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8화. 권왕맹주(拳王盟主) (3)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 그리 깊은 연정을 품게 되었는지.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남궁현은 제갈아연에게 연심을 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제갈아연은 놀라운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고, 명문가의 자제답지 않게 소탈했다.
웃는 것조차 주변 사람 눈치를 봐 가며 입을 가리는 숱한 여인들과 달랐다. 착했지만, 동시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 교태나 부리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 아쉬울 게 없다는 듯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하지도 않고, 남궁의 이름을 흠모하는 기색도 없었다.
처음에는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제갈세가 따위, 같은 명가로 이름을 날렸다곤 해도 힘이며 세력이며 남궁과 비교할 수 없었으니까. 첫눈에 반했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갈아연은 더더욱 아름다워졌고, 남궁현은 그녀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가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중간에 자신의 여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 일을 진행했으며, 그동안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말도 못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혼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덜컥 그럽시다,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제갈가주가 혼인을 거절한 것이다.
이후 제갈아연은 마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듯 활발하게 살았다. 적어도 남궁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내가 그렇게도 싫은가. 그렇게도 미운가.
안 그래도 무너져 버린 자존감에 불을 지핀 것은, 제갈아연이 한 후기지수와 붙어 다닐 때부터였다.
연호정.
당대 새로운 성천으로 등극한, 고금을 뒤져도 찾아보기 힘든 천재 무사.
제갈아연과 달리,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놈이었다.
하여 일부러 가문의 무사와 시비가 붙게 하여 개망신을 주려고 했다. 한데 그놈은 절정고수였던 무사를 압도하여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무림에 나와 승승장구하더니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호칭을 따내고, 믿을 수 없게도 성천에 오르며 고금 제일의 천재 소리까지 듣고 있다.
지금의 남궁현으로선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위치에 올랐다. 그것이 남궁현의 질투를 머리끝까지 치솟게 만들었다.
막 설립된 무림맹으로 향하던 길에 모욕을 당한 것도 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흥미가 없는 제갈아연에 대한 원망은, 연호정의 등장으로 인해 오히려 옅어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예전보다 훨씬 더 깊어진 연심과 연호정에 대한 끝을 모르는 질투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제갈아연을 보게 되었다.
“아연이구나.”
남궁현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숙였다.
“이공자님.”
남궁현의 눈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공자님이라니?
“어찌 나를 그렇게 부르느냐.”
제갈아연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무림맹 유군 부대 의정군의 군사입니다.”
“……!”
“맹주 선출 건과 함께 의정군의 새로운 진법을 공부하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공무 때문에 온 것이니, 이공자님도 남궁의 자제로서 저를 대해 주시길.”
아름다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남궁현이 입을 열었다.
“너는 의정군의 군사지만, 나는 공무로 온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져 가며 공사를 나눌 필요는 없지 않느냐?”
다소 한심해 보일지라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제갈아연이 다른 사람에게도 공무 운운하며 군사로서 대해 달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아연아.”
“없다면 보고가 급하니 먼저 가겠습니다.”
제갈아연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제갈준은 묘한 눈으로 누이를 보다가 남궁현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한 후 그녀를 따라갔다.
홀로 남은 남궁현은 제갈아연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입술을 깨무는 남궁현의 몸에서 거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누님.”
재빨리 제갈아연의 뒤를 따른 제갈준이 물었다.
“왜 그러신 겁니까?”
“뭐가.”
“껄끄러운 사이라는 건 알지만, 굳이 그렇게 냉담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었잖습니까.”
제갈아연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때 수업 중이라 잘 몰랐겠구나.”
“예?”
“본가가 한참 어려워졌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 줄 아니?”
잘 나가던 제갈세가가 갑자기 재정이 악화되고 사업체들이 문을 닫으며 휘청이던 때가 있었다.
아닌 말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육대세가, 아니 칠대세가의 말석이 제갈이었다. 그 전의 역사를 생각하면 상당한 추락이었다.
“남궁 때문이야.”
“……!!”
“정확히는, 당대 가주 남궁인 때문이야. 검제 어르신만큼의 재능이 없던 그는 무공이 아닌 정치로 가문의 힘을 키워 천하제일세가가 되기를 원했지.”
“그럼 설마?”
“그래. 우리 사업체가 문을 닫고 거래가 중지된 것들 모두가 남궁의 술책 때문이었다.”
제갈준의 눈이 깊어졌다.
함부로 분노의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무척이나 침착한 표정, 제갈준의 성장이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성토하지 않은 것은, 하나가 되어야 할 순간에 서로 싸워선 안 되기 때문이었어. 적어도 아버지의 생각은 그러했지.”
“…….”
“게다가 아버지가 무림맹의 군사를 맡으신 후로 남궁은 더 이상 우리를 건드리지 못했어. 그럴 수가 없지. 맹주가 나오지 않는 이상, 군사직이야말로 무림맹 최고 권력자나 다름이 없으니까.”
실제로 제갈문호가 군사에 오른 뒤, 각종 사업체와 문파들에서 제갈세가에 보화를 보내고 거래를 제안했다.
세상살이가 그런 것이다. 무너질 때는 어마뜨거라 하면서 손을 끊어 냈으면서도, 급부상하기 시작하면 모른 척 선을 대고 편승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께서 군사가 되기 전부터 우리를 도와준 가문이 있었어.”
“어딥니까?”
“연가야.”
제갈준의 눈이 흔들렸다.
냉담했던 제갈아연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물론 대놓고 지지하거나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도움은 없었어. 하지만 구주명가를 무너트린 호정을 필두로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원해 준 가문은 오직 연가뿐이야.”
“그랬군요.”
“호정은 내 친구야. 하지만 친구이기 전에 은인이지.”
“제 은인이기도 합니다.”
“응?”
제갈준이 미소를 지었다.
“잊으셨습니까? 첫 만남 때, 주루를 불태우는 악적들을 호정 형님이 잡으셨잖습니까.”
“그랬지.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우리는 호정의 도움을 받았구나.”
“그때 형님이 그곳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저나 누님이나 끔찍한 꼴을 당했을 겁니다.”
제갈아연이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오래도록 얽히긴 했네.”
“한데 그것뿐입니까?”
“응? 뭐가?”
제갈준이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남궁현이 보였다. 아직도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까워 보였다.
“남궁가주 때문에 선을 그었느냔 말입니다.”
“…….”
제갈아연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추운 날씨지만 하늘은 맑았다.
“남궁에서 혼사가 들어왔었어.”
“알고 있습니다. 남궁현 이공자였지요.”
“알면서 물어?”
“필요 이상으로 선을 그은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갈아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두지 않은 사람의 맹목적인 애정만큼 부담스러운 게 또 있을까.”
“…….”
“가문끼리의 문제를 떠나서, 나에게 연심을 품은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은 잔인한 짓이잖아. 이쪽은 함께 손잡고 미래를 그려 볼 마음이 전혀 없는데.”
“그렇습니까?”
“도달할 수 없는데도 희망을 주는 거, 정말 잔인한 거야.”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그래, 이 자식아.”
제갈준이 피식피식 웃었다.
“누님이 잘나긴 하셨나 봅니다. 하긴, 남매지만 누님 미모는 인정해요.”
“이제야 아셨습니까, 이 싸가지야.”
“미모 빼고는 다 아저씨 같아서 문제지만요.”
“닥치거라, 이놈!”
과장되게 호통을 친 제갈아연이 낄낄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제갈준의 입이 재차 열렸다.
“누님.”
“아, 또 왜!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그럼 호정 형님은 어떻습니까?”
“……!”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처럼.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제갈준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가시죠.”
“호정이라…….”
왠지 모를 아련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이내 제갈아연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 호정도 좋다고 하면 재미있게 살아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제갈준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뭐.”
제갈아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놈이 워낙 바빠서 말이야. 게다가 그놈, 네 말마따나 나를 완전히 아저씨 취급한다고. 이어질 가능성은 요만큼도 없네요.”
“……그렇습니까.”
덤덤하게 대답하면서도, 제갈준은 제갈아연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해석할 수 있었다.
‘호정 형님만 좋다고 하면……?’
그 말인즉, 제갈아연 본인은 연호정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당연한가.’
중원에 나도는 소문의 반만 사실이더라도 연호정은 정말 매력적인 남자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제갈준이 아는 제갈아연은 그 배경이나 명성을 보고 상대를 흠모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동생 입장에서 그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매형으로서 최고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른다. 내가 누님은 아니니까. 남녀의 생각도 몹시 다르다고 했으니,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그때였다.
“어?”
저 멀리서 누군가가 휘적휘적 걸어왔다.
“뭐야? 언제 들어왔냐?”
친근하면서도 익숙한, 지극히 자유분방하면서도 편안한 목소리.
연호정이었다. 연호정이 무성전 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반가움에 미소 짓던 제갈준은 문득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다른 누구를 만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 제갈준으로선 처음 보는 누이의 밝은 얼굴이었다.
“여어! 잘 있었어?”
제갈아연이 화통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여전하구만, 너는.”
“나나 너나 성격은 평생 못 고칠걸.”
“그런가.”
“그나저나 무림맹에는 뭐 노릴 게 있어서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소부주님?”
“아, 그만해.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구만.”
“지가 거기로 불쑥 가 버리고서는 누구한테 성질이야?”
“알았으니까 얼른 가서 보고나 해라. 뭔 보고인지 모르겠지만.”
“이따 뭐 해? 오랜만에 밥이나 먹을까?”
“너처럼 한가한 사람 아니다. 심심하면 파군각으로 와서 사람들이랑 수다나 떨어.”
두 사람이 낄낄거리며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
웃음 가득한 제갈아연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욱더 빛나 보였다. 마치 환한 얼굴에 별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연호정의 시선이 제갈준을 향했다.
“근데 댁은 뉘십니까?”
제갈준이 아차 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오호? 너 설마 제갈…….”
“…….”
“전?”
“준입니다, 형님. 그새 잊으셨습니까?”
“하하, 오랜만이네. 그간 어떻게 지냈어? 완전 어른이 다 됐구만?”
세 사람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누가 봐도 기분 좋은 미소를 띨 만한 선남선녀들의 대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기운이 나는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생기 넘치는 젊음 그 자체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웃고 떠들며 길을 걸어갈 때.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남궁현은 충혈된 눈으로 세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 붉게 물든 눈에 자리한 것은 무시무시한 질투와 강렬한 분노, 그리고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과격한 감정들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졌다.
삼교의 귀계로 알게 모르게 홍역을 앓았던 중원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지금.
무림맹에 새로운 맹주가 탄생할 이 시점에도 어둠은 몰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모이고 모두가 웃는, 그리고 모두가 바쁜 무림맹 속에서.
한 줄기 검은 의지가 서서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