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화. 권왕맹주(拳王盟主) (5)
후우웅.
차디찬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희롱하고 지나갔다.
연호정이 겉옷을 벗어 부선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가만히 아들을 보던 연위가 툭 던지듯 물었다.
“내가 깨달은 심검이, 나의 정신과 마음을 좀먹고 있다 하였느냐?”
“예.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만.”
“그것이, 네 눈에는 보인다고 하였더냐?”
“이제 보이게 되었습니다만, 그전에도 막연하게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연호정이 조심스레 자신의 잔을 채웠다.
물끄러미 아들을 보던 연위가 잔을 비웠다. 연호정이 연위의 잔을 다시 채웠다.
“무극에 빨리 오르라던 말이, 그것이었느냐?”
“예.”
“…….”
“저뿐만이 아니었을 텐데요. 검제 노선배와 대담을 나누셨다고 들었습니다. 노선배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심검지도(心劍之道)에 이른 비범한 수행자께서, 어찌하여 아직 인간의 육신을 탈피하지 않으셨소?’
‘정신과 육체는 하나요. 무서운 의지로 그 간극을 메우고 있지만,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외다.’
남궁승은 말했다. 그 지고한 깨달음에 발맞춰 육신 또한 그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필경 지닌 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연위도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이 심검이라 불리는 깨달음이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좀먹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지 못했다. 그저 없어져 버릴 수 있는 보물이라 생각했을 뿐, 그것이 자신을 망가트릴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애비는……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멀쩡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멀쩡하지 않아요. 멀쩡하게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아들의 대답은 단호했다.
언제, 어떤 순간이라도 아들의 일 처리는 막힘이 없었다. 똑똑하기만 할 뿐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는 반쪽짜리 천재들과 달리, 아들은 파격적이라 할 만한 추진력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누구보다도 핏줄을 위하는 녀석이기도 했다. 하물며 전생에서 가문이 무너지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아직도 품고 있었기에, 애비인 자신 앞에서 이리 공격적으로 말하는 일은 없었다.
‘뭔가가 있긴 있구나.’
자신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는 변화.
연위는 아들을 믿었다. 아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깨달음을 제쳐 두고 무(武)의 경지만 보면, 자신을 한참이나 상회하는 실력자가 연호정이었다.
“네 눈에 그리 보인다고 하면, 필경 그런 이유가 있겠지.”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아직 멀었구나.”
물끄러미 연위를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왜 묻지 않으십니까?”
“음? 무엇을 말이냐?”
“정신과 마음 어느 부분에 어떤 이상이 있는지, 멀쩡하지 않음을 못 느끼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왜 묻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아버지.”
“……?”
“전쟁, 안 끝났습니다.”
“……!!”
왜일까?
자신도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을 아들의 입으로 들었을 뿐인데, 연위는 뒷골이 뻐근해질 정도의 충격을 느꼈다.
가만히 연위의 얼굴을 살피던 연호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감히 아버지의 속내를 알아보려 하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버지를 위한다는 변명하에, 제가 보고 있는 것을 말씀드려 보려 합니다.”
“…….”
“아버지는 꿈을 이루셨습니다.”
“꿈……?”
“중원 천하, 어디에도 안전한 곳 따위는 없지요. 백도와 흑도를 나눌 필요 없이 세상은 몹시 위험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내 목숨을 노릴지 모르는 환경이니, 그런 곳에서 자신의 신념을 부르짖으며 생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더냐?”
“아버지는 그런 세상에서 멋지게 스스로를 증명하셨습니다. 연가의 이름이 중원 유수의 명문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까닭은, 아버지의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
“하지만 아버지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부모가 품을 수밖에 없는, 그러나 누구도 내 불안의 깊이를 모를 수밖에 없는 걱정이지요.”
“걱정…….”
“저와 지평입니다.”
“……!”
연위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무림세가의 자식으로서 세상에 나가 자신을 증명해야 함은 숙명입니다. 그러나 이 무림이라는 세상은 지극히 위험하여, 조금만 잘못해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수 있지요.”
“…….”
“저는 그런 세상에서 저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평 역시, 어리지만 일가(一家)를 이룰 충분한 준비가 되었지요.”
재능과 실력도 뛰어났지만, 이미 연위는 연지평을 소가주로 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말하자면 장남인 연호정은 물론 차남인 연지평까지 이미 충분히 성장한 것이다.
평생의 반려를 떠나보낸 연위에게 있어, 자식들을 건실하게 키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선조들이 쌓아 올린 가문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지상 과제는 자식들을 잘 키워 내는 것이다.
운이 좋게도, 연위의 두 아들은 남들보다 훨씬 빨리 스스로를 완성해 갔다. 더 이상 아비의 품에 있을 필요가 없단 말이다.
‘꿈을 이루었다.’
연위의 꿈이 무엇이었나.
천하 최강의 검사였던가? 아니면 저 남궁의 검제처럼 검도(劍道)에 인생을 바친 구도자의 삶을 원했던가?
그런 것은 연위의 목표가 아니었다. 인생의 이 막이 찾아오면 그제야 한번 노려 볼 목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내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이 되리라.
훗날 먼저 이승을 뜬 아내를 만나, 우리 자식들이 저리 멋지게 컸다며 호탕하게 웃으며 기뻐하리라.
그 꿈을 달성하지 못하면 자신의 인생은 아무 가치가 없다. 연위에게 있어 연호정과 연지평은 존재 자체가 일생의 꿈과 같은 것이다.
‘내가 왜 검을 갈고 닦았을까.’
연위는 검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그 검보다 내 자식들을 만 배는 더 사랑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에게 검과 무공은 수단이었다. 내 자식들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세상은 어지러웠다. 그전에는 몰랐던 천하의 위기가, 아들이 세상에 나가 외적들과 싸운 연후에야 코앞까지 닥쳐왔음을 깨달았다.
연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목숨 걸고 검을 연마한 것은, 천하 이전에 그런 거친 세상에서 내 자식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온했지요?”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림맹에 재입성한 뒤, 저는 실로 오랜만에 이토록 평온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다소 나쁘게 말하면 재미없을 정도의 일상들로 가득했지요.”
“…….”
“하지만 아버지. 그 평화로운 무림맹에, 무수히 많은 강자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공공대사님은 무극에 올라 초대 맹주가 되려 하시고, 생각도 못 한 신마림의 인재도 찾아왔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삼교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음험하고 험악하기 그지없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지요. 말하자면 지금의 평화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 것입니다.”
연위의 주먹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도 그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이미 이루셨지요.”
“그 말은…….”
“예.”
“…….”
“일생의 목표를 완수했으니, 이것으로 아버지의 행보는 끝났습니다.”
“……!”
“하지만 첫 목표가 완수되었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셔야 합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호정이 잔을 비웠다.
“타인의 정신과 마음을 벤다는 것은 곧 타인의 정신과 마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
“자신의 정신과 마음마저도 해치지요. 세상 모든 깨달음이란 거울과 같으니까요.”
연위의 얼굴에 심란함이 일었다.
아들 말마따나, 자신에게 이상이 있음을 알았다면 어떤 이상이 있는지 물어봐야 했다. 그리고 고치려 해야 했다.
하지만 연위는 연호정에게 그것을 묻지 않았다.
괜찮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기분이, 지금의 이 삶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두 아들이 보란 듯이 잘 컸으니, 이 이상의 만족이 없다. 지금 연위에게는 일생의 꿈을 이뤘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본래 연위의 성격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
그가 이룬 심검은 지고한 영향력만큼이나 위험하기 짝이 없어, 그 자신이 가장 원하는 현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내 검이, 만족해 버린 나의 마음을 알고 그 이외의 것을 모조리 베어 버린 것이다.
“그 힘은 무극에 오르지 못한 자가 다룰 것이 아닙니다. 제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아버지께서 무극에 오르시면 폭주하는 심검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더하여 무의식적으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마검(魔劍)이 되어 버린 능력은, 아마 더 이상 구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연호정의 미소를 지었다.
“그 통제되지 못해 저 혼자 자라기 시작한 못된 깨달음을 잃는 아버지가, 저는 보고 싶습니다.”
푸스스스.
연위가 쥔 잔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내공이 발출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심검의 기운이 잔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어지러운 연위의 심경을, 자괴감을 읽고 손에 쥔 것을 없애 버리려 한 것이다.
연위는 깜짝 놀라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심검이 심통을 부리는군요.”
“이것이……?”
“점점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아니, 통제조차 하지 않으셨겠지요. 깨달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테니까요.”
“……!!”
“아버지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인으로서, 이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지요?”
“…….”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 맹주 임명식이로군요.”
“…….”
“들으셨겠지만, 임명식은 지극히 짧고 조촐하게 이뤄질 겁니다. 대사님다운 처사지요.”
“…….”
“임명식이 끝난 후, 작은 축제 하나가 있을 겁니다. 무림인들에게 어울리는 멋들어진 축제지요. 그리고 그 축제의 주인공은 저와 도제 노선배님입니다.”
연위가 놀란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 축제에서, 이 멋들어진 장남이 보여 드리겠습니다. 강함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리고 완벽하게 통제되는 힘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고개를 숙인 연호정이 이내 몸을 돌렸다.
파군각을 나서기 전에 남긴 그의 목소리가 한 줄기 노래가 되어 연위의 귓가에 맴돌았다.
“잊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강동 벽산연가의 가주, 판관검 연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