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8화. 무림맹주란? (8)
“……!”
천효락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이 기운은?”
화향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얼어붙은 얼굴, 어느새 그녀의 발은 방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향아.”
“…….”
“화향!”
놀라서 움찔한 화향이 천효락을 돌아보았다.
“주, 주인님?”
“나가지 말거라.”
“하지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귀빈으로 왔다. 경거망동하지 말아야지.”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천효락은 저도 모르게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한 화향의 행동을 이해했다.
‘나조차도 넋을 잃을 뻔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도대체 이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가?!’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기운이었다. 마치 황금빛으로 가득한 기분 좋은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놀라우리만치 부드럽고도 강한 의지를 지닌 바람.
그리고 그 바람에 실린 기묘한 힘은 멀쩡한 사람의 정신마저 뒤흔들 정도로 대단했다.
‘이렇게까지 강한 의지를 지닌…… 아마 대다수의 무인들은 느끼지도 못했겠지.’
무종의 벽을 넘어 상단전을 일깨운 자들이나,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발달한 사람 정도가 아니면 이 바람에 섞인 힘의 실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엄청난 고수가 온 것 같습니다.”
떠듬떠듬 말하는 화향의 목소리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런 모양이다.”
천효락의 눈이 깊어졌다.
“이 정도 무공이라면…… 대사형을 한참 뛰어넘는 건 당연하고.”
사부님에 도달했는지는 모른다. 애초에 그는 사부님의 진짜 실력을 본 적이 없었다. 한계가 어디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스승의 경지는 깊었다.
다만,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검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호정 소부주보다 강한 건 확실하다.”
“……!”
“성천의 고수가 온 모양이다. 하지만 이 기질, 누구인지 추측기가 어렵구나.”
이렇게나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의지가 섞인 기파를 발산해 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보통 고수들의 심중에 파랑이 일었을 때, 의지와 하나가 된 기가 반응하여 이러한 기파를 발산하곤 한다.
‘그러나, 이 바람의 냄새는…….’
뭔가 놀라거나 크게 심동을 겪은 사람의 기파가 아니다.
기(氣)의 깊이는 무시무시하지만, 분위기는 무척이나 편안하다. 그러면서도 왠지 한 번쯤은 만나고 싶은, 친근하면서도 장엄한 기운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천효락이 탄식을 토해 냈다.
“천하제일 무림맹이라…… 어마어마한 고수들이 속속들이 집결하는 걸 보면 과연 중원을 대표한다는 명성이 헛것은 아니었구나.”
* * *
한바탕 소동이 일었지만, 그 기묘한 기세를 뿜은 자의 정체를 확인한 사람들은 다시 본인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몹시 놀라고 감탄하면서.
물론 연호정을 만나려는 이들도 있었으나 막원이 그것을 막았다.
“무극에 오른 자가 이토록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정리할 시간이 누구보다 많이 필요하오. 지금은 건드릴 때가 아닌 듯하니 이만 돌아갑시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소.”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깨달음은 무극의 고수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힘이 상단전까지 침범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체화하지 못하면 새로운 기가 불안정해지면서 기존의 깨달음을 인식한 기억이 스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검제 남궁승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연호정에게 해를 가할 만한 그릇은 아니니, 그들은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꾸르르르.
새소리가 아름다웠다.
별실에서 나오는 연호정을 보며, 남궁승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바뀌었다.’
기(氣)가 바뀌었다.
각자의 특성이 명확했던 네 가지 기운의 기척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검제의 첨예한 감각으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면, 말 그대로 사라졌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사색의 진기가 있던 자리를 채운 것은…….
‘모르겠구나.’
한 줄기 깨달음이 폭발하는 순간, 별실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남궁승은 그토록 장엄하고도 편안한 느낌의 기운은 처음 접해 보았다. 분명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막강했지만, 이상하게 사람을 위축시키거나 긴장케 하는 기운은 아니었다.
마치 친근하면서도 엄한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기운.
동시에 무엇이라도 내주는 인자한 어머니와 비슷한.
‘하나는 확실하구나.’
연호정은 강해졌다.
저 무서운 깨달음이, 그의 무력을 떨어트리지 않고 상승시켰다.
그것도 큰 폭으로.
남궁승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大功)을 축하하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노선배님 덕분입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남궁승의 표정이 묘해졌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연호정의 자세나 목소리가 함께 차를 마셨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물론 그때도 연호정은 솔직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진짜 모습일까, 라고 생각하면 또 그렇지는 않았다.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
더 차분해지고, 더 단단해졌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모습이라고 자연스레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남궁승이 물었다.
“깨달음을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지요. 다만, 하루면 충분할 듯싶습니다.”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부드럽고 편안한 무리(武理)를 손에 넣은 듯하구먼.”
“그렇지 않습니다.”
“음?”
“이전의 제 무공과 지금의 무공은 같습니다. 다만 근원(根源)으로 향했느냐, 그러지 못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런가.”
“깨달음이지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더 깊어졌을 뿐입니다.”
남궁승이 미소를 지었다.
“어떻던가? 그 근원은.”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흩어지는 구름 조각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토록 따스한 것인 줄 몰랐습니다.”
두근.
심장이 강하게 맥동했다.
본디 광명신단이 자리하고 있던 그곳에, 거대한 황금빛 동체를 지닌 용 한 마리가 눈을 감고 똬리를 틀었다.
광명신단도, 사신기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기운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사라졌지만, 동시에 영원했다.
연호정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똬리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던 거대한 무언가가 살짝 눈을 떴다.
두근!
기묘했다.
사신기처럼, 이 황금빛 신수도 제 몸에 기생을 하는 듯했다. 영성(靈性)을 지닌 기운이란 것이다.
하지만 사신기들과 달리 훨씬 더 구체적으로 선명한 의지를 지녔다. 진짜 영물이 몸 안에 들어가 있는 듯, 자신을 들여다보는 천하제일신수(天下第一神獸)의 눈빛이 신(神)의 그것처럼 자애롭고 엄격했다.
가슴에서 손을 뗀 연호정이 의념을 풀었다. 그러자 신수도 다시 눈을 감았다.
‘드디어.’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신수 때문이 아니었다. 비로소 이 경지에 다다랐다는 사실이, 이 무공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뿌듯함과 쾌감을 선사해 주었다.
‘황룡신왕공(黃龍神王功).’
사신무의 극의.
스승의 말을 빌리면, 황룡을 깨운 이는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 제일을 넘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제 와 연호정은 그 말을 실감했다. 동시에 자신과 스승의 차이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스승님과 나는 달라.’
스승은 황룡을 깨우기 전, 이미 무(武)의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깨달음을 손에 넣은 분이었다.
그런 사람이 황룡을 깨웠고, 나아가 꾸준한 수련으로 더 깊고 드높은 깨달음까지 손에 넣었다. 말하자면 황룡을 일깨우기 전에도 이미 스승님은 고금에서 제일을 논하는 강자였단 뜻이다.
자신은 달랐다.
흑암제 시절의 자신은 황룡을 깨우지 못했음에도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력을 손에 넣었다. 철저하게 전투에 치중된 무공이었지만, 그래서 쓸데없는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도달하지 못한 것이야.’
황룡은 근원이자 깨달음이다.
더 강한 힘, 더 빠른 속도, 더 단단한 몸을 추구했던 흑암제의 무(武)로는, 전투 능력의 상승을 맛볼 수는 있을지언정 황룡에 이를 수는 없었다.
강해지는 길은 많다. 그러나 그 길에 황룡은 없었다.
지금의 연호정은 달랐다.
사신무를 받쳐 줄 진기, 근본적인 심법부터 다르게 익힌 그였다.
홍천기를 익혀 흑암제의 깨달음을 고스란히 녹여 냈다면, 다시 무공을 연성한 지 이삼 년 안에 과거의 무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몸뚱이가 이전 같지 않더라도 영혼에 아로새겨진 깨달음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즉, 광명신단으로 이어지는 연가신단의 형성은 철저히 황룡을 목표로 쌓은 기반이었다는 것.
워낙 신묘한 기운인지라 사신무까지 잘 받쳐 주었지만, 신단 형성의 진짜 목표가 황룡인 이상 그의 무력이 수년에 걸쳐 느리게 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또한 그렇기에 과거보다 몇 수 처지는 경지로도 황룡에 들 수 있었다.
다만, 남궁승의 호통 가득한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언제 황룡을 깨웠을지 모를 일이다.
‘묘하군.’
연호정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기분이 묘해.’
짜릿하고 기뻤지만, 또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세상을 손에 넣은 듯 기쁨에 몸부림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기쁜 건 사실이지만,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아직 황룡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도 강렬한 탐구심이나 기대감 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 떠오르는 동녘을 보며 차를 한 잔 마시는 듯한, 그런 평화로운 기분만 들었다.
“그리 예민한 상태가 아니라면, 굳이 남궁의 별실을 빌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구만.”
“물론입니다.”
“지내 보니 이곳도 무척 편안하더군. 그러나 자네에게 있어 가장 편한 곳은 못 될 테지.”
남궁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깨달음을 수습할 수 있는 곳으로 가시게.”
“예.”
“그리고 깨달음이 다 수습되면, 이 늙은이와 또 한판 재미있게 놀아 보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성장한 저의 무(武)가, 노선배님께도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담 가질 필요 없네. 자네만 한 실력자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일생의 호승심 중 삼 할을 태웠으니, 남은 칠 할까지 날려 보고자 하네.”
“부르신다면 언제든 도끼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군.”
남궁승이 남궁표를 바라보았다.
남궁표는 멍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고 있었다. 연호정이 발산한 그 황금빛 기운에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남궁승이 한숨을 쉬었다.
“자네에게 큰 폐가 안 된다면 나중에 우리 애들 좀 부탁하네.”
정확히 무엇을 부탁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연호정은 남궁승의 답답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사해가 동도라고 제게 깨달음을 안겨 주셨으니, 저라고 그 은혜를 남에게 베풀지 않을 수 없지요.”
“그리 생각해 준다면 고마울 따름이네.”
“다만 성격이나 천품을 고칠 능력은 없습니다. 그 부분은 감안해 주시길 바랍니다.”
“고수의 칼에 맞아 죽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무림인에게 크나큰 복이겠지. 걱정하지 말게.”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뵙겠습니다.”
“언제든 찾아오게. 당분간은 바쁠 것 같지만.”
연호정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떻게 아십니까?”
남궁승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의 눈과 기세가 무(武)보다는 세상을 향해 있기에, 그저 한마디 던졌을 뿐이라네.”
“대단하십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검이나 잘 갈아 놓고 있겠네.”
“실망시켜 드리는 일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무곡각을 나섰다.
처음 무곡각에 들어섰을 때, 그는 남궁 검사들의 선망 어린 눈빛을 받았다.
그러나 무곡각을 나가는 지금.
남궁 검사들은 홀연히 대문을 열고 나가는 연호정의 존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