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70화 (870/963)

870화. 제왕들의 눈 (2)

“고아하구먼.”

남궁승의 담담한 말에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깊습니다.”

“그렇소이다.”

남궁승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 한마디 없이 무한에 진입하다니, 사람 참.”

별실 앞 공터.

정자 옆, 한 명의 승려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가부좌를 틀었지만, 다른 내가고수처럼 단전에 손을 모아 진기를 빨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다.

오른손은 부드럽게 풀어 오른쪽 무릎 위에 얹었다. 오른손 손가락 끝이 땅에 닿아 있다.

왼손은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석존오인(釋尊五印)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 버리는 수인(手印)이자, 석가모니가 얻은 깨달음을 지신(地神)이 증명하였음을 상징하는 수인이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소림의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이 하단전, 중단전을 아우르고 단박에 상단전으로 치솟았다. 공공대사의 미간에서 보기 좋은 황금빛 점화가 타올랐다.

무상대능력의 구결과 법문은 곧 유구한 불가 경전의 깨달음을 한데 담고 있는 무공인바. 그 응축된 뜻과 힘을 오롯이 영혼의 비처로 끌어올리니, 도달했으되 애써 잊고 있던 그 미지의 세계가 너무나도 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무한에 진입하는 순간.

공공대사의 몸에서 방출된 거대한 기운이 사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곧바로 그 기색을 읽은 남궁승과 연위가 사방에 기망을 쳤다. 적시 적소에 기망이 펼쳐지지 않았다면, 별실의 담이 무너지고 무곡각의 건물 여러 채에 실금이 갔을 것이다.

당연히 그 기운에 휩쓸린 무사들도 꽤 많이 다쳤을 것이다.

‘대단한 기운이다.’

연위는 명멸하는 공공대사의 황금빛 진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토록 막강한 기운이라니. 나와는 전혀 다른 영역에 닿은 깨달음이다. 그 힘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에 방출된 기운도 강한 것이리라.’

무한의 경지에 진입하지 못한 몸으로, 그 영역에 도달한 자에게만 허락된 깨달음을 손에 넣었다.

그 깨달음과 신체의 괴리가 심각했다. 하여 깨달음에 걸맞도록 신체와 진기의 수준이 모조리 상승해야 했기에, 급작스러운 변화로 인한 충격파가 거세지는 것이었다.

‘아마 나도 그렇겠지.’

연위 역시 무한에 진입하는 순간 신체와 진기가 깨달음을 뒤따르고자 무지막지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어쩌면, 지금 공공대사의 몸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보다 훨씬 더 강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연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혼란과 번뇌로 가득했던 공공대사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린 것을 본 까닭이었다.

과하지 않은 미소, 편안함으로 물든 표정이 무척이나 보기가 좋았다. 세상천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부처의 미소가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부디 좋은 맹주가 되어 주십시오.’

쿠르르르릉!!

순간 공공대사의 몸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천공으로 쏘아져 올라가는 황금빛 진기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우두둑!

섬뜩한 소리.

투두둑! 툭! 주르륵.

공공대사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이어졌다.

“기가 막히는군.”

한옆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승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팔짱을 끼고 있는 종리백이 있었다.

“천하공부출소림이라지만, 그저 무한에 오른 것만으로 육체의 뿌리부터 재구성되다니.”

종리백이 혀를 찼다.

“소림 무공의 신묘함인가? 아니면 그 자신의 깨달음이 남다른 탓인가?”

육체의 뿌리부터 재구성이 된다. 말하자면 환골탈태(換骨奪胎)다.

그것도 비유적인 의미가 아닌, 진짜 환골탈태를 하는 것 같았다.

뼈마디가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되고, 혈도가 부서졌다가 다시 만들어진다. 근육이 산산조각이 났다가 더 굵고 선명한 것으로 이어졌으며, 혈관과 신경은 물론 피부까지도 달라지고 있었다.

무종을 돌파하면 더 막강한 기운을 담기 위해 신체라는 그릇이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으로 개화한다.

그것은 무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저렇게까지 분명하고 직관적인 변화는 남궁승과 종리백 둘 다 본 적도, 겪은 적도 없었다.

“역근과 세수. 소림 무공의 근본을 완벽하게 체득한 자들은 극에 이른 깨달음 속에서 영혼은 물론 신체까지 완벽하게 재조립할 수 있다고 하였지.”

남궁승의 말에 종리백이 그를 바라보았다.

남궁승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우우우우우웅!!

별실 전체를 뒤덮었던 창궁대연신공의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연위의 검극사기도 함께 소멸되었다.

이제부터는 굳이 진기의 막을 치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었다.

“과연 권신의 애제자로고.”

가만히 남궁승을 보던 종리백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남궁승이 종리백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남궁승을 올려다보는 종리백의 눈빛은 묘한 흥미로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인가?”

기묘한 말투였다.

예의를 차리는 듯하면서도 편안하게 말을 놓는다.

남궁승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그런 것 같군.”

“해서, 존귀하신 천하제일검께서 어인 일로 이 백정을 예까지 불러 주신 겐가?”

백정.

뜬금없는 순간이지만, 연위는 그 백정이라는 단어에서 연호정을 떠올렸다. 아들이 언제나 스스로를 개백정 같은 놈이라고 비하했던 게 생각난 것이다.

“어디 백정이 그대 하나일런가. 칼 들고 사람 죽이는 무림인들은 전부 백정이지. 백정이 백정을 부르는 데에 다른 이유가 있겠소?”

“호오? 그 말은?”

“검과 도. 내 비록 많은 사람이 검에 한하여 천하제일이라고 치켜세워 주곤 했으나, 진심으로 나 자신이 천하제일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소.”

“예의, 겸손 뭐 그런 거요?”

“다만, 도검(刀劍)의 이름으로 얽힌 그대와는 꼭 한번 만나고 싶었지. 누구의 안목이 더 위인가, 누구의 깨달음이 더 지고한가, 그리고…….”

“누구의 병기가 더 날카로운가.”

종리백이 자신의 말을 끊었음에도 남궁승은 사심 없이 웃을 수 있었다.

“그렇소. 해서 언제나 그대가 보고 싶었소.”

“나는 별로 그대가 보고 싶진 않았소만, 흥미가 없던 것은 아니오. 언제고 만나게 된다면 꽤 화려하게 붙어 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지.”

“은퇴한 노검을 향한 투쟁심을 아직도 갖고 계시다니, 참으로 영광이오.”

“거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너무 늙은이 같은 말투를 쓰시는구만.”

어느새 몸을 일으킨 종리백의 눈이 번뜩였다.

순간 연위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날카로워진 종리백의 눈빛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공과 같은지라, 몸이 먼저 반응해 버린 것이다.

“나는 무림맹에 따로 볼일이 있어서 왔소. 당신과 붙기 위해 온 건 아니야.”

“나 역시 그대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소.”

“흐음.”

가만히 남궁승을 보던 종리백이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괜찮군.”

“무슨 말씀이시오?”

“막연히 상상하기를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일 줄 알았소. 지극히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일 거라고 예측했는데, 완전히 잘못 짚었구려.”

“그에 반해 당신을 향한 나의 상상은 제법 맞아떨어진 것 같소.”

“날 어찌 보셨길래?”

“예의와 무례를 넘나드는 단호한 성정에, 누구보다도 직관적인 안목을 지닌 달인일 거라고 생각했소.”

종리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신, 대단한데? 싸울 수밖에 없는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잖소.”

“그렇게나 싸움질이 좋은 사람이기에, 당신이나 나나 이 나이 먹도록 철없이 손에서 병기를 놓지 못한 것 아니겠소.”

“그건 그렇군.”

스르륵!

땅에 박혀 있던 참악도가 저절로 떠올라 종리백의 손에 잡혔다.

연위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어검(馭劍). 쓴다면 자신이라고 못 쓸 건 아니었지만, 종리백이 보여 주는 자연스러운 어검술은 또 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어, 그 사람이 직접 칼을 뽑아 종리백에게 건네주는 듯했다. 허공섭물의 기예가 극에 이른 것이다.

연위 자신이 구사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어검술의 기예다. 그 성격과 칼의 크기를 보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세심함이 묻어났다.

“못난 제자 놈 맡기고 적당히 얻어먹다가 훌쩍 떠날 생각이었는데, 아주 재미있게 되었…… 응?”

남궁승을 보며 전의를 불태우던 종리백은 문득 연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이건?”

종리백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어렸다.

“저 노친네 검압(劍壓)이 너무 선명해서 못 봤나? 아니면 스스로를 숨기고 있었던가?”

“…….”

“당신은 정체가 뭐요?”

연위로서는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광혼귀군이 그러했고, 맹에서 남궁승도 그러하더니, 이제는 종리백마저 반존대를 써 준다.

연위가 포권을 취했다.

“강동 벽산연가의 가주 연위라 합니다. 도제 선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벽산연가? 육가 중 하나인?”

“그렇습니다.”

종리백의 눈이 점점 커졌다.

“뭐야? 연가라면 그 최연소 성천을 냈다는 가문이 아니던가? 한데 연가의 주인도 이 정도라고?”

“…….”

“괴물인가, 당신?”

연위가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개뿔, 그 연약한 몸뚱이 안에 천검(天劍)을 담아 놨구만.”

종리백이 남궁승을 힐끔거렸다.

“붙잡고 싸우는 건 저 노친네랑 하고, 깨달음을 주고받는 건 당신이랑 해야겠는데.”

남궁승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종리백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멋진 하루가 되겠군. 가능하다면 제자에게도 보여 주고 싶은…… 어엉?”

종리백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상한 괴물들이 또 오는데?”

그의 반응에 오히려 남궁승과 연위가 더 놀랐다.

종리백 정도의 수준이라면 진즉에 알아챘어야 했다. 한데도 이제야 느꼈다는 듯 놀라는 것이다.

기실, 그것은 두 사람이 종리백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상단전의 발달로 신기(神氣)의 파탄을 겪을 뻔한 그는 상단전의 기운 자체를 봉해 놓았다. 그래서 다른 성천보다 상단의 감각이 떨어지는 것이다.

잠시 후.

훅!

하늘을 날아 별실 담벼락에 내려앉은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연호정과 막원이었다.

툭!

땅으로 내려선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도제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이자 묵룡부의 소부주를 겸하고 있는 연호정이라 합니다.”

종리백의 얼굴에 충격의 기색이 떠올랐다.

“……네 녀석이었구나.”

“예?”

“그 황금빛 바람 말이다.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그 기운의 주인이 바로 네 녀석이었어.”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종리백이 말하는 황금빛 바람은 분명 황룡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황룡을 깨달은 게 언제인데, 종리백은 그 기운을 정확하게 읽고 이동한 모양이었다. 족히 수백 리 밖에서 읽어 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단하다.’

막원과 남궁승, 그리고 종리백.

그들 모두가 성천에 이름을 올렸으나 저마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이룬 경지는 셋 모두 지고하였으나 특색이 다르고 얻은 깨달음이 달랐다.

하나같이 독특하고도 개성이 넘치는 이들이었다.

‘나도 이런가.’

고개를 휘휘 젓던 연호정은 문득 가부좌를 튼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제법 오래 걸리실 겁니다.’

그래도 마음을 잡아서 다행이었다. 껍질을 벗고 나아가려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새삼 감사했다.

연호정이 연위에게 말했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

“음? 아, 그러냐?”

연위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궁승과 종리백이 멀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무림의 전설들이 앞에 있는데, 인사만 나누고는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승현진인만큼이나 강한 부동심의 소유자인 연위조차도 밀려오는 어색함과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바쁜 일이냐? 그게 아니라면 여기 어르신들과…….”

“바쁜 일입니다. 또 나가게 생겼거든요. 여기 어르신들이랑은 일을 끝낸 뒤에 한판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 한판이라니? 이놈아, 무슨 말을…….”

“말 끊어서 죄송합니다. 일단 가시지요.”

연호정이 연위를 끌고 가다시피 하며 자리를 떠났다.

막원은 멋쩍은 얼굴로 둘을 따라갔고, 결국 별실 마당에는 남궁승과 종리백, 그리고 가부좌를 튼 공공대사만 남았다.

“…….”

말없이 서 있던 종리백이 침을 탁! 뱉었다.

“술이나 한잔 줘 보쇼.”

“뭐, 그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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