 온 천하에 몇이나 되겠는가.

이룬 경지가 너무 높아서 상대할 자가 없다고 하였다. 가문에 은거하며 검(劍)만 바라보고 사시는 것도 상대할 만한 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조부님의 진짜 무공을 볼 수 있는 날이 오기야 할는지.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조부님은 한 번씩 상식을 깨부수는 기행을 벌이시곤 했다.

가끔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일도 많았고, 무공을 가르쳐 주시다 말고 느닷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날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조부님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는 깨달았다. 조부님께는 일상이 깨달음의 연속이라는 걸.

‘어찌 되었든 나도 속도를 높여야겠어.’

달려가시는 방향이 무림맹이었다. 아마 그곳에서 흥미진진한 무언가를 발견하신 모양이었다.

흥미진진한 무언가.

남궁현의 눈이 흔들렸다.

‘……있을까?’

모른다.

무림맹, 나아가 세상일에 관해서는 일부러 눈과 귀를 닫고 지냈다. 스스로를 제대로 연마하지 못했는데 어찌 천하를 살아갈 것인가.

무림맹과 묵룡부가 동맹을 맺은 것도 한 달 전에야 처음 알았다.

‘아마 있겠지.’

아련하게 떠오르는 한 여인의 얼굴.

남궁현은 애써 그 얼굴을 잊으려 했다. 한낱 연심에 사로잡혀 미래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잊으려 하면 할수록, 버리려 하면 할수록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선명해져 갔다.

무림맹으로 향하는 남궁현의 발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그의 호흡 역시 조금은 거칠어지고 있었다.

* * *

‘분명해졌다.’

파라라라라락!!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검.

그 검인(劍人)이 입은 옷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저러다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다.

‘세상에 저런 놈이 있단 말인가?!’

노인은 생각했다. 역시 천하는 넓다고.

무림맹 내, 심상치 않은 두 줄기 기운을 느꼈다.

하나는 서늘했고 하나는 거칠었다.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를 따져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지만, 정련(精鍊)의 정도만 보자면 서늘한 쪽이 미세하게 앞서간 듯싶었다.

하지만 거친 기운의 주인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이 자신을 포착한 순간, 노인 역시 그 기운이 담고 있는 힘의 실체를 파악했다.

나아가 실체를 파악하자마자 노인은 어느새 한 줄기 빛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젊다.’

지금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노인이 포착한 기운의 주인이 젊다는 것이다.

쉰이나 마흔 정도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젊다. 사람마다 생기(生氣)의 질과 양이 다르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삼십 대 중반을 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은 노인에게 있어 하늘이 뒤흔들리는 놀라움이었다.

‘그 나이에 이만한 경지를?!’

더 나은 검예, 더 높은 검도, 더 막강한 검력을 얻기 위해 세상과 담을 쌓고 검에 매진하였다.

가인(家人)들은 자신의 은거를 맞상대할 자가 없는 절대자의 고독으로 이해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그와 대적할 만한 고수는 많지는 않더라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싸우려 들지 않았다. 그토록 드높은 경지에 오르면 더 이상 싸움이나 서로 간의 우열이 문제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달랐다.

그는 언제나 검을 부딪쳐 볼 상대에게 목이 말라 있었다. 서로 목숨을 노리고, 누구의 깨달음이 더 우위에 있는가를 비교하는 것만이 삶의 낙이었다.

그토록 호전적인 성품을 숨기고 사는 그에게 있어 자식 놈들은 하나같이 눈에 차지 않았다. 재능도 그러했지만, 지닌 재능 이상의 경지로 오르기 위해 애쓰기는커녕 재능의 끝을 보기도 전에 정치에 맛을 들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무인은 무(武)로써 대화할 수밖에 없다. 검사(劍士)는 제 진심을 검(劍)에 담을 수밖에 없다.

한 번은 작정하고 투왕(鬪王)이나 창왕(槍王), 음제(音帝)나 도제(刀帝)를 찾으러 다녔다. 비왕은 애초에 잡을 수가 없는 놈이고, 정파 소속 성천은 하나같이 은거하여 싸움을 거는 것 자체가 민폐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도 결국 무산되었다. 창왕과 음제, 도제는 찾을 수 없었고, 투왕은 새외에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삼군(三君)에게도 눈을 돌려 보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일련의 행동에 검사로서 자괴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와 다시 칩거하였다. 그러다 장손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우울감에 빠진 차손도 가르쳤다.

재능 있는 손자들의 불타는 의지 앞에, 노인의 투쟁심도 어느덧 잠잠해졌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얻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노인은 깨달았다.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투쟁심의 불씨가 아직도 가슴 안에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아니, 불씨 정도가 아니라 산불처럼 거대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 그의 투쟁심은 죽어서도 뜨겁게 불타오를 듯했다.

‘누구냐.’

파아아아아아악!

노인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고랑이 생겼다.

실제로 땅이 파이진 않았지만, 가득 쌓인 눈이 좌우로 밀려나며 널찍한 길을 만들어 냈다.

‘대체 누구냐!’

놀라움, 그리고 호승심.

의식적으로 잊고 있던 투쟁심을 갑작스레 마주하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 줄기 이성의 끈은 잡아 두었다. 그리고 그 이성이 활활 타오르는 본능을 점점 밀어 두며, 당혹스러운 감정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인간이……?!’

젊은 생기도 놀라웠지만, 더 경악스러운 것은 신체에 담고 있는 다섯 가지의 기운이었다.

사색(四色)의 막강하고도 특성이 분명한 신기(神氣)는 물론 정공(正功)도 사공(邪功)도, 심지어 마공(魔功)도 아닌 기괴한 무공까지 익히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기운을 통제하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체내에 심어 두었다.

‘저럴 수가 있나!’

사색의 기운은 동류다. 네 가지 기운을 다루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정사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시커먼 기운은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그런 기운까지도 아무 문제 없이 품고 있다는 것은 기공(氣功)에 대한 깨달음이 천하제일을 논한다는 뜻이었다.

퍼어엉!!

거친 도약으로 날아오른 노인의 눈에, 비로소 푸른 용이 새겨진 거대한 성문이 들어왔다.

그 성문이 무림맹의 청룡대문이라는 것을 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올바른 절차 따위도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 있느냐!’

노인의 몸이 순간 돌풍이 되었다.

콰아아아앙!!

누가 말릴 새도 없었다. 막는다고 막힐 만한 기운도 아니었다.

수년 동안 새로 창립된 무림맹의 위풍당당함을 드러내 주었던 청룡대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궁! 콰앙!

부서지고 무너진 대문의 파편이 자욱한 먼지를 피워 올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수문위사들에게는 별다른 피해가 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들이닥치는 힘이 워낙 강해서 성문의 파편들도 내부를 향한 덕이었다.

콰콰쾅!

두 발로 대지를 밟아 가며 속도를 줄인 노인.

미친 듯이 펄럭이던 옷자락 끝이 심하게 상했다. 융통무애(融通無碍)한 기운이 중간중간 끊어질 정도로 속도를 높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노인의 눈에 두 명의 청년이 보였다.

정확히는, 한 명의 청년을 등 뒤로 둔 시커먼 장삼 차림의 학사풍 청년만이 두 눈에 담겼다.

“……!!”

노인은 청년을 보고 경악했다.

청년은 노인을 보고 긴장했다.

하늘 아래, 인간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경지가 있으니, 좁쌀만 한 사람의 인지력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무극(無極)이라 한다.

그 무극, 혼돈과도 같은 무한의 경지에 들어선 무인 중에서도 끊임없는 연마와 깨달음으로 더 넓은 우주(宇宙)에 도달한 자들이 존재한다.

세인들은 그들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성천(聖天)이라 불렀다.

성천이라는 이름에는 정사마의 구분조차도 없다. 그 영역에 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지파에 상관없이 존경받아 마땅한 초월자이기 때문이었다.

그중 검(劍)으로 득도(得道)의 길을 연 자를 검선(劍仙)이라 했고, 검(劍)이 지닌 본연의 이치를 한계까지 판 사람을 검제(劍帝)라 하였다.

검제 남궁승.

검에 한하여 모두가 인정하는 당대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개인의 명성을 보자면 검선 탁무자를 더 높게 쳐주지만, 검에 한해서는 남궁승이야말로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

온 천하가 존경해 마지않는 검제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만인의 칭송을 받는 검제의 눈에는, 자신의 명성보다는 새 시대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영역을 최초로 뚫은 신성(新星)이 더 대단해 보였다.

“너는…….”

노인, 남궁승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청년, 연호정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절도 있게 포권했다.

“강동 벽산연가의 연호정이 검제를 뵙습니다.”

이렇게 조우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인물이었다. 애초에 그가 무림맹으로 온다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

“벽산연가? 설마 그 연가를 말함이냐?”

“그렇습니다.”

“……!”

남궁승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이놈이……?!’

장손이 말하였다. 강동 연씨 가문의 아들이 이룬 경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자신보다 훨씬 더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이가 있음에, 아직 모자람을 느껴 돌아왔다고 하였다.

하물며 차손은, 그 자신이 말하진 않았으나 들리는 얘기로 연씨 가문의 장남에게 지독한 질투를 느꼈다고 하였다. 그 질투로 인해 몸과 정신이 망가져 버렸다던가.

‘이런…….’

남궁승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연호정도 연호정이지만, 두 손자와 아들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들이 제정신이란 말인가?!’

재능의 한계를 느낀다고? 질투를 느껴?

투쟁심을 발휘하려 해도, 질투를 느끼려 해도 수준이 엇비슷해야 가능하다.

남궁승이 보는 연호정은 이미 나이를 따지고 자실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 중원 정점의 영역에 도달한 진짜배기 강자인 것이다.

이제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기 시작한 새끼 매들이 창공을 노니는 신룡(神龍)을 보고 질투하는 꼴이라니? 이건 아예 수준도, 재능도, 타고난 종(種)까지도 다르다.

그리고 이런 괴물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손주들을 채찍질한 아들놈의 안목은 얼마나 부족한 것이던가.

남궁승은 탄식했다.

“……검을 좇아 그림자 속을 어슬렁거리고만 있었더니, 그새 세상에선 무림의 핵(核)이 움직이고 있었구나!”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사태에 놀라서 웅성거리던 무사들은 이내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검사는 검으로, 권사는 주먹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법.”

스르륵.

물 흐르듯 뽑혀 나온 검이 연호정을 겨누었다.

“너를 알고 싶다. 증명할 수단을 가져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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