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화. 개화(開花)하는 강자들 (2)
연지평의 무공을 봐준 뒤 아버지와 묵비, 강량과 진양, 막원과 술자리를 하는 연호정의 얼굴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깨달음을 얻었든 얻지 못했든.
강하든 약하든, 건강하든 병에 들었든.
내 가족, 내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자리만큼 행복한 자리가 또 없는 법이다. 그간 숨도 못 쉴 만큼 바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 행복의 농도가 짙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취하도록 술을 마신 연호정은, 놀랍게도 일행 중 제일 빨리 쓰러져 버렸다.
“이런 사람이 아닌데.”
당황한 묵비가 연호정을 들쳐 업으려 했다.
진양이 묵비를 제지하곤 제 어깨에 둘러멨다.
“마시고 계쇼. 침상에 던져두고 올 테니깐.”
막원이 헛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버렸구먼.”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녀석, 오랜만에 날이 새도록 마시며 얘기나 나누려 했더니만.”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호정은 지금껏 한 번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황궁에서 돌아온 후 잠깐 술자리를 했을 때도 만취해서 쓰러지긴 했지만, 그때는 벼랑 끝까지 몰렸다는 느낌이 강했지요.”
“저 녀석이 그랬습니까?”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군요. 진심으로 이 자리를 즐겼습니다. 열 말 술을 마셔도 안 취할 몸뚱이를 얻었음에도 누구보다 먼저 취해 실려 간 것은, 그만큼 호정이 몸과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뜻일 테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위가 멋쩍은 듯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존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막원은 성천십삼좌 중에서도 어린 축에 속했다. 아니, 실제로 가장 어렸다.
그래도 오십을 훌쩍 넘겨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연가의 가주인 연위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다.
중원 정점에 이른 무력의 소유자인 데다 나이도 본인보다 많으니, 연위로서는 막원의 태도가 불편할 만도 했다.
그러나 막원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호정과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의제의 아버지 되시는 분께 적당히 예를 취할 만큼 경우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호정과의 관계가 그렇다 하여 저에게까지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섭섭한 말씀입니다. 조막만 한 명성을 쌓고 몇 년 더 살았다고 하여 반드시 우대받아야 하는 세상을, 저는 싫어합니다.”
“허허.”
“제가 원했던 관계입니다. 연가주님께서는 무림에서의 위치나 나이 따위를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가주님께서 호정의 아버지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명쾌하고도 확고한 정리였다.
천하가 인정하는 최강자 중 하나지만, 실제로 보는 막원은 소탈하기만 했다.
‘호정이 멋진 인연을 쌓았구나.’
지닌 무공이 대단해서 멋진 게 아니다. 그 대단한 무공으로 천하인들의 경배를 받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오히려 수더분하여 멋진 것이다.
성격도 시원시원했고, 생각보다 세상 상식에 어두웠다. 그러나 더 많이 안다고 하여 바뀔 만한 성격도 아닌 것 같았다.
어수룩하지만 착하고, 착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막강한 무력을 손에 넣었으나 그것을 티 내려 하지는 않되, 올바르지 않은 일을 목격하면 절대 자신의 힘을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
연위로서도 참 오랜만에 보는 멋진 협사(俠士)였다.
“그나저나.”
막원의 얼굴에도 솔직한 감탄이 어렸다.
“가주님께서는 대체 어떤 무공을 연마하신 겁니까?”
“예?”
“무극에 이르지 못하셨는데도 미간에서 번뜩이는 영력(靈力)은 저는 물론 묵룡부주보다도 맑고 깊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검제 노선배보다도 더 깊은 것 같은데요.”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대체 어떤 수련을 하셨길래 그토록 무시무시한 검도(劍道)를 품고 계신 건지…….”
막원이 고개를 저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당금 성천의 강자 중에서도 연가주님에 비할 만한 상단전 소유자는 다섯을 넘지 못할 겁니다.”
막원의 말을 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연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련으로 막강한 무력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특히 연지평은 아버지가 심검지도(心劍之道)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을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룬 경지가 다르니, 감각이 좋아도 볼 수 없는 영역이 있는 법이었다.
백병신군 막원이 대놓고 인정하는 검도라면, 연위의 경지는 진실로 대단한 것이리라.
연위가 손사래를 쳤다.
“그저 검 한 자루에 집중하다 보니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통하지도 않을 무력이라면, 제아무리 날카로운 검을 가지고 있다 한들 별무소용이지요.”
“그 날카로운 검이 휘두를 필요도 없이 알아서 둥둥 떠다니는 신검(神劍)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요.”
“허허, 저를 너무 띄워 주고 계십니다.”
“진실을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예?”
막원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호정도 그렇지만, 가주님 역시 이상하게 호승심을 자극하는 분입니다. 다른 게 있다면 호정은 동적이고, 가주님께서는 정적이시군요.”
“허허허.”
“저야 배운 게 없어도 의제의 아버님이시니 독하게 조절해 보겠지만, 남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제게 호승심을 느껴 주는 분이 계신다면, 제가 영광일 겁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막원은 연위의 진심을 알아보았다.
막원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남궁의 검제, 당대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그분께서도 곧 가주님을 찾아뵐 것입니다.”
“검제께서요?”
“가주님의 검력이 워낙 맑고 형형해서 말이지요. 제가 느낀 것을 검제 선배가 못 느꼈을 리 없잖습니까?”
“허어.”
“뜨겁게 타오르는 호승심을 호정 덕분에 많이 잠재우셨을 테지만, 이렇게나 멋들어진 깨달음의 소유자가 있는데 눈길을 아니 줄 수가 없겠지요.”
“검제께서 이 필부에게 호승심을 느껴 주신다면, 그 자체로도 영광일 겁니다.”
두 사람의 부드러우면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대화는 함께 앉은 모두의 무심(武心)을 자극하였다.
묵비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연 공자가 묘한 말을 하던데요?”
“음? 무슨 말?”
“또 어떤 대단한 고수가 무림맹으로 오고 있다고요.”
“음.”
“연 공자가 굳이 대단한 고수라고 콕 집어 말할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무극을 돌파한 고수일 것 같은데…….”
막원과 연위, 두 사람이 동시에 끄덕였다.
“정확하네.”
“맞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또 다른 누군가가 오는 건가요?”
연위가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모르겠다. 내가 그 경지에 들지 않았으니, 멀리 볼 수 있다 해도 세밀하게 보지는 못해서.”
“네?”
“다만 정확한 것은, 이곳으로 오고 있는 사람의 무력이 검제 선배님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 정도다.”
“……!!”
모두가 깜짝 놀랐다.
막원이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
“저는 가주님처럼 멀리 내다보지 못하지만, 이룬 경지가 있기에 더 세밀하게는 볼 수 있습니다.”
“허허, 그러시겠지요.”
“도(刀)입니다.”
“예?”
“단호하고 날카로운, 동시에 직선적이고 확고한 외날의 칼입니다. 무척이나 무겁군요.”
백병신군.
백 가지 병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신인(神人)이다. 모든 병장기에 능통한 막원은 이곳으로 오는 일대 거인의 기질을 통해 그가 평생 연마한 무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무겁지만, 누구보다도 자유롭습니다. 대단한 깨달음이에요.”
“도(刀)라면……?”
“예, 맞습니다.”
막원이 묘한 눈으로 동쪽을 바라보았다.
“음제(音帝)까지 오셨다면, 성천삼제(聖天三帝)를 함께 볼 기회가 생겼으련만…….”
다음 날 새벽.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호오.”
파군각 평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막원이 웃으며 연호정을 보았다.
“숙취는 없냐?”
“싹 날려 버렸습니다. 뭐 좋은 기운이라고 내버려 두겠습니까.”
“맞는 말이지.”
“슬슬 가 보실까요.”
“응?”
막원이 눈을 끔뻑였다.
“어딜?”
“새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형님이 아니면 누가 제 무공을 봐주겠습니까.”
“……오호?”
막원의 얼굴에 생기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그 황금빛 기운을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었지.”
막원만이 아닐 것이다.
남궁승도 그럴 것이고, 그때 그 기운에 홀려 몰려들었던 모든 고수가 연호정이 발산한 새로운 기운을 느껴 보고 싶을 것이다.
“별것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간 익혀 왔던 사신무(四神武)의 투로들이 기억나질 않아요.”
“허어? 기억이 안 난다고?”
“예. 하지만 그게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발언이로구만.”
“확인해 주십시오. 도와도 주시고.”
막원이 껄껄 웃으며 가부좌를 풀었다.
“좋지, 좋아. 가자고.”
그렇게 두 사람은 홀연히 움직였다.
쉬이이익!
순식간에 파군각을 넘어 숲속의 공터로 달려가는 두 사람.
막원은 문득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흐음.’
막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실인 것 같군.’
연호정의 신법은 신법이라 부르기 애매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말 그대로 달리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다리와 다리 사이의 거리가 제멋대로였고, 땅을 박차는 행동 속에 유려함이나 강한 탄력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전의 연호정이 보여 주던 경신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일부러 저렇게 달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어떻게 경신술을 구사하는지 잊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어설프다. 완성된 무(武)가 아니다.
그런데 자연스럽다.
달리는 외형은 빈말로도 수준 높다고 할 수 없는데, 그 형태와 진기의 움직임은 자연기(自然氣)의 흐름을 보는 것처럼 무척이나 유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이거, 아주 재미있는 수련이 되겠는데.’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바로 얼마 전 공공대사와 모용군이 비무를 벌이던 그곳이었다.
막원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자,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일단 치고받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엄청나게 단순하고도 명쾌한 해결 방안이었다.
“성천에 이름을 올린 고수들이 고상한 깨달음 같은 건 없고 냅다 주먹질부터 하자니, 나 참.”
“성천이고 뭐고, 무(武)는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허허, 네 말이 옳다.”
스르륵.
연호정이 낮은 자세를 잡았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막원이 품에서 작은 단검(短劍)을 꺼내 들었다.
“요새 이걸로 재미를 좀 보고 있어서 말이다. 써도 되겠지? 네 녀석을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거고, 나도 재미는 챙겨야지.”
“물론입니다.”
“좋아.”
단검을 역수로 쥔 막원도 자세를 낮췄다. 연호정보다 한층 더 낮은 자세였다.
“큼직한 칼 한 자루가 무림맹으로 오려 한다. 생각보다 천천히 오는 것 같지만, 아마 오늘 밤쯤에는 도착할 거야. 너도 알지?”
“예, 느꼈습니다.”
“그 전에 무공 세 개는 만들어 보자고.”
연호정이 웃으며 발을 떼었다.
“좋지요.”
훅!
바람처럼 달려든 연호정이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