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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853화 (853/963)

853화. 무림맹주란? (3)

꾸르르.

어디선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추운 날씨인데도 활기가 느껴지는 목청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단조로우면서도 신비로운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차는 즐기는가.”

“아무거나 잘 마십니다.”

“취향은 따로 없는 모양이군.”

“원체 막입이라 가리는 게 없습니다.”

끓인 물을 살짝 식혀 찻잔에 따른다.

진한 연둣빛이던 찻물이 조금씩 옅어지며 투명한 색을 냈다.

“가리는 게 없어도 구분은 할 줄 알아야지.”

“술은 제법 구분할 줄 압니다.”

“혼자 떨어져 살 게 아니면 교양은 필수라네. 어떤 군자연한 이들은 이따위 것에 목숨까지 걸 정도로 예민하게 굴어 피곤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그렇습니까.”

“아는 것은 중요하네. 아는 것도 드러내지 않는 겸양이 어려운 거라네.”

“제가 그게 잘 안 돼서 쓸데없는 걸 알려고 들지 않습니다.”

“말은 좋군. 드시게.”

연호정이 찻잔을 입에 댔다.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남궁승의 실력이 좋다는 것은 알겠다. 미묘한 온도 차이만으로 풍부한 향을 살리는 실력, 차에 관심이 없으면 이렇게까지 그윽한 다향을 끌어내진 못할 것이다.

“의외입니다.”

“무엇이?”

“검(劍) 이외에는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한 모금 차로 목을 축인 남궁승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문밖에 남궁표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 특유의 묵직하고도 예리한 기세, 그러나 마음이 복잡한지 기가 조금 튀고 있었다.

남궁승의 눈이 깊어졌다.

“명문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처음 검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그 이외의 것에 관심이 없었네.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으니 자연스레 후계가 되었지만, 심지어 가주직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네. 내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어.”

“…….”

“하지만 사람이 어찌 독야청청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가문의 무게를 등에 업은 채로 태어났으니, 내 손에 검을 쥐여 준 가문을 위해 나 역시 포기할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저 같은 놈보다 훨씬 어른스러우십니다.”

“자네와 비교할 건 아니지. 누가 더 낫냐를 떠나서 우리는 서 있는 곳이 달라. 보는 세상도, 처한 환경도, 태어난 곳마저도 다르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정말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지. 진정 모든 걸 놓으려거든 내가 배운 것도 잊어야 하고 몸에 밴 습관까지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건 이미 내가 아니니 말일세.”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가문도, 핏줄도, 그간 배우고 익힌 공부는 물론 종국에는 나 자신마저도 잊는 것.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은 곧 도가에서 말하는 등선, 불가의 해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각자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삶이라네. 그저 그 최선이라는 영역을 어느 정도까지 확대할 수 있는가의 문제겠지.”

“그렇겠지요.”

별것 아닐 수 있는 대화였지만, 왠지 머리에 남는 말이었다.

오히려 지금의 연호정에게는 도끼 한 번, 주먹 한 번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배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삶이 곧 무도(武道)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말이다.

“해서, 제게 따로 볼일이 있으십니까?”

남궁승이 피식 웃었다.

“성질도 급하군.”

“자리를 오래 이어 가실 거면 씹을 거리라도 좀 내어 주십시오. 보통 배가 고픈 게 아닙니다.”

연호정에게 있어서 남궁승은 제법 독특한 사람이었다. 지금껏 봐 왔던 사람들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부분도 많았다.

반대로, 남궁승에게 있어서 연호정은 한없이 독특한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성천에 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무림의 대선배 앞에서 이리 솔직한 성격을 보여 주는 사람은 절대 흔치 않다.

한 번 겨루어 봤기 때문일까?

남궁승은 연호정의 이러한 모습을 오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편하다는 것인가.’

무인은 무공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대다수는 무인으로서의 가치 증명으로 생각하지만 남궁승은 달랐다.

무공을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이들은 자신이 구사하는 무공에 인생을 담는다. 그래서 몇 합만 겨뤄 보아도 상대의 성품을 엿볼 수 있고, 나아가 지나온 인생을 유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남궁승이 봤을 때, 연호정은 오만과 거리가 멀었다. 언행은 오만하게 보일지언정 그 자신은 그저 솔직하고 과감할 뿐이었다.

성격이 맞지 않는 이들은 친해지기 어렵겠지만, 받아 줄 만한 이해가 있다면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는 인재.

남궁승이 웃으며 말했다.

“밖에 있느냐? 요리 몇 가지 내오거라.”

잠시 후.

소박하게 담긴 요리 네 개가 나왔다. 가짓수는 많지만 접시 자체가 무척 작았다.

“소식하시는 모양입니다?”

“일평생 배부르게 먹어 본 적이 없네. 점심때가 지났으니 자네도 배만 채우게. 곧 저녁이야.”

“그래도 술이 있으니 다행이군요.”

젓가락을 놀리는 연호정을 지긋이 보던 남궁승이 피식 웃었다.

“맛은 어떤가?”

“담백하니 좋습니다. 만날 자극적인 것만 먹어 온 터라 신선하군요.”

“먹을 줄 아는군.”

남궁승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는 차 한 잔이면 족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 자셨는가?”

“허기는 가셨습니다.”

“허기가 가셨다면 이제 슬슬 미망에서 빠져나올 때가 되었군.”

뜬금없는 말이었다.

깨끗한 천으로 입을 닦은 연호정이 가만히 남궁승을 바라보았다.

남궁승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나나? 사람은 독야청청할 수 없다는 말.”

“기억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인간은 결코 손에 거머쥘 수 없네. 자유라는 것을 이해한 순간 그 자유가 사람을 억압하기 때문이야.”

자유의 뜻을 생각하면 이처럼 모순적인 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자유들은 노력 여하에 따라 거머쥘 수 있다네.”

“작은 자유.”

“자네는 허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궁의 전대 가주에게 당당하게 음식을 요구했지. 나는 그 요청을 들어주었고, 결과적으로 자네는 배고픔에서 벗어났네.”

“……?”

“나를 해하려는 적이 나타났네. 나는 기어이 그를 죽여 나의 생명을 지켰지. 생명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이를 없애 버림으로써, 나는 또 한 번의 자유를 손에 넣었네.”

“……!”

“작고, 작고, 또 작은 자유들이 모여 나를 이루었다네. 자네도 마찬가지겠지.”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연호정을 보는 남궁승.

그의 눈은 무심(無心)했다. 마치 완전한 자유를 손에 넣어 무엇도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처럼.

“그에 비하면, 자신의 장점이자 특질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무공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손에 넣는 과정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두근!

“그것이 어렵고 고될 거라 생각하는 것 역시 나의 선입견이 아닐까? 포기가 아닌, 그저 내려놓는다고 생각하면 어려울지언정 불가능한 건 아닐 텐데.”

두근두근!

“나는 만검(萬劍)의 요체를 알았지만, 창궁무애검의 근간인 무겁고 장중한 검도(劍道)마저 바꾸지는 않았네. 바꿀 수 없어서? 아니지. 바꿀 필요가 없었네. 그 검도 위에 수많은 요체를 얹는 것만으로도 무애검의 극의(極意)에 도달했으니까.”

무심했던 남궁승의 눈이 점점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 이상으로 가고자 하여 제왕검형(帝王劍形)을 만들었네.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나만의 특기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니 마침내 너무나 나다운 무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네.”

“……!”

“자네는 왜 그러지 못하는가?”

“저는…….”

“사색(四色)의 기운 하나하나의 특성이 뚜렷하다 한들 그게 전부는 아니라네. 공방과 회피, 반격 모든 것을 상정하고 있다지만 무(武)라는 것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야.”

우우우우웅!!

“모든 전투술을 상정한 무공이 정녕 자네가 보는 무도(武道)의 끝인가?”

“……!!”

“무공이라는 게 단순히 팔다리를 놀리는 전투술(戰鬪術)에만 국한된 것이던가? 그 이상은 없는가?”

연호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느닷없이 무론(武論)을 입에 담는 남궁승. 왜 이런 말을 할까, 라는 의문은 그가 줄지어 뱉어 내는 말들로 인해 점차 사라져 버렸다.

“자네의 전투술은 완벽했네. 더하고 뺄 것도 없었어. 공격은 강했고, 방어는 튼튼했네. 회피와 반격은 유연했고, 살법은 불처럼 매서웠지. 아마 천하의 그 누구도 자네처럼 완벽한 전투술을 구사하긴 힘들 것이네.”

“…….”

“하지만 그 이상의 강자가 자네를 누른다면,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

“이미 완벽에 도달한 전투술로 해결을 볼 생각인가? 그 완벽조차도 짓누를 만한 힘을 가진 상대 앞에서?”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완벽이라는 영역도 결국 나 자신이 그린 무도 안에 있는 법이라네. 완벽을 깨부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지, 완벽을 내려놓고 또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지 고민하는 건 온전히 자네의 몫이야.”

“……완벽.”

“내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고는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번쩍!

남궁승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어찌 제삼자보다도 자기 자신을 모른단 말인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일갈에 연호정은 순간 움찔했다.

“스스로에 대한 충분한 관조가 없었다면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치도 못했을 터! 한데도 자신의 무도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니, 이처럼 우습고도 한심한 경우가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그게 대체 무슨……?”

“무공이란 본디 하나이다! 하나가 둘로, 넷으로, 여덟으로 나뉜다 한들 종국에는 다시 하나로 돌아오는 법! 그것은 천하 어떤 무공도 벗어날 수 없는 진리(眞理)이다!”

“……?!”

“만검의 요결을 깨달은 내가 어찌 창궁무애검을 뜯어고치지 않았을까? 왜 굳이 새로운 검을 만드는 수고를 무릅썼을까?”

“……!!”

“창궁무애는 그 자체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했다! 그러나, 자네에게는 정녕 그 네 가지 무공이 완벽한 것인가? 네 가지 무공이 되돌아갈 근본은 정녕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남궁승의 표정이 엄해졌다.

“눈을 떠라! 살업에 젖어 사람 죽일 궁리만 하지 말고, 자네를 이렇게 성장시켜 준 근간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아라!”

“……근간.”

“근간이야말로 진리이고 마땅히 도달해야 할 종착지인바! 아직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 네 가지 기운이 되돌아갈 곳을 열심히 찾고 있는데,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

“정녕 그 무공의 극의(極意)에 도달했다고 자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번쩍!

연호정은 순간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

그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광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일품이던 무곡각의 별실이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는 메마른 땅으로 변했다.

들풀조차 나지 않는 땅, 어두운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우중충했다.

그리고 그 황량하고도 어두운 땅 위에 연호정 혼자 서 있었다.

후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땅을 덮은 흙모래를 멋대로 희롱하기 시작했다.

‘토(土)…….’

생명의 근간.

이 거대한 대지에서 발원하여 훗날 천하제일의 이름을 부여받은, 그러나 아직도 발전하지 못하여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태고의 무(武).

들썩!

땅이 흔들렸다.

땅속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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