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3화. 개화(開花)하는 강자들 (3)
새벽 일찍 별실 앞 정자에 나와 차를 마시는 남궁승의 얼굴은 무심하면서도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
순간 알 수 없는 힘의 흐름을 느낀 남궁승이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우우웅.
남궁승은 가만히 있었지만, 정자 밑에 기대어 둔 철검은 기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후우.”
가볍게 뱉어 내는 숨결에 허연 김이 묻어 나왔다.
이내 남궁승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참으로 답답하구먼.”
장손의 나이는 서른을 훌쩍 넘겼고, 차손도 얼추 서른이다.
그 나이면 일가(一家)를 이루어 어느 정도 장성한 자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무림세가(武林勢家) 출신이라 혼인도 늦게 하는 것이지, 보통 저 나이면 자식 서넛은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그런데도 이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
무인으로서 큰 충격을 받았다면 잠이 올 리가 없다. 날이 새도록 검을 휘둘러도 심마(心魔)에 사로잡혀 초조해하는 것이 무인의 자존심인 바.
물론 그런 잘못된 길에 이르는 것을 원치는 않으나, 저리도 속 편하게들 잠을 자는 것도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좋은 습관을 만들어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에 몰두하여 세상을 잊고 빠져드는 경험도 필요하거늘.’
남궁승은 내심 혀를 찼다.
차라리 남궁현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첫째 남궁표는 자신과 함께 연호정의 폭발적인 변화를 목도하였다. 나아가, 평소 가르칠 때와는 달리 명확한 설명과 함께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도 잘 일러 주었다.
한데도 저리 숨소리가 고르다. 깊게 잠이 든 것이 분명했다. 무종의 벽을 뚫은 초절정고수가 무려 세 시진 가까이 수면을 취하는 것이다.
‘몸이 망가질 때까지 미쳐 수련하는 순간이 오기나 할는지.’
남궁승은 두 손자가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다.
제 애비 때문이었다.
당대 남궁가주 남궁인은 충분한 재능이 있었지만, 천하제일을 노릴 만한 그릇은 되지 못했다.
그랬다면 더더욱 노력하여 궁극에 이르고자 눈에 불을 켜야 마땅한데, 어느 순간 아들은 노력을 포기하고 정치로 눈을 돌려 버렸다.
무림세가의 주인이 무공에서 정치로 눈을 돌리는 순간 이룬 경지도 퇴보하기 시작한다. 당장 체감되진 않더라도 한 해, 두 해가 지날수록 스스로의 느슨함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더 문제는, 그런 아들이 제 자식들에게도 비슷한 걸 가르쳤다는 것이다.
혈관에 같은 피를 머금고 있다 한들, 혼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며 재능이 다른 법이다.
남궁인은 철저한 수면과 올바른 식사를 수십 년간 유지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남궁인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남궁표와 남궁현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한데도 손자들은 제 아비처럼 살았다. 스스로 생각하여 자신만의 명확한 자세를, 삶의 주관을 세워야하는데, 가르쳐 준 대로만 따라가는 것이다.
검을 가르칠 때도 그 부분을 강조했거늘, 무림맹으로 들어오니 거짓말처럼 배운 걸 까먹은 모양이었다.
남궁승은 그것이 답답했다.
‘말해 준다고 깨닫는 것이 아니겠지.’
정확히는, 너무 자주 말해 줘 봤자 오히려 손자들에게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당장 남궁표만 해도 엊그제 크게 혼을 내지 않았던가.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의 지적을 해 주는 게 좋을 터.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남궁승은 그렇게 생각했다.
‘…….’
손자들에 대한 실망, 아들에 대한 답답함에 고개를 저은 남궁승의 의식은 자연스럽게 이 지고(至高)한 기운을 품은 이들에게로 향했다.
남궁승의 얼굴에 약간의 망설임이 어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훅!
철검과 함께, 남궁승이 사라져 버렸다.
* * *
파아아아앙!!
매서운 파장을 일으킨 주먹에 막원의 몸이 굳어졌다.
“후우.”
가볍게 숨을 몰아쉰 연호정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 정도면 대충 틀은 잡힌 것 같습니다.”
“…….”
“굳이 복잡해질 필요가 없군요. 사신무의 투로는 잃었지만, 사신무가 제게 알려 준 무리(武理)는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것 같구만.”
“공격, 회피, 반격, 방어, 즉살기의 모든 무공에 통달하고 나니 비로소 행동이 간소해졌습니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투로는 단순하게, 진기는 섬세하게…… 돌고 돌아 다시 또 기본으로 돌아왔어요. 진즉 깨우칠 수도 있었는데, 이런 걸 보면 저도 멀었습니다.”
단순한 것은 언제나 진리에 닿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연호정에게 어울리는 단순함과 막원에게 어울리는 단순함이 다르듯.
막원이 지닌 무(武)의 단순함은 결정적인 일격필살의 수에 가깝다. 그러나 연호정의 무(武)는 무공을 구현하는 순간부터 단순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더 쉬워 보이지만, 창안하는 것은 몇 배나 더 어렵다.
“대단하구먼.”
막원은 혀를 내둘렀다.
“고작 서른 합 만에 권법(拳法) 하나를 만들어?”
“두 합을 겨룬 후 고민하고, 세 합을 나눈 후 논의하고, 다시 한 합을 붙고 하나하나 덮어씌웠습니다. 말이 서른 합이지, 보통 힘들고 신중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서른 합이잖느냐.”
“고작 서른 합이 아닙니다.”
삼십 년이다.
삼십 년 동안 사신무를 익히고 전쟁을 겪으며 수도 없이 많은 피를 보고 난 이후에야 황룡에 닿았다.
그 또한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지만, 스승님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일 뿐이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평이나 강량, 묵비가 사신무를 익혔다면 자신보다 먼저 황룡에 닿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말 그대로 만약에 불과한 것이지만.
‘정말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연호정은 결코 이 경지에 쉽사리 도달한 게 아니다.
감탄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막원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좀 묘하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이전의 네 무공은 형식의 구분이 없었다. 사신무라 했던가? 공격과 회피, 반격과 방어, 즉살과 활법 모두를 병장기술과 권각술의 구분 없이 쓸 수 있었다.”
막원이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지금 네가 만든 그 권법은 장법이나 검법, 창술 따위로 변환시킬 수 없어. 말 그대로 권법다운 권법이다.”
“그렇습니다.”
“사신무의 투로는 잃었어도 사신무가 준 무리는 남았다면서, 도통 사신무와 어울리지 않구나.”
“아닙니다. 너무나도 사신무와 어울립니다.”
“으음?”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삼 초의 권법. 이 세 개의 초식에 제가 보는 권법의 총화(總和)가 깃들어 있습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저는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만족하지 않을 수가 없지. 당장 내가 봐도 빼거나 더할 게 없는 완벽한 권형(拳形)이었다.”
“형(形)은 그렇습니다. 기공 운용은 조금 더 손을 봐야겠어요.”
“그 정도 형이라면 어떤 식의 기공술이라도 어울릴 터.”
황룡신왕공에 도달한 순간 모든 것을 주인의 의지대로 새로이 창조해야 한다.
진기의 핵과 사신기(四神氣)는 물론, 사신기(四神技) 모두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 황룡신왕공이다. 그 안에서 기술의 구분이나 기질의 차이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모든 것을 깨우친 진리의 무도가(武道家) 한 명이 있을 뿐.
훅!
막원이 허공에 단검을 찔렀다.
“마치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산악을 뒤흔드는 듯했다. 무겁고 위력적이었지. 단지 그것뿐이지만, 그 이상의 것이 필요 없는 완벽함으로 가득했다.”
“산악이라…….”
“진악권(鎭嶽拳). 진악권이라 이름 지으면 좋겠다.”
번쩍!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초식이나 신공을 작명할 때, 일부러 멋들어지고 화려하게 짓는 것은 삼류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름은 그 공부가 이르러야 할 목적을 드러냄과 동시에 추구해야 할 이상을 품는다.
사람에게 이름이 중요한 것만큼이나 무공에도 이름이 중요한 법. 그 단순하고도 뜻깊은 이름 속 진의를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심력(心力)으로 기(氣)를 조종하는 초고수들은 두 배의 위력을 낼 수 있다.
“진악권. 좋은 이름입니다.”
금룡진악권(金龍鎭嶽拳).
연호정만의 황룡신왕공, 그 황금빛 진기로 구사할 수 있는 첫 무공이 이렇게 탄생했다.
“네 체술은 어떤 의미론 병장기술보다도 더 파괴적이고 인상적일 때가 많았다. 위력만 따지면 병장기술이 위지만, 효과를 보자면 맨손 박투술로 적을 무너트린 경우가 많았지.”
“예. 그랬습니다.”
“다만 내가 보기에, 하체를 쓰는 각법보다 상체의 권장술(拳掌術)에 훨씬 능하였다.”
“각법은 동작이 커서 굳이 초식을 만들고 나눌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일초에 생사가 갈리는 실전에서 각법으로 승부를 보긴 어렵지요. 그래서 권장이 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의 진각(震脚)은 천하일품이었지.”
“그래서 더더욱 권장의 위력이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각법은 내버려 두고 장법(掌法)과 보법(步法)에 힘을 쏟아 보자. 보법의 경우 내가 도울 게 많지 않겠지만, 장법만큼은 확실히 도와줄 수 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또 한 번 격하게 부딪쳤다.
격하다고는 했지만, 생사결처럼 살수가 오가진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한 발경도 없었다.
하나 그저 치고받는 것이라 해도 두 사람의 깨달음은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바. 연호정은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무공의 뼈대를 만들 수 있었고, 막원은 그 뼈대에 어떤 형태의 근육이 어울리는지를 볼 수 있었다.
“놀랍도록 유연하지만 밀어붙일 때는 성난 파도와도 같구나. 자유자재의 움직임, 허공을 유영하는 용과 같다. 바다를 헤엄치는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높아.”
“번천장(翻天掌). 번천장이 좋겠습니다.”
금룡진악권에 이어 금룡번천장(金龍翻天掌).
권과 장, 권법과 장법이다. 황룡신왕공의 위력적인 육장쌍공(肉掌雙功), 금룡이수(金龍二手)의 탄생이었다.
손쉽게 만들어진 것 같지만 단순한 동작 속에 녹아든 진기 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검제 남궁승과 겨루었을 때보다도 두 배는 더 복잡하고 날카로워진 진기 운용이었다.
간단하지만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연호정만의 무공, 깨달음.
막원과 함께 무공의 형상과 진기 운용의 복잡한 구결을 뚝딱뚝딱 만들어 내며, 연호정은 비로소 자신의 무(武)가 도달한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진악은 무겁고 강렬하며, 번천은 유연하면서도 파괴적이다. 강유(强柔)가 잘 섞였음에도 빼어난 위력을 자아내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정말 볼수록 탐이 나는 무공들이야.”
“형(形)을 복사하셔도 괜찮습니다.”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동생이 창안한 무공까지 뺏어 가서야 쓰겠느냐? 하물며 구결도 모르는데 형을 빼앗아 봐야 무슨 소용이냐?”
“깨달음을 품은 형태이니, 구결을 몰라도 형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쩝, 그건 그렇지.”
그래도 이렇게 말해 주니 고마웠다. 막원은 헛기침을 하면서도 이후에 오늘 보고 깨우친 것들을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쨌거나, 품은 무리(武理)는 달라도 막강한 위력을 자아내게 하는 데에는 이 보법이 제격이겠구나. 화려하진 않지만 고풍스럽고, 강렬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이 또한 네가 얻은 깨달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멋진 보법이다.”
“그렇군요.”
“이건 암만 봐도 용형(龍形)이야. 보법은 물론 신법으로도 활용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럴 것 같습니다.”
“일곱 걸음의 기예가 상상을 초월한다. 용형칠기(龍形七技)의 보법으로 가면 되겠다.”
“좋습니다.”
“자, 이렇게 권장에 이어 보법의 틀까지 만들었으니 이제 병장기술로 넘어가 보자.”
사아아아악!
저절로 부러져 날아온 굵직한 나뭇가지를 단검으로 순식간에 정리한 막원.
나뭇가지가 어느새 다섯 자 길이의 얇은 목봉(木棒)이 되었다.
“미안하지만 병장기술만큼은 여유롭게 대응 못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