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59화 (859/963)

859화. 무림맹주란? (9)

파군각으로 온 연호정은 아버지와 동생을 만났다.

연지평은 선망의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고, 연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담담했다.

연호정은 두 사람에게 인사만 한 후 본래 자신이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무극에 들었든 그렇지 않든, 무인에게 있어 깨달음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시간은 중요하다.

연위와 연지평은 연호정을 일절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절대 파군각을 나서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호법을 서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연가를 향한 감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파견된 화룡단원들도 간접적으로나마 연호정의 호법을 서 주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중간에 묵비와 강량이 찾아왔다. 연위는 두 사람의 출입을 허했지만, 큰 목소리로 떠드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났다.

끼이익.

방에서 나온 연호정이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연 공자.”

“형님.”

묵비와 강량, 연지평이 반가운 듯 일어났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도 왔구나.”

묵비가 먼저 물었다.

“괜찮아요?”

“물론. 안 괜찮을 수 없지.”

평소 연호정의 말투 그대로였다. 강량이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대뜸 투덜거렸다.

“아, 진짜 세상 참 불공평하네. 도대체 전생에 무슨 공덕을 쌓았길래 아직도 발전이 상승 곡선입니까? 재능 없는 인간들은 서러워서 살겠나.”

내 전생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안다면 절대 그런 말은 못 할 거다.

연호정은 그저 웃어만 보였다.

평상에 앉아 차를 마시던 연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얼추 지금쯤 나올 듯하여 미리 차를 준비해 두었다. 목 좀 축이거라.”

“예.”

평상에 앉은 연호정, 그리고 연위.

두 부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아들이 큰 깨달음을 얻고 더 강해졌다 하면 기쁜 내색을 보일 만도 한데, 연위에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연호정 역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묵비와 강량, 연지평도 널따란 평상에 둘러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연호정이었다.

“보이셨습니까?”

뜬금없는 말이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였다. 그리고 느꼈지.”

“대단하십니다.”

“허허, 대단할 것도 많다. 그저 나의 깨달음이 남들과 조금 달랐던 것뿐이야.”

“그게 아닌데요.”

“음?”

연호정이 깊은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고요한 눈빛. 마치 선각자(先覺者)의 눈을 보는 듯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경지가 얼마나 지고(至高)한 것인지.”

묵비와 강량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연위가 대단한 강자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그는 성천의 고수 중에서도 일부만 깨달았다는 심검(心劍)까지 도달한 불세출의 검인(劍人)이었다.

그 정도라면 천하를 논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러나 이룬 경지만 본다고 하면 연호정이 연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한데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사신(四神)만 몸에 두르고 있을 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심검에 이르셨음을 알았고, 극단적으로 발단한 아버지의 상단전이 성천의 고수들 못지않음을 보고 감탄했지요.”

“그랬더냐.”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세상을 보시는 눈이 저희와 다르군요.”

연위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눈은 전부 다른 법이다.”

그런 뜻이 아님을 연위도 안다. 하지만 연위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전부 다 다르다는 것은 또한 이전의 나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능력이 높아졌다 한들 이전의 나와 다를 바 없으니, 손에 검을 쥐든 막대기를 쥐든 큰 의미는 없다.

연호정은 연호정, 연위는 연위.

황룡은 황룡이고 심검은 심검이다.

“제가 만났던 놀라운 사람들 중 가장 비범한 이는 단연코 검선(劍仙) 탁무자였습니다.”

“그래.”

“아버지의 상단전, 결이 다를 뿐 탁무자에 비견할 만합니다.”

“영광이로구나.”

“방대함으로 보자면 탁무자가 위일 수 있으나, 깊이감은 오히려 아버지가 더 뛰어납니다. 이제 그것을 알았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한 수 차이가 크다고는 하나, 직접 싸워 보지 않고서는 결과를 알 수 없는 무인들의 비무처럼 상단전의 크기나 깊이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

“무엇을 보는가, 무엇에 집중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가 중요하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정신이 탁무자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연위가 물었다.

“무공은 그 정도 돌아보았으면 충분한 것이냐?”

“달리 일이 없었다면 더 돌아보았겠지요. 다만, 그리한다 한들 빠른 성취가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그저 흐르는 대로, 나아가는 대로 밟아 가려 합니다.”

“그러하냐.”

“예. 제 무(武)가 어디로 가진 않으니까요.”

연위의 얼굴에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

아들의 변화를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은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색지 않은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다만 멋쩍어하지 않고 솔직 담백하게 스스로를 인정하는 아들의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그것만큼은 애써 억누를 필요가 없는 듯했다.

“할 일이 있어 보인다. 네 눈이 무(武)가 아닌 다른 것을 향해 있어.”

“검제 노선배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비범한 분이다. 상단전이고 뭐고를 떠나, 한 분야에 있어 끝을 본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지.”

“아버지도 곧 검제 노선배와 비슷한 지점으로 가실 듯합니다.”

“허허, 그건 모르는 일이다.”

연호정이 차를 마셨다.

그리 고급스럽지 않은 차였지만,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였다.

“할 일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오늘은 꼭 함께 저녁을 드시지요.”

“좋지.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모여 술이나 한잔하자.”

연위가 묵비와 강량을 보며 말했다.

“백병신군 선배와 진양이라는 무사도 데리고 오너라. 호정이 아끼는 사람이라면, 그들 역시 우리 가족이 아니겠느냐.”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네, 아버님.”

“호정은 따로 할 일이 있는 모양이니, 그동안 너희 무공을 좀 보자. 언뜻 보아도 보통 성장한 것이 아니구나.”

“네!”

연호정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지평이 말했다.

“형님.”

“저녁 먹기 전에 꼭 네 무공을 보자. 자꾸 일이 터져서 둘만의 시간을 갖기가 힘들구나.”

“좋지요. 저도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하하.”

연호정이 연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거라.”

“제가 누굴 만나러 가는지 알고 계십니까?”

“너는 잡스러운 것들을 제쳐 두고 근본을 보고 있다. 당금 무림맹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 하나뿐이지.”

“…….”

“그리고 지금 당장 위(位)에 어울리는 사람은 얼마 없지 않으냐.”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녀오너라.”

“예.”

그렇게 연호정이 파군각을 나섰다.

연호정이 나가고, 연위가 평상을 옆으로 밀어 두었다.

“비아부터 볼까?”

* * *

연호정은 곧장 무성전으로 향하다가 이내 발을 멈추었다.

“…….”

크게 숨을 들이쉬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다시 방향을 꺾었다. 군사부 쪽이었다.

이번 역시 그를 곁눈질하는 사람이 많았다. 소부주로서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비슷한 시선들이었다.

하지만 진짜 고수들의 눈은 달랐다.

연호정을 보며 크게 놀라는 이들. 그 기묘하고도 거역하기 힘든 기운을 발산한 이가 연호정이라는 걸 아는 그들은, 그에게 말이라도 한번 걸고 싶었으나 차마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묵룡부의 소부주라는 위치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기감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의 몸에서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잔잔한 위엄을.

그리고 그건 연호정도 알고 있었다.

‘확실히 다듬기는 해야겠어.’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이대로 둬선 안 될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정말 시간을 들여서 무(武)를 다듬어야 할 듯했다.

‘막 형님께 부탁 좀 드려야겠다.’

막원은 백병을 넘어 만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발군의 강자였다. 말하자면, 지금의 연호정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속으로 다짐하며 걷던 연호정의 눈에 비로소 군사부의 건물이 보였다.

잠시 후.

“군사님.”

“호정 자네인가?”

“예.”

“어서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제갈문호와 공공대사, 그리고 승현진인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세 사람은 반가운 얼굴로, 그리고 놀란 얼굴로 연호정을 맞았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이렇게 따로 뵌 것은 오랜만이군요.”

“허허.”

공공대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승현진인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과거, 출정하기 전 자네에게 태극권(太極拳)을 가르쳤었지.”

“그때의 가르침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도 대단하긴 했지만, 어딘가 조금 어설프고 살기가 과하여 무당의 사람이 아닌데도 내심 걱정했었다네.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지. 한데 그랬던 인재가 천하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대 거인이 되어 돌아왔구먼.”

“과찬이십니다.”

승현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군사에게 달리 볼일이 있는 모양일세. 마음 같아서는 붙잡고 하릴없이 대화나 나누고 싶네만, 중요한 대화일 터이니 자리를 비켜 주도록 함세.”

“아닙니다. 두 봉공분께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어, 그랬던가?”

승현진인이 제갈문호를 바라보았다.

제갈문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앉게나. 차 한 잔 주겠네.”

“감사합니다.”

곧 연호정 앞에 찻잔이 놓였다.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자네에 관해 많은 얘기를 하고 싶네. 그러나 승현진인의 말처럼 일단은 예까지 찾아온 이유부터 말해 보는 게 좋을 듯하네.”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제갈문호를 보며 말했다.

“군사님.”

“말씀하시게.”

“무림맹주 건에 관해 골치가 아프실 것으로 압니다.”

느닷없이 무림맹주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공공대사와 승현진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골치가 아프지. 안 아플 수가 있겠는가.”

“적격자가 없어서 그러시는 건 아닌 듯합니다.”

“물론일세. 당장 무림맹만 둘러봐도 맹주가 될 만한 분들은 많아. 오히려 많아서 고민일세.”

“그게 아니겠지요.”

“음? 아니라니?”

“어떤 분을 맹주위에 올려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상당히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언사였다.

하지만 왜인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전의 연호정처럼 그는 굳이 이런 문제를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처럼 듣는 사람의 마음을 덜컹하게 만드는 힘은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 그의 말은 당연하게 들렸다. 누구라도 납득할 당연한 이치를 말하는 듯했다.

제갈문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조금 위험한 발언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러하다네.”

오히려 제갈문호의 대답에 공공대사와 승현진인은 깜짝 놀랐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맹주감들을 포기하고 차세대 무림의 기둥이 될 만한 강단 넘치는 인재를 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자네와는 대화가 빠르구먼. 맞네. 군사로서의 나는 그런 인재를 원하네.”

“묵룡부 소부주로서의 저 역시 군사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자네만은 그렇게 생각해 줄 줄 알았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을 눈앞에 둔 무림인 연호정으로서는, 그 생각에 반대합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번뜩였다.

“하면 자네는 누가 맹주가 되기를 바라나?”

“제가 바란다고 그 사람이 맹주가 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제가 바라는 주춧돌 같은 초대 맹주(初代盟主)는 많은 사람이 인정할 만한 분들입니다.”

연호정이 공공대사와 승현진인을 바라보았다.

“저는 두 분 중 한 분이 초대 맹주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

“그리고 이왕이면 공공대사님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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