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3화. 제왕들의 눈 (5)
깨달음이란 물건처럼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모용우라고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온 연호정은, 모용우의 얼굴에 드리워진 자괴감과 엄청난 향상심, 그리고 분노를 엿볼 수 있었다.
‘분노라.’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은 극단적인 환경에서 극심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존재하지요.”
“…….”
“저는 깨달음을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라도 그렇습니다.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남의 도움을 구할 게 아니라 스스로가 변하려 해야 합니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네.”
모를 사람이 아니다. 연호정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초조함을 느끼십니까?”
“초조함…… 그래, 그런 것도 있지.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닐세.”
모용우가 탄식했다.
“의정군의 대수로서, 나는 충만한 뿌듯함을 느끼네. 비록 내가 원해서 거머쥔 직책은 아니지만, 지난날 모든 것을 포기했던 나 자신의 우매함을 반성할 수 있었네.”
“…….”
“나아가,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찬 일인지도 알았지.”
“다행입니다.”
“그러나 군병들은 내가 아니었더라도 잘 성장했을 걸세. 오히려…….”
모용우가 눈을 감았다.
“군병들 덕분에 지금의 나를 지탱할 수 있었네. 내가 그들을 이끈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이끌어 주었어.”
왜일까?
평소의 모용우와는 전혀 다른 표정, 그리고 목소리였다.
사람은 작은 계기 하나만으로도 이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몰입이라고 한다. 몰입은 변화의 핵심이었다.
“그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네. 그러나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나 자신의 완성과 멀어지는 길이라면, 살점을 떼어 내는 고통을 참아서라도 그러고 싶네.”
무책임한 말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무인은 나 자신의 완성을 꿈꾼다. 그것은 비단 무(武)에 몸을 담은 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서야?’
가만히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제서야가 아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자신이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라 하였다. 사람을 쉬이 믿지 말라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꿰뚫어 보기란 지극히 어렵다는 뜻이다.
적과의 대치에서, 연호정이 상대의 마음을 읽고 치명적인 빈틈을 노릴 수 있었던 것도 기실 그 순간의 ‘의도’를 읽어 냈던 것뿐이다. 타인이 타인의 마음 그 자체를 고스란히 꿰뚫어 보는 것은 신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너무 무신경했던 것인가.’
옥청을 만나려고 온 길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모용우도 있었다. 마치 당관을 만나러 간 자리에 패율이 있었듯.
연호정은 문득 씁쓸함을 느꼈다.
‘새삼 나도 참 나쁜 놈이야.’
모용우가 한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의 시기를 맞이한 것처럼.
연호정 역시 자신을 되돌아보며 변화가 필요한 순간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황룡을 깨달은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깨달음이었다.
흔들리는 모용우의 눈에 깃든 감정은 길 잃은 미아의 당혹스러움과 비슷했다. 모용우의 능력과 재능, 인품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그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도 달리 없었다.
‘아!’
연호정이 탄식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인생을 논하는 자, 천하를 논하는 자.
뛰어난 재능과 안목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자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타인이 끼친 영향으로 자신의 삶이 엇나갔다고 투덜대지도 않는다.
일례로 모용군과 양천이 그러했다.
양천은 연호정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다. 적어도 그가 나쁜 고집을 안고 끝까지 자존심만 내세웠다면, 그 모든 행위를 피해라고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양천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연호정이 왜 그런 언행을 하는지 고민했고, 이윽고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실제로 피해를 보기도 했지만, 그런 걸로 연호정을 탓하거나 멀리하지 않았다. 되레 더 좋은 자극제로서 인정했으며, 이후 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까지 품었다.
그것이 바로 양천이 대단한 점이며, 연호정이 그를 위대한 종사(宗師)라고 인정하는 이유였다. 남부럽지 않은 권력과 천하제일을 논하는 무공을 손에 넣고도 주변에서 터지는 불행한 사건들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꽃피울 거름으로 삼았다.
모용군은 어떠한가.
끝까지 욕심 하나를 버리지 못해 온갖 사달을 냈고 심지어 연호정을 욕하며 이랬다면, 혹은 저랬다면 내 삶은 한층 나아졌을 거라고 여러 번 한탄했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결국 모용군은 주변이 아닌 그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모용군은 스스로를 바꾸었다.
어떤 의미로는 양천보다도 대단한 변화였다. 연호정은 양천을 상대로는 어르고 달랠 때가 많았지만, 모용군에게는 항상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과거를 버리고,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사람을 향한 분노를 버렸다. 나아가 자신의 욕심 또한 버린 후,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잡았다.
모용우는 어떠한가.
모용우는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다. 뛰어난 재능으로 연호정과 함께 호검쌍위라 불렸으나, 불꽃 같은 성장은 거기서 멈추었다.
연호정이 무극에 올라 성천에 이름을 새기기까지, 모용우는 여전히 의정군의 대수로 남았다.
하지만 그것이 못났다고 치부할 일인가?
양천처럼, 모용군처럼 스스로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은 부족한 자의 느린 걸음이라고 혀를 찰 문제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모용우는 연호정 덕분에, 혹은 연호정 때문에 무림맹에 왔다.
말하자면 그의 삶은 연호정으로 인해 한차례 크나큰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한번 변화를 목도했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삶의 목표를 명확하게 세운 후 거침없이 달려가야 했다. 그것이 왕도이다.
모용우는 그러지 못했다.
양천이나 모용군만 못해서 그런 것일까?
‘내 잘못이다.’
때가 되지 않았는지, 능력이 거기까지인지는 모용우 본인이 생각할 일이다. 실제로 그는 지금 그러고 있다.
문제는 연호정이었다.
‘나는 형님에게 새 시대의 맹주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어. 끝까지.’
이유 없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모용우는 연호정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라고 넘겼지만 그래도 무림맹주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호정은 끊임없이 그를 설득했다.
모용우의 의지가 제아무리 강하고 분명하다 한들 천하 그 자체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사람의 한마디는 혼을 뒤흔드는 법이다.
연호정은 모용우에게 무림맹주가 되어 달라고, 당신 이외에는 그만한 재목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왜 그래야 하는지 마땅한 설명을 해 준 적은 없었다.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아도 그에 이르는 길을 확고히 다져 줄 수는 있건만, 연호정은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삼교와의 싸움 때문에?
그것은 말 그대로 변명에 불과하다. 내가 바빠서 내가 뱉은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지 못했으니, 결국 이는 연호정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용우는 아직 개화하지 못했고, 연호정은 상대가 개화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돕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 두 사람이 당면한 문제였다.
가만히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모용우는 깜짝 놀랐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시는가?”
“제 잘못입니다.”
“무엇이?”
말없이 고개를 든 연호정이 시선을 돌려 의정군 숙소를 바라보았다.
우우웅!
일순 그의 눈에 황금빛 광채가 어른거렸다.
잠시 후.
파라라락!
매끄러운 신법은 마치 탄금(彈琴) 위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 음률과도 같다.
이룬 경지가 실로 대단하다. 무종을 넘지 못했음에도 무종 이상의 깨달음을 손에 넣은 것 같다. 마치 연지평을 보는 듯했다.
사라락.
연무장 위에 내려선 옥청이 놀란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소부주님?”
연호정이 모용우에게 말했다.
“임무가 생겼습니다. 옥청이 꼭 필요합니다. 제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느닷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그 어조가 원체 빠르고 날카로워서, 모용우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 물론일세.”
연호정이 옥청에게 말했다.
“승현진인을 뵙고 와라. 진인께는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네가 다시 한번 허락을 받고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 아…….”
“지금 바로.”
얼떨떨해하던 옥청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임무는 언제부터입니까?”
“빠르면 나흘 뒤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슬그머니 모용우의 눈치를 보던 옥청이 한순간 신법을 펼쳐 사라졌다.
“…….”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 어색함은 전적으로 모용우에게 기인했다. 연호정은 일말의 어색함 없이, 그저 투명한 눈으로 모용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연제. 이 우형에게 달리 할 말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럼…….”
“너무나도 많아서 다 드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형님 역시 저에게 할 말이 많으실 겁니다.”
“내가?”
물론 많다. 그간 어떤 걸 보고 살았는지, 겪은 임무와 실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사흘 밤낮 술을 마시며 얘기를 듣고 싶다.
그러나 연호정의 말뜻은 그것이 아님을, 모용우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바빴습니다.”
“음?”
“중원 곳곳에 이런저런 사건이 많았습니다. 제 가족에게도 소홀했지요.”
“아.”
“묵룡부에서의 일까지 대충 마무리가 되어 무림맹으로 왔습니다. 맹주 선출 때문이지요. 무림맹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혹 그 과정에서 삼교의 세작이나 욕망 가득한 이들의 치졸한 욕망이 끼어들까 싶어 특명 전권 대사의 직책으로 왔습니다.”
“…….”
“천만다행히도 공공대사님께서는 저와 군사님, 그리고 여러 봉공분들의 부탁으로 번뇌를 지우고 맹주위에 오르시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기뻐할 일이지요.”
모용우는 연호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단조롭게 들리던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점점 어두워지는 듯했다.
“새로운 강자들도 많았습니다. 더 강한 무림맹, 더 결집된 무림맹이 될 필요가 있어 보여서 검제 선배와도 한판 붙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감히 상상도 못 했던 깨달음을 얻어 십년적공(十年積功)의 세월도 아꼈습니다.”
“연제.”
“어수선했지만,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손에 넣었지요.”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황룡에 오른 후, 왠지 모르게 무림맹 돌아가는 꼴이 어설프다고 생각했습니다. 갈팡질팡 묘하게만 보였지요. 하지만 이제 알았습니다.”
“……?”
“문제는 저에게 있었습니다. 무인이지만, 동시에 이 어깨 위에 많은 것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잊었습니다.”
“나는 연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형님의 깨달음은 형님께서 얻으십시오.”
모용우가 쓰게 웃었다.
“미안하네. 내가 잠시 뭔가에 홀려 연제를…….”
“그러나, 형님의 자리는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연제?”
연호정이 모용우의 소매를 잡았다.
“무성전으로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