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81화 (881/963)

881화. 권왕맹주(拳王盟主) (6)

성천십삼좌(聖天十三座).

당대 강호에서 전설로 추앙받는 절대고수들을 칭함이다.

한 세대에 한 명 나기도 힘들다는 무극의 고수들이 무려 열셋이나 난 이 시대는 틀림없는 무림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삼백 년 전, 혈교지란이 발발했을 때도 당대 강호처럼 무수히 많은 무극의 고수가 출몰하여 비인외도(非人外道)의 극치를 걷는 혈교의 마인들로부터 천하를 지켜 냈다.

당시 그 많은 무극의 고수를 이끌고 싸운 사방무제는 독보적인 천하제일인으로서, 중원을 위협하는 혈마인(血魔人)들을 상대로 지닌 바 막강한 무력을 선보여 중원의 승리에 이바지하였다.

그것을 달리 말하자면 혈교 측에서도 중원에 비할 만한, 혹은 그 이상의 무극수(無極手)들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혈교가 얼마나 막강한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지금.

천하는 또 한 번 무수히 많은 천재를 탄생시켜 성천이라는 이름 아래 또 한 번의 전설을 만들었다.

하지만 삼백 년 전의 역사를 생각하면, 당대 그 많은 천재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달리 생각해 볼 만하다.

천하의 기운은 강성과 쇠락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음(陰)이 강하게 일면 그것을 해소하려는 양(陽)이 고개를 쳐들고, 바름이 지나치면 또다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악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즉, 중원의 대지에 이토록 많은 무극의 고수가 났다는 것은 곧 그들과 대적할 만한 또 다른 무리가 숨을 죽이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바.

세상의 이치는 단 하나도 과함과 모자람이 없는 터라, 당장은 고금에 비할 것이 없어 보여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도태의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다.

세상은 그러했다. 무림은 그러했다.

연호정은 비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王)의 직위를 얻었다. 그로 인해 성천십삼좌의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공공대사가 천하를 위해 번뇌를 받아들여 맹주위(盟主位)에 오르려 하니, 이미 모든 것을 깨닫고 있던 그는 단숨에 무극을 돌파하여 권신(拳神)에 이은 소림의 두 번째 성천이 되었다.

사람들은 공공대사의 빼어난 무공과 인품을 존경하여, 그에게 권왕(拳王)이라는 별호를 붙여 줌과 동시에 새로운 성천으로 올리길 주저하지 않았다.

기실, 무극에 오르고도 치열한 단련으로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성천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간 억눌렀던 모든 것을 폭발시킨 공공대사는, 단 한 순간에 크나큰 격차를 무시하고 삼군에 비견될 만한 무력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검제 남궁승과 도제 종리백, 백병신군 막원의 증언으로 확실시되었다.

다만 무림맹주라는 권위 있는 자리에 올랐으니, 사람들은 그에게 군(君)이 아닌 왕의 칭호를 안겨 주었다.

권왕맹주(拳王盟主) 공공대사.

이로써 성천십삼좌가 십사좌(十四座)라 불릴 순간이 왔지만, 곡경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발언을 터트렸다.

“황궁 뇌옥에 갇힌 혈옥마군(血玉魔君)은 모든 내공이 소실되어 폐인이 되었소. 재기는 불가능하니, 그는 더 이상 성천이 아니오.”

다른 누구도 아닌 같은 삼군의 일인이요,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온 자의 발언이었다. 그 말의 무게는 황제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바, 신뢰의 깊이감으로 따지자면 최고 수준의 증언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성천의 열세 자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왕이 다섯이요, 군주가 둘이 남아 세부적인 칭호가 새로이 개편되었다.

일신(一神), 이선(二仙), 삼제(三帝), 오왕(五王), 그리고 흑백의 쌍군(雙君)이다.

고고하게 발전한 중원의 무(武)가 여러 천재를 개화시켜 열세 자리의 전설을 만들었으니, 누구 하나가 빠져야 비로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바다.

새로운 성천이 된 공공대사.

성천의 이름과 함께, 초대 무림맹주 임명식이 끝이 났다.

빼곡히 모인 백도 무림의 고수들이 초대 맹주를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무림맹의 중심을 잡아 줄 존재가 났으니, 앞으로 무림맹의 일 처리도 더 빠르고 확실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전, 검제와 패왕이 비무를 벌였던 그곳으로 다시 많은 사람이 모였다.

* * *

“축제라…….”

묵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이게 정말 축제가 맞나요?”

“축제지.”

당관이 어깨를 으쓱였다.

“천하 무림인들에게 있어 강자들의 비무는 그 자체로 배움이요, 즐거움이다. 하물며 성천에 이른 초고수들의 비무라면 최고 중의 최고라 할 만하지.”

“아무리 그래도…….”

“비무 축제는 왕왕 있었다. 지역 문파의 경삿날에도 여러 고수가 자신의 무(武)를 뽐내며 축제의 열기를 더하곤 하지.”

“그, 그렇군요.”

“무림맹 정도가 되니까 비무자들의 신분도 무시무시한 거다. 확실히 맹주님도 보통이 아니로군.”

당관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공공대사를 ‘맹주님’이라고 불렀다.

호칭이란 불러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권위를 상실하기 마련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위계가 확실한 세상에서 살다 온 당관은 누구보다 빨리 공공대사를 맹주로 인정했다.

“그나저나 용케 도제 노선배님을 끌어들이셨군요.”

강량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전에 한번 슬쩍 뵙기로는 이렇게 많은 눈이 있는 곳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았는데.”

막원이 피식 웃었다.

“좋아하지 않는 걸 넘어서 싫어할 성격으로 보였다. 당신 자신의 무(武)가 아니면, 천하 어떤 일에도 관여치 않는 성격 같았지.”

진양이 툴툴거렸다.

“진짜 막 나가는 분이시네.”

“그 정도로 막 나가기 때문에 자신의 무공을 최고의 반열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거겠지. 역사에 남을 업적을 이루는 사람들 대다수가 바로 그런 벽창호들이거든.”

“허어.”

“그나저나.”

막원이 눈썹 위에 손을 올렸다. 서늘한 날씨였지만, 내리쬐는 햇살이 상당했다.

“자리 한번 좋구만.”

막원의 시선이 향한 곳, 비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건물 최상층은 탁 트여 있었다.

그리고 그 트인 공간에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맹주인 공공대사를 중심으로 군사와 봉공들, 그리고 장로들이 자리했다. 불편한 자리가 싫다고 굳이 여기까지 온 당관을 제외한 모두가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의심할 나위 없는 무림맹의 수뇌부들로, 맹주가 선출된 지금에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이 편안한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무대에서 가까운 건물들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고개를 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도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무림맹의 여러 전투 부대원들은 멀찍이서 경계를 섰다.

일전 검제와 패왕이 겨루었을 때 상당한 범위가 초토화되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두 배는 더 넓은 공간을 비무대로 삼았기 때문에, 그만큼 투입된 부대원들의 숫자도 많았다.

“여하간, 아주 흥미진진한 싸움이 되겠구만.”

막원이 고개를 돌렸다.

한쪽 구석에 연호정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딱히 운공이나 명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자세로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막원이 물었다.

“왜? 긴장되시는가?”

“예?”

“긴장되냐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긴장되지요. 상대는 ‘그’ 도제입니다. 검제 노선배님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천외천의 강자라고요.”

“하지만 너도 그때보다 성장하지 않았더냐?”

“물론 그렇지요. 근데 어째 그때보다 더 힘든 싸움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성 문제가 있을 것 같다.”

황룡을 깨달은 지금의 연호정은 아직 그럴듯한 부법(斧法)을 만들지 못했다.

말하자면 지금 그가 가진 최고의 무공은 권법과 장법 등의 백타술이란 것이다. 원체 싸움에 이골이 나서 그마저도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지만, 병장기‘까지’ 써먹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어떻게든 좋은 싸움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큰 걸 배울 수도 있을 듯하고요.”

그때였다.

와아아아!!

저 멀리 비무대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왔군.”

막원의 얼굴에 작은 긴장이 떠올랐다.

“저런 걸 싫어하는 양반이 먼저 비무대에 올랐다. 작정하고 왔다는 것이겠지.”

“말이 비무지 어쨌든 승부가 아니겠습니까. 작정하지 않으면 잡아먹히지요.”

연호정이 자세를 풀고 일어났다.

지금껏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있던 제갈아연이 물었다.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상대는 도제 노선배님이야. 엄청난 강자라고.”

지금껏 연호정이 맞붙었던 강자들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만 제갈아연은 연호정이 저만한 고수와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긴장할 만도 했다.

연호정이 손날로 제갈아연의 머리를 쳤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너도 얻어 갈 수 있는 거 다 얻어 가라.”

“아파, 이놈아!”

“너도 무인이잖아. 나를 친구로 보지 말고 배울 게 많은 고수로 봐야 해.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제갈아연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연호정이 부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부님의 무공도 쓸 거야.”

부선의 눈이 반짝였다.

“흑사자기요?”

“내 무공, 사부한테 배운 무공 다 써먹을 거다. 그러고도 이기기 힘든 상대야. 그러니 잘 지켜보도록 해.”

“네.”

연호정이 또 한 번 고개를 돌렸다.

많은 사람이 그 주변에 있었다. 묵비, 강량, 진양, 막원은 물론 제갈 남매와 부선까지.

심지어 저 멀리서 부대원들을 통솔하는 모용우도 자신을 걱정할 것이고, 점창파 무사들과 함께 있는 패율 역시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많구나.’

연호정은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그때와 같지만 달라.’

흑암제.

흑도제일인이라 불리며 천하를 휩쓸었던 당시에도 그의 곁에는 많은 전우가 있었다.

하지만 싸우기만 바빴던 그 시절의 그는 전우들을 기억해야 할 존재로 인식했지, 인생의 기쁨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나는 지금 천하 한복판에 서 있다.’

우우우웅.

황룡이 기지개를 켰다.

분명하고도 확실한 인식 한 조각이 그의 기분을 새롭게 일깨웠다.

그것은 분명 작지만 확실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황룡기(黃龍氣)가 전신으로 치달으며 그의 생기를 크게 증폭시켰다.

“선배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친구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시원하게 즐기다 와라.”

“뒈지지만 마라. 힘들겠지만.”

“형님! 임무가 코앞인데 다치면 안 됩니다!”

“힘내요.”

열화와 같은 성원을 등에 업은 연호정이 거침없이 비무대 위로 올랐다.

와아아아아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함성.

궁극의 경지에 오른 연호정조차, 많은 사람의 함성에 몸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오셨는가.”

종리백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짜증이나 부담감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맞상대로 부족함이 없는 강자를 앞에 두고 크게 흥분한 것 같았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통성명이나 포권지례 같은 허례허식은 집어치우겠습니다.”

“싸움에 아무 필요도 없는 것들이지.”

“다만, 비무에 앞서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노선배님은, 오직 노선배님 자신을 위해 이곳에 오르셨습니까?”

“물론일세. 나는 언제나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야.”

“그렇군요.”

“다만…….”

종리백이 한곳을 힐끔거렸다.

무수히 많은 인파 속에 유독 그의 눈에 띄는 한 사내가 있었다.

“이제 슬슬 제자 놈도 졸업을 시켜야 해서 말일세. 이것저것 얻어 갈 수 있다면 좋겠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가 저 멀리 봉공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굳은 얼굴의 연위가 있었다.

“자, 그럼.”

쿵! 쿵!

두 주먹을 맞부딪친 연호정이 곧바로 자세를 낮추었다.

“시작해 볼까요?”

스르릉!

참악도를 꺼내 든 종리백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도풍(刀風)이 휘몰아쳤다.

“즐거운 싸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먼.”

파아아악!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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