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77화 (877/963)

877화. 권왕맹주(拳王盟主) (2)

무림맹으로 들어온 곡경은 천효락이나 종리백처럼 외성에서 대기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기할 필요가 없었다. 곡경의 품에는 황궁, 그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도 가장 권위가 강한 곳에서 발급한 금패(金牌)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묵룡부주의 제자이자 소부주의 사매이며 특명 전권 대사로 온 일행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외성을 넘어 내성에 도달했다.

“…….”

부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가는 무사들이 긴장 어린 눈으로 곡경과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곡경은 굳이 자신의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유의 사이한 기파를 대놓고 발산하진 않았지만, 정공(正功)을 익히지 않은 사파 고수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부선 역시 투왕 양천의 패도적인 무공을 익혔다. 곡경의 기세가 워낙 짙고 무거워서 티가 나지 않을 뿐, 그녀의 존재감 역시 밝고 정대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영광이오.”

곧장 무성전 옆 귀빈들을 모시는 별채로 들어선 곡경과 부선.

두 사람을 맞이한 건 바로 승현진인과 몇몇 봉공들이었다.

“삼군의 일인, 광혼의 귀군을 이렇게 뵙소. 무림맹 십이봉공을 대표하여 인사드리오. 무당의 승현이라 하외다.”

담담한 목소리가 고풍스러운 어조와 맞물려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승현진인의 나이는 곡경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이룬 경지의 차이가 확실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공경 어린 인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정파와 사파, 두 세력 간의 뿌리 깊은 거리감 때문일 것이다.

곡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곡경이오. 무림맹 공기 한번 서늘해서 좋군.”

승현진인의 어조가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면, 곡경의 어조는 무척이나 자유분방했다.

무림에서 만났다면 함께 차를 마실 확률보다 곧바로 칼을 뽑아 들 확률이 높은 사이다. 거기에 곡경의 성격 역시 워낙 거칠고 직설적이라, 이 정도 어휘만 해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승현진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따로 얘기는 들었소이다. 본래 묵룡부로 가실 것을, 중간에서 길을 틀어 무림맹으로 오신다고.”

“그놈에게 들었소?”

그놈이란 다름 아닌 연호정을 뜻함이었다.

승현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은 그림을 그려 주셔서 고맙소.”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굳이 말꼬리를 잡을 필요는 없었다.

곡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맹주 선출은 언제요?”

“정확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소. 다만 며칠 안으로 선출이 될 것이오.”

“당신들만큼이나 나 역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 머리도 복잡하니 객당에 머무르고 있겠소.”

“먼 길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떻소?”

“우리가 웃는 낯으로 차나 마실 사이는 아니잖소?”

날카로운 반응에도 승현진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껄끄러운 사이에서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은 사이로 발전할 수 있지 않겠소?”

곡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따위 관계에 관심 없소.”

“애석할 따름이오.”

“미리 말하는데, 나는 무림인으로서 온 게 아니오. 황제 폐하의 대리인으로 온 것이지.”

순간 편안하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서늘하게 올라왔다.

황제 폐하의 대리인. 그냥 듣고 넘어가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이름이었다.

“폐하께서는 연호정 그놈에게 관심이 많으시오. 폐하의 진심을 뉘라서 알겠느냐마는, 그놈에게 신경을 쓰시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오.”

“…….”

“나도 그놈 말이 아니었다면 그림이니 뭐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오.”

성천십삼좌의 일인이자 제국 황제의 휘하에서 움직이고 있는 초거물조차 연호정의 부탁에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봉공들은 새삼 연호정의 영향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쓸데없이 분위기가 굳어졌군. 내 말은 여기저기 얽힌 사람이 많다는 거요. 나야 이런 곳에서 깽판 칠 성격은 못 되니, 휘하 무사들 관리나 잘해 주시오.”

지나치게 거칠고 무례한 발언이지만, 곡경 입장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고래로 흑도 사파를 보는 백도 정파 무림인들의 시선은 혐오 그 자체였다. 굳이 흑도를 표방하지 않아도, 사공(邪功)을 익히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미래를 위해 당장 잡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어디에나 극단적인 사람은 있고, 악인도 있다. 상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두 눈에 불을 켠 채 움직일 사람이 없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

곡경은 바로 그 지점을 꼬집은 것이다.

승현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언컨대 맹의 무사들이 귀군을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오. 아무 일 없도록 조취를 취하겠소.”

“…….”

가만히 승현진인을 보던 곡경이 피식 웃었다.

“역시 아무나 봉공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오.”

“과찬이시오.”

“맹주는 이미 소림의 사람으로 확정된 것이오?”

승현진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을 어찌 아시오?”

곡경이 무성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늘한 그의 눈에 일순 반짝이는 사기가 일었다.

“무림맹만 한 복마전이 없다고 하더니만, 그 말이 사실이었군. 무극이 장난도 아닌데, 그에 이른 고수들이 우글우글하구려.”

“…….”

“그중 제일 껄끄러운 기운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구먼. 권신(拳神)이라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라고, 성천에 이르렀느냐고 하면 그 또한 애매하지.”

“…….”

“예전 연호정 그놈이 소림 방장을 그렇게 칭찬하더니만, 과연 보통이 아니었군. 하긴 그 권신의 제자이니.”

승현진인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귀군의 안목이 실로 대단하시구려.”

“됐소. 말이 길었군. 이만 갈 테니 안내나 해 주시오.”

곡경이 부선을 돌아보았다.

부선이 눈을 깜빡였다.

“후배님은 어쩔 생각이신가?”

“저는…….”

그때, 저 멀리서 한 줄기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의 사매이니, 파군각에서 지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연위와 당관이 걸어오고 있었다.

곡경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그가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육가의 가주와 친분 있는 모습을 보여 줘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해서 빨리 들어가려고 했는데, 어찌 알고 후다닥 온 모양이었다.

이왕 이리 만난 것, 곡경은 굳이 상대를 생각해 주면서 연기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오랜만이외다.”

연위가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소.”

곡경이 한숨을 쉬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봉공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설마 연가주에게만 따로 포권지례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국검주(帝國劍主)가 편하게 대하지 않으면 나도 불편해지오. 편하게 좀 삽시다.”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주의하겠소.”

“뭐, 술 한잔하면서 이래저래 할 얘기는 많소만 자리가 좋지 못하군. 나중에 때 되면 한잔하십시다.”

“그럽시다. 여로에 고생이 많으셨을 테니 푹 쉬시오.”

곡경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길을 나섰다.

승현진인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미안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진인이 봉공들에게 말했다.

“자, 대충 인사는 마쳤으니 우리도 흩어집시다. 휘하 무사들에게는 조심하라고 전달해 주시오.”

그 말을 끝으로 봉공들까지 자리를 떴다.

“…….”

부선이 무표정한 얼굴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차가웠지만, 연위는 그 무심한 표정 안에 깃든 어색함과 당황스러움을 놓치지 않았다.

“반갑네.”

“네? 아!”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당황한 부선이 황급히 매무새를 바로 하고 포권을 취했다.

“묵룡부의 부선이라 합니다.”

연위가 가볍게 양손을 올렸다.

“강동 벽산연가의 가주 연위라 하네. 호정의 애비가 나일세.”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당관이 툭 던지듯 말했다.

“사천 당씨 문중의 주인이 나다. 이름은 알고 있겠지?”

왜일까?

부선은 연위의 모범적이라 할 만한 대응보다 당관의 소개에 한결 편안함을 느꼈다. 저리 대놓고 툴툴거리는 게 차라리 편할 정도로 연위에게서는 묘한 어려움이 느껴졌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젓던 연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호정에게 말은 많이 들었네. 저 어려운 사람 데리고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

“아닙니다.”

부선의 얼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연위가 무성전을 힐끔거리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여기서도 호정은 바쁘다네. 이왕 온 것, 지낼 곳도 있어야 하고 사형도 만나야 할 터이니 우리가 지내는 곳으로 가세나.”

“아, 괜찮습니다. 저는 혼자가…….”

당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혼자 지내게 할 곳 없으니까 잔말 말고 따라가.”

“…….”

부선은 차마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를 몰라 침묵을 지켰다. 흑도였다면 진하게 노려보다가 시비가 붙었다 싶으면 칼을 뽑았을 텐데, 여기서까지 그럴 순 없었다.

연위가 서둘러 말했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면 그리해도 되네. 다만 호정이 올 때까지는 가서 기다리는 게 어떤가?”

“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하세. 아, 혹시 차는 좋아하시는가?”

“차는 그다지…….”

“그렇구먼.”

괜스레 무안한 표정을 짓는 연위를 보며 부선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술은 좋아합니다.”

“허허, 술이라. 좋네, 여독도 풀 겸 찬찬히 마시면서 기다려 보세.”

두 사람의 뒤를 따르던 당관이 한마디 툭 던졌다.

“또 싸구려 술 잔뜩 퍼마시겠구먼.”

* * *

“아! 드디어 왔네.”

외성을 통과하고 내성에 들어선 제갈아연이 기지개를 켰다.

“똑같은 산 공기인데 내성과 외성이 너무 다른 것 같아. 너도 그러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적당히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육 척이 조금 안 되는 키, 펑퍼짐한 옷을 걸쳤음에도 다소 말라 보이는 외양이었다. 단정한 이목구비 가운데 지혜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유난히 깊어 보였다.

제갈아연이 말했다.

“너야 맹 내에 와 본 적이 없으니까.”

“있습니다.”

“어? 언제?”

“설립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요.”

“그랬어?”

“여전히 혈육에게는 관심 한 톨 없네요.”

“뭐, 와 봤다면 와 본 거겠지.”

청년, 제갈준이 미소를 지었다. 수년 전 아직 여물지 못한 모습을 보여 주던 소년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제갈세가의 소가주로 임명된 후, 오랫동안 가문 내에서 문무(文武)를 연마한 그였다. 세가 최고의 학식을 지닌 학자들과 무수히 많은 무학사들의 가르침을 받은 지금의 그는 되레 제갈아연보다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맹주 선출이 코앞인 지금, 소가주인 제갈준 역시 맹에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파 무림의 여러 문파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안 그래도 복잡했던 무림맹이 유독 시끌벅적해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으, 찝찝해. 얼른 씻고 싶다.”

“어제 씻으셨잖아요.”

“더러운 녀석. 어지간한 일 없으면 원래 맨날 씻는 거야.”

“몸을 씻기 전에 마음부터 깨끗이 하시지요.”

“됐거든. 이 자식, 몇 년 동안 공부 좀 했다고 아주 선비 나셨네.”

제갈준이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어릴 때보다 여유가 넘쳐 보이는 것이, 아주 매력적인 청년으로 성장했다.

제갈아연이 앞섶을 펄럭이며 성큼성큼 걸었다.

“얼른 가자, 얼른 가. 아직 날이 추운데 왜 땀이 이렇게 나는지 모르겠…… 응?”

순간 제갈아연의 걸음이 멈추었다.

“왜 그러세요, 누님?”

“…….”

“누님?”

그때, 제갈준의 눈에 저 멀리서 이곳을 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남궁세가의 이공자, 남궁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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