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79화 (879/963)

879화. 권왕맹주(拳王盟主) (4)

“안 되겠습니까?”

“안 된다고 했잖소.”

“천하를 위하는 길입니다.”

“당신들 천하지 내 천하는 아니오.”

“우리 모두의 천하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려 하면, 그리고 그 위험 요소로서 노사(老師)를 해하려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놈들은 깨닫게 되겠지. 세상 칼잡이 중에 이렇게 무서운 사람도 있구나, 하고.”

“그리고 기어이 성공할 겁니다.”

“뭐라?”

“성공할 겁니다. 한번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노사를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또 그냥 넘기기 힘든 발언이군.”

“당연히 그냥 넘겨서는 안 될 발언이지요. 그들과 싸워 본 적 없는 노사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들어서 알고 있소. 뭐, 성천급 고수를 다수 보유했을 거라고?”

“그렇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도의도 없지요. 손잡고 상대를 죽이는 데에 망설임이 없을 것입니다.”

“흠.”

“묻겠습니다. 노사께서는 성천급 고수 둘 이상의 암습 앞에서도 생존을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

“…….”

“예, 어려울 겁니다. 심지어 그들은 셋, 넷으로도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요?”

“함께해 주십시오. 언제고 벌어질 전쟁이라면 함께 싸웁시다.”

“빌어먹을, 나는 이따위 전쟁에 한 발 걸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단 말이오.”

“천하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노사 자신과 제자분을 위해서라도 함께해 주십시오.”

“…….”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이거 뭐, 한번 놀러 왔다가 제대로 코 꿰이게 생겼구만.”

“…….”

“내 제안 하나 들어주면 한번 생각이나마 해 보겠소.”

“어떤 제안 말입니까?”

“……해 주시오.”

“그것은…….”

“마음에 안 들면 됐소.”

“자질부터 봐야 할 겁니다.”

“무공은 그런대로 쓸 만한 놈이오. 성질머리가 좀 문제긴 한데, 까놓고 말해서 무림인 중에 제정신인 놈이 있소이까?”

“…….”

“정점에 이르지 않아도 상관없소. 그것도 그놈 능력이고 복이지. 다만 나는 스승으로서 바다를 보여 주고 싶을 뿐이오.”

“바다라…….”

“바다에서 놀다가 파도에 휩쓸려 뒈질지, 물고기를 잡으러 다닐지, 아니면…… 바다를 제 것으로 만들지는 놈의 역량이오.”

“…….”

“어쩔 거요?”

“몇 명 더 있습니다.”

“음?”

“……한 사람들이 몇 명 더 있단 말입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제안이라고 한 것이오. 애초에 그걸 몰랐으면, 아무리 나라도 이딴 제안을 했겠소?”

“…….”

“고려해 보시오. 나도 고려해 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이고, 그래도 좀 재미있는 일이 생기려나 해서 왔더니만 말짱 꽝일세. 그 노친네는 칼질보다 주둥이 나불대는 걸 더 좋아하고, 후배 놈은 임무가 코앞이라고 몸을 사리고. 역시 복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인생이구먼.”

“싸워 보고 싶으십니까?”

“당연한 거 아니오? 적수다운 적수 못 만난 지가 수십 년이오.”

“하면, 제가 싸울 상대를 붙여 드리리까?”

“으잉? 누구? 댁이? 어, 그래도 되긴 하오. 나도 궁금했거든.”

“허허, 저 말고 한창 배움이 필요한 절대고수가 한 명 더 있습니다.”

“……?”

“대신, 그 싸움의 자리는 제가 정해도 되겠습니까?”

* * *

맹주 임명식을 하루 앞둔 날.

무성전에서 돌아온 연호정은 오늘도 파군각으로 향했다.

“왔느냐.”

“예.”

마침 연지평이 웃으며 상을 들고 왔다.

“안주도 왔습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언제 올지 염탐이라도 하는 거냐?”

“형님이 때마침 도착하신 겁니다.”

평상 위에 앉은 연호정이 부선을 보았다.

부선은 멀뚱멀뚱 서 있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해? 같이 와서 먹지.”

“아, 네.”

아직도 어색한 모양이었다.

파군각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부선의 처소였다.

사람들과 살갑게 대화하는 능력이 부족한 그녀였다. 특히 양천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이후, 예전보다 훨씬 더 무뚝뚝해졌다.

책임감 때문이었다. 비록 이제는 후계자가 아니지만, 그때 생긴 책임감은 아직도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어때? 지내기 불편하진 않아?”

“네, 괜찮아요.”

묘한 광경이었다.

부선의 나이는 연호정은 물론 묵비보다도 많았다. 강력한 내공으로 외양은 어려 보였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그녀를 성숙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런 사람이 한참 어려 보이는 청년의 말에 공손히 대답하는 광경은 상당히 묘했다. 그렇다고 시녀라고 보기에는 그녀의 기품이 상당했다.

“불편하면 말해. 팔성각에서 같이 지내게.”

“…….”

부선의 표정이 재차 어색해졌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일부러 여기서 지내게 해 달라고 아버지한테 부탁드렸어.”

“네, 들었어요.”

“이유를 알아?”

“모르겠어요.”

성격도 성격이지만, 부선은 연호정이란 사람 자체가 어려웠다.

처음 만났을 때도 워낙 딱딱하고 위압감 넘치던 그였다. 이런 인연으로 엮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적이 되었을 남자다.

그때는 연호정이 송곳니 큰 맹수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또 친근하기 그지없었다. 괴상하리만치 큰 변화였다.

“일단 한잔할까?”

“네.”

연위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시간을 두며 한 잔씩 마셨고, 연지평은 간만에 신이 났는지 연호정과 속도를 맞추었다.

뜻밖인 것은 부선이었다. 그녀의 음주법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빠르고 역동적이었다. 한 잔을 받으면 한 방울도 남기는 법이 없었고, 잔이 비면 곧바로 다시 채웠다.

그래서일까? 분위기는 편안했지만, 취기가 도는 시간은 빨랐다.

부선과 연지평 두 사람 다 알아서 주기를 배출하는 내공을 잠재운 채 마셨기에,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얼큰하게 취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 시진이 지났을 무렵 연지평은 완전히 곯아떨어져 버렸다.

“넌 괜찮아?”

“괜찮아요.”

별로 괜찮아 보이진 않았다. 동작이 이전보다 훨씬 더 굼떠졌고, 눈도 살짝 풀어져 왠지 졸려 보였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먼저 들어가서 자.”

“괜찮아요.”

“뭐, 그러든가.”

이 자리에서 말이 가장 많은 사람은 연호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위는 애초에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부선은 지금까지 스무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한 시진이 지나자, 부선은 꾸벅꾸벅 졸다 결국 잠이 들었다.

“신기하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연위가 부선을 보며 말했다.

“흑도에서의 삶은 아무래도 이곳과 다르겠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삶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물며 묵룡부주의 제자가 되려면 어지간한 수라장은 다 겪고 올라왔을 터, 한데도 이리 마음 편히 자는구나. 물론 편안해지길 바라긴 했지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음?”

“아버지께서 편안해지기를 바랐기에 이 녀석도 편안해진 거란 말입니다.”

연위가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사람 마음을 조종하는 술사도 아닌데, 내가 바란다고 저 친구가 편안해지겠느냐?”

“그리고 저도 바랐지요.”

“무엇을?”

연호정이 부선을 보며 말했다.

“이 사람, 평생을 긴장하면서 살았습니다.”

의식이 있을 때는 너라고 하더니, 잠이 들자 자연스레 호칭을 바꾸는 그였다.

“아버지 말씀대로 흑도의 삶은 치열하기 그지없습니다. 와중에 이 사람은 더했지요. 흑도는 백도만큼 보수적인 동시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칠기도 합니다. 여인을 한낱 성욕의 대상으로만 보는 놈들 천지지요.”

“음.”

“그런 환경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아득바득 살았을 테니 오죽 힘들었겠습니까. 내 고통이 제일 큰 고통이라지만, 솔직히 제 고통이 이 사람만 한지 묻는다면 섣불리 그렇다고 말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다.”

“이 사람은 편안한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후계자 자리를 마음 깊이 원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그러지 않으면 도태되어 죽을 테니, 어떻게든 버티며 이 악물고 살아간 것뿐입니다.”

“…….”

“더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만 그걸 모르고 있지요. 그래서 이곳에서 지냈으면 좋겠다고 한 겁니다.”

연위가 웃으며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었다.

“애비를 좋게 봐 줘서 고맙구나. 아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 보마.”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아버지께서는 그러고 계시잖습니까.”

“허허.”

“심검(心劍)이란 그런 것이지요.”

잔을 들던 연위가 멈칫했다.

여느 때처럼 편안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를 하다가 뜬금없이 심검을 입에 담는다.

연호정을 보는 연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심검이라니?”

“심검이란 무엇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그 의중이 궁금했지만, 연위는 대답부터 했다.

“마음으로 검을 다루는 경지다. 하여 검신일체(劍身一體), 검과 내가 하나 되어 검로(劍路)를 뜻한 대로 그릴 수 있다면 그 또한 심검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넓은 의미로 심검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제가 여쭙는 심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달리 무슨 심검이 또 있겠느냐? 심검이란 결국 정의하는 사람 나름의…….”

“마음으로 검을 다룬다는 것은 곧 마음으로 그 어떤 것도 다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외물인 검을 마음으로 다루니 어검(馭劍)의 완성이요, 검을 쥘 필요조차 없는 경지로 나아가 의지만으로 외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지가 바로 심검입니다.”

“……!”

“마음으로 사람을 벤다…… 꿈과 같은 얘기지만, 이미 아버지께서는 그와 유사한 일을 벌이셨습니다. 귀군과 전투를 벌였던 신화교의 괴인, 그리고 마군의 의지와 마음을 베어 내셨지요.”

“그것은…… 다르다. 사람을 벤 것이 아니라, 의지를 꺾어 버린 것에 가깝다.”

“아버지보다 까마득하게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의 마음을 꺾어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가만히 연위를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버지의 능력이 위대하다고 찬양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심검을 이룬 아버지의 변화를 입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

“심검이 위험한 까닭은 개인의 의지로 외물을 넘어 타인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神)의 경지라 하는 것이고, 모두가 바라 마지않으면서도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는 것이지요.”

“……!”

“욕설, 폭언, 칭찬, 격려, 폭행, 다툼, 정치 등등 말과 행동이 필요치 않습니다. 심검이란 그런 것입니다.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며 이끄는데, 굳이 검을 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네 말은…….”

“제가 아버지께 이 사람을 보낸 것은 아버지께서 이 사람을 잘 보듬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연호정이 부선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고개를 까딱이던 부선이 살짝 고개를 들더니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무리 자리가 편하다고 이렇게 술에 취해 고작 하루 본 사람 앞에서 잠을 잘 정도로 만만한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이 아닙니다.”

“…….”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심검입니다. 정확히는, 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다는 아버지의 의지가 깃든 것이지요.”

연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심검으로 누군가를 그리할 생각이……!”

“의식은 무의식을 이기지 못합니다.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순간, 아버지의 진기는 소모되고 심력은 극도의 타격을 받겠지요.”

순간 연위가 떠올린 것은, 심검의 일참(一斬)으로 황궁에 침입한 난적들을 베었을 때였다.

엄청난 내공 소모는 물론 상단전의 무리한 운용으로 코피가 터졌을 정도였다.

“이것은 사람에게 허락된 힘이 아닙니다. 하여,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어야 그 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지금 제 눈에는, 그 위대한 심검이 아버지의 정신과 마음을 좀먹는 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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