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49화 (849/963)

849화. 태풍의 핵 (6)

‘……!’

남궁승이 검을 뽑은 순간.

그렇지 않아도 고요했던 연무장 일대에 더욱더 무거운 적막이 깔렸다.

불어오는 바람 소리도, 사람들끼리 부딪치며 나는 옷깃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적막 가득한 연무장에서, 하나의 섬뜩한 소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철검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검명(劍鳴)이었다. 신검일체(身劍一體), 나아가 심검일체(心劍一體)의 영역에 들어서 외물인 검에 혼을 실은 자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지고의 깨달음이었다.

드높은 깨달음이지만, 무극에 이른 자만이 검명에 이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연지평만 해도 놀라운 깨달음으로 검에 혼을 싣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수준이 달랐다.

무한의 경지에 진입한 절대고수의 검명은, 그 어떤 소리보다도 고요하고 서늘하며 위압감이 넘쳤다.

우우우우우웅!!

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는 일정한 소리.

그러나 그 검명을 들은 무인들은 점점 커지는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어 오장육부까지 뒤흔들어 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였다.

위이이이잉!!

연호정이 쥔 흑색의 대부, 광룡부에서도 사나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역시도 검명을 피워 내고 있었다. 아니, 들고 있는 병기가 도끼이니 부명(斧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궁승의 검명이 차갑고 고고하다면, 연호정의 부명은 거칠고 사나웠다.

남궁승의 기세가 한겨울 협곡에 불어닥치는 눈 폭풍과 같다면, 연호정의 기세는 불길의 강을 헤엄치는 삼두육비의 괴수와도 같았다.

우우웅! 위이이잉!

점점 커지는 진동.

그리고 어느 순간.

“…….”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영혼의 진동이 동시에 멎었다.

남궁승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제법이구먼.”

“그렇습니까.”

“혹시나 했네. 이 정도로 빈틈을 보일 리는 없겠지만, 자네의 나이가 주는 불안감에서 나 역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아.”

이전과 말투가 달라졌다. 명백한 하대로 점철되었던 말투에 고풍스러운 기색이 깃들었다.

연호정의 실력을, 그 실체를 완전히 인정한 것이다.

“이토록 사람이 많으니 자칫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잘 제어해야겠군.”

“그렇습니다.”

“선수 양보 따위는 하지 않겠네.”

연호정의 눈에 은은한 긴장이 어렸다.

“그 말씀, 저에 대한 찬사로 듣겠습니다.”

“가네.”

우웅.

작은 떨림이 이는 순간이었다.

‘……!’

뭔가 흐릿해진다 싶은 순간에 이미 남궁승은 연호정의 전면 삼 장 앞에 도달해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빠르…….’

피슉!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공격이 들어왔다. 잘 관리된 거무튀튀한 철검이 단숨에 어깨 어림을 베고 지나갔다.

옷깃만 베었지만, 정신을 번쩍 들게 할 만한 검격이었다. 사전 동작은커녕 살기나 투기조차 읽지 못했다.

연호정의 광룡부가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쩌어어어어어어엉!!

남궁승이 십여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의 노안에 놀라움이 어렸다.

“무식한 힘이로고.”

경지가 더 높아도 힘에서만큼은 연호정을 상대하기 어렵다. 기공을 담은 발경이라면 모를까, 병기와 병기를 부딪쳐 상대하는 능력만큼은 천하의 남궁승조차 연호정보다 아래였다.

“굳이 피하지 않으신 거 압니다.”

담담하게 말하지만, 광룡부를 쥔 연호정의 손끝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쥐고 휘두른 일격이었다.

남궁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명, 그리고 한 수의 교환. 이걸로 충분하네.”

“그렇습니까.”

“자, 이제부터 슬슬 즐겨 볼…….”

화아아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득달같이 달려든 연호정.

속도만 보면 남궁승과 차이가 없다. 다만 남궁승의 기척을 읽지 못했던 연호정과 달리, 남궁승은 연호정의 움직임을 분명하게 읽어 냈다.

‘좋아.’

남궁승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한 번 휘두른 것 같은데, 어느새 손목을 중심으로 피어나는 검화(劍花)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수십 개의 검날이 아름다운 형상을 그려 내며 연호정의 접근을 차단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남궁인이 탄성을 질렀다.

“천화검(天花劍)!!”

천풍(天風), 천뢰(天雷)와 함께 삼천심검(三天心劍)으로 묶이는 남궁세가의 절학 천화검법이었다.

환검(幻劍)의 극치였다. 아름다움에 홀려 손을 뻗었다간 온몸이 갈가리 찢겨 죽을 것이다.

연호정의 발이 힘차게 대지를 박찼다.

쿠웅!!

남궁승의 눈이 커졌다.

‘진각?’

그토록 빠르게 접근했으면서, 관성을 무시하고 몸을 정지시킨 후 검화의 영역권 코앞에서 진각을 구사한다.

휘이이이이잉!!

발밑에서 피어오르는 새하얀 돌풍이 연호정의 온몸을 감싸고 지나갔다.

티티티티티팅!!

불어나는 바람의 방패, 검화의 예기를 모조리 튕겨 내며 기지개를 켜는 야수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연호정의 양손이 광룡부를 쥐었다.

파아아아악!

사선으로 올려 친 거대 도끼의 참격.

그 일참(一斬)의 공격으로, 분화되었던 환검이 완전히 스러져 버렸다.

일검(一劍)으로 만변(萬變)을 제압하는 무제만변(無制萬變)의 묘리에, 뒤늦은 한 수로 빠르게 도달한 공격을 무마하는 후발선제(後發先制)의 묘용까지 담아냈다.

단순해 보이는 도끼질이지만, 무림 최고급 무리를 중첩해서 심어 놓은 심오함 가득한 일격이었다. 그 심오함을 든든하게 받쳐 줄 막강한 내공까지 있으니, 천하의 남궁승도 감히 전진할 수가 없었다.

‘대단하구나!’

입을 열어 그리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외침은 상대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천풍보(天風步)로 물러난 남궁승의 두 발이 일순 갈지자를 그렸다.

번쩍!

전면으로 향하던 남궁승이 갑작스레 좌측 상단 허공에서 나타났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벼락같은 움직임이었다. 그 연호정조차도 남궁승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

기척이 읽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는데도 잡지 못한 것이다.

남궁승이 강한 일검(一劍)을 내리쳤다.

쩌어어어어엉!

광룡부의 창대에 검이 막혔다.

그러나 검에 담긴 충격은 연호정이 고스란히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막강한 강검(强劍)이었는지, 연호정의 오른발이 연무장 바닥을 파고들 정도였다.

쿵!

광룡부의 도끼날이 땅에 처박혔다.

땅에 발을 디딘 남궁승이 곧장 연호정에게 검을 뻗으려 할 때였다.

‘……?!’

살벌한 위압감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왼손으로만 쥐고 있는 광룡부, 연호정의 몸을 사선으로 가린 창대 밑으로 매서운 힘을 담은 장(掌)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연가의 비기 반룡장(反龍掌)이었다.

콰앙!

남궁승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녀석.’

빈틈은 명확했다. 남궁승은 빈틈을 노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슴없이 검을 뻗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빈틈이 드러난 게 아니야. 스스로 빈틈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공격을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유도한 공격을 되받아칠 무공까지도 준비한 상태였다.

남궁승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녀석이 있다니.’

고작 몇 합을 교환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빈틈을 대놓고 보여 줬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 올지를 먼저 꿰뚫어 봤다는 뜻이다.

꿰뚫지 않고 베었다면 일부러 만든 빈틈은 아무 소용이 없었을 터. 연호정은 남궁승이 베지 않고 찌르리라는 걸 확신한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우우웅!!

밀려 나간 남궁승을 향해 회전하며 도끼를 휘두른다.

반원을 그리며 휘둘러진 광룡부의 영역권은 엄청나게 넓었다. 평범한 삼척장검을 지닌 남궁승과 달리 연호정이 쥔 광룡부는 길이만 여섯 자에 달하는 장병이었다.

쩌저저정!

신속한 교검(巧劍)으로 도끼의 투로를 바꿔 냈다.

고수에게 있어 병기의 길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거리상의 완급 조절에 통달하였고, 심지어 병기로 발경술을 구사해 멀리 떨어진 상대를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남궁승은 연호정이 휘두르는 병기의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몸통 전체를 노려 오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연호정의 두 발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후욱.”

백호군림보다. 백호기가 전력으로 달아오르며 그의 두 다리를 한계까지 활성화시켰다.

멀찍이 떨어져 연호정을 보던 남궁승의 얼굴에 결심의 기색이 어렸다.

“병장기술은 이쯤이면 되었겠지.”

우르르릉!!

남궁승의 몸에서 우레와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심상치 않은 소리. 마치 모용군의 뇌정공이 일으키는 뇌기(雷氣)와 흡사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장중하고, 훨씬 더 고풍스럽게 들린다. 마치 하늘 그 자체를 담은 듯 푸른 아지랑이를 피워 내는 남궁승의 외양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희미했다.

‘드디어 나오는가.’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신공절학.

극에 이른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이 개방되었다.

화아아아아아!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압도적인 기파에 수천 명의 인파가 너나 할 것 없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남궁승의 기세에 압도당한 것이다.

남궁승이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연호정의 얼굴에 긴장이 차올랐다.

‘진짜로 온다!’

그때였다.

‘……?!’

남궁승을 노려보던 연호정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위기감을 느꼈다.

‘검!!’

턱 밑에서 올라오는 섬뜩한 살기.

연호정이 벼락처럼 상체를 뒤로 뉘었다.

번쩍!

턱이 있던 자리를 베고 지나간 남궁승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빤히 보고 있었는데도 언제 자신의 하단까지 접근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빠르기도 빠르지만, 도통 기척을 잡을 수가 없다. 처음 접근할 때도 그렇고, 창궁대연신공을 개방한 지금도 움직임을 놓쳤다.

연호정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순간들이었다.

양천과 싸웠을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 그 빠른 비왕과 부딪쳤을 때도, 속도로 압도당했지만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 남궁승은 달랐다. 특별히 빠른 것도 아닌데, 벌써 두 번이나 기척을 놓쳐 버린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재빨리 자세를 잡은 연호정.

그의 위, 허공에 떠오른 남궁승은 어느새 기묘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왼손은 연호정을 가리켰고, 오른손에 든 검은 하늘을 가리켰다. 복부까지 끌어 올린 두 다리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역동적인 자세를 이루었으며, 두 눈 가득 실린 푸른 광채는 연호정의 무공이 지닌 허점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후우우우우우웅!!

검으로 모여드는, 잡티 하나 없는 하늘색 진기.

연호정의 동공이 녹청빛 신비로운 색으로 물들었다.

번쩍! 콰콰쾅!

휘두르는 철검에 다섯 줄기의 검기가 일어 폭발을 일으켰다.

가문 직계 혈육만 익힐 수 있다는 남궁가 최고의 검법,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이었다. 지난날 남궁세가를 천하제일검가로 만들어 준 중원 정점의 검법이었다.

파라라라라락!

수천 명을 세워 둬도 넉넉할 거대한 연무장 전체로 흙먼지가 비산했다. 막강한 위력, 절제 없는 검도였다.

보는 이들의 입이 하나같이 떡 벌어질 때였다.

‘……?!’

남궁승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라움이 어렸다.

‘뭐지?’

창궁무애검 오룡비관(五龍飛貫)의 위력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렇게 폭발을 일으키는 초식이 아니었다.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파고들었다면 모를까, 부딪혀 깨지도록 의도한 적은 없었다.

그때였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아름다운 녹청빛 비늘을 지닌 거대한 용의 환상이 일었다.

‘이런!’

번쩍!

먼지를 뚫고 올라온 연호정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남궁승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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