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6화. 창조의 순간은 짧고도 영원하다 (5)
우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패왕과 도제, 최고의 신진(新進)과 최강의 중견(中堅)이 벌인 화끈한 싸움은 모두를 전율케 하기에 충분했다.
맹의 평범한 무사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공의 경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두 초고수의 공방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귀청을 울리는 함성 속에서, 연호정이 말했다.
“저의 패배입니다.”
“아니, 나의 패배일세.”
“저는 더 이상 선배님을 공격할 힘이 없습니다.”
각자 보여 줄 수 있는 수단은 다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누가 끝까지 버티느냐, 누가 상대에게 더 많은 피해를 주었느냐다.
그 부분에서 연호정이 한발 뒤졌다. 황룡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본래 내공량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석해 보자면, 진기를 극도로 세분화하여 운용해 본 경험이 없는 무공을 쓴 탓에 본래보다 더 많은 내공 소모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연호정의 어설픔이 문제였을 것이다.
종리백이 고개를 저었다.
“내 무공을 다 받아 냈다는 이유로 나의 패배라고 한 게 아니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나와의 싸움에서 본래 갖고 있던 것들을 추려 한발 나아갔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보이셨습니까?”
“안 보일 수가 없지. 직접 상대한 게 나인데.”
“……그렇군요.”
“깨달음을 하나로 녹이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한 나의 우위였지. 하나, 깨달음을 녹인 후를 생각하면 자네와 나의 실력 차이는 무(無)에 가깝네.”
동수(同手)다.
연호정은 성천삼제 중 하나인 도제와 동수를 이룬 것이다.
실제로 황룡공을 더 가다듬고 이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을 완벽하게 체득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강력한 무공을 보여 줄 수 있을 터다. 그걸 감안하면, 삼제와는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가늠하기가 진정 힘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승부라는 것이 붙기 전에는 모르는 거라지만, 서른이 되기 전에 삼제와 목숨을 건 대결이 가능한 수준이라면 가히 전무후무(前無後無)라 할 만했다.
“게다가 자네는 내 칼을 뺏었네. 뭐, 제자에게 주었으니 이제는 내 칼도 아니지만.”
종리백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일신, 이선과 싸운다 해도 내 손에서 칼을 뺏을 수는 없을 거라고 자부했네. 한데도 자네는 나의 어도술을 끊어 내고 칼의 주인을 바꾸어 버렸어.”
“…….”
“내 생전에 그런 깨달음은 처음이네. 이것은 분명한 나의 패배일세.”
패배의 의미를 어느 쪽에 두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만, 도제 종리백 인생에 있어 승부에서 패한 적은 있어도 칼을 빼앗긴 적은 없었다.
이는 패배 이상의 굴욕이라 할 만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이립도 안 된 신진 고수다.
굴욕이지만, 또 다른 깨달음을 목도한 무인으로서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의 패배.
패배했지만, 이 세상은 아직 무수한 깨달음을 감추고 있기에 충분히 살아 볼 만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상대.
“그리 말씀하신다면.”
후웅.
두둥실 떠오른 참악도가 부드럽게 종리백의 앞으로 날아갔다.
종리백이 칼자루를 쥐자,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자랑스러운 승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칼을 역수로 쥔 종리백이 마주 포권했다.
“큰 배움이었네. 훗날 기회가 되면 또 한 번 붙어 보세.”
“저야 영광이지요.”
두 고수가 서로에게 예를 취하매, 터져 나오는 함성이 두 배로 커졌다.
그때, 공공대사가 하늘을 날아 비무대 중앙으로 내려왔다.
빠르게 하강하는데도 그 몸짓이 무척이나 여유롭다. 마치 본래 하늘을 날 줄 아는 사람인 듯 안정적으로 땅에 내려선 공공대사의 신법 경지는 가히 천외천이라 할 만했다.
소림의 능공천상제(凌空天上梯)였다.
공공대사가 반장례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맹주 임명식 날 본 맹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궈 주신 두 분께 맹주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함성이 더더욱 커졌다.
비무대는 박살이 나 버렸지만, 그곳에 무림의 전설로 추앙받는 성천의 고수가 무려 셋이나 있었다.
천하 어디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겠는가. 구름 위 신선처럼 전설로서 전해지는 이름들이 비로소 지상으로 내려왔으매, 맹의 무사들은 이제야 그들과 같은 세상을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저녁에 조촐한 만찬이 있을 예정입니다. 도제 선배님께서도 부디 참석을…….”
“선배가 아니오.”
“……?”
종리백이 보란 듯이 참악도를 어깨에 걸쳤다.
“만족스러운 축제였소. 기대 이상이었지. 그러니 나 역시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다.”
공공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그 말씀은?”
“이제부터 나 종리백은 백도 무림 연맹의 무상(武相)이오.”
함성이 워낙 커서, 종리백의 말을 들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연호정이 웃으며 공공대사를 보았다.
“축하드립니다, 대사님.”
“자네에게 축하받을 일은 아니지 않나? 함께 기뻐해야지.”
흑과 백, 동맹으로서 함께 나아가는 사이가 아니냔 말이었다.
연호정이 크게 웃었다.
“예, 대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차분하기 그지없던 공공대사도 결국 큰 웃음을 터트렸다. 종리백의 결정은 그에게 있어서도 놀라움이자 기쁨이었던 것이다.
초대 맹주가 선출됨과 동시에 성천의 삼제 중 하나가 무상으로 들어온다. 그 자체가 무림맹의 명성을, 맹주의 위상을 크게 드높여 줄 것이다.
명성이 높아져서 기쁜 게 아니라 걱정거리가 사라지고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모여 기쁘다. 그래서 공공대사의 웃음은 사심 없는 청아함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사위를 채우던 함성이 잦아들 때쯤.
“소부주께서는 이만 거처로 돌아가시게.”
연호정이 공공대사를 보았다.
공공대사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혼자서 공부할 게 있을 듯한데.”
저녁 만찬 초대에 굳이 연호정을 들먹이지 않은 것엔 이유가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빠지겠습니다.”
“언제든지.”
그렇게 비무대에서 내려온 연호정을 일행이 반겨 주었다.
“괜찮아요?”
묵비의 물음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괜찮지 않아. 따끔따끔하니 죽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치솟는 황룡기가 이미 상처를 봉합하고 있었다.
쏟아 낸 피를 불릴 수는 없어도, 육신을 빠르게 원상태로 돌리는 것은 가능하다. 오히려 하나의 기운으로 집약된 황룡은, 사신기보다 더 빠르게 연호정의 몸을 수복하고 있었다.
“이건 뭐, 진짜 괴물이 다 됐군.”
팔짱을 낀 당관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어렸다.
그 역시 근래 얼마간은 아버지가 펼치는 무공을 보며 강한 자극을 받곤 했다.
한데 그마저도 본 실력의 일 할이나 내보인 것뿐인 듯했다. 작정하고 싸우는 성천 고수들의 힘은 천재지변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그 한마디로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욕 먹이고 있는 거다.”
“제 문제는 제 문제일 뿐입니다.”
당관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연호정이 자신보다 강한 거야 진즉 알았지만, 그 힘의 실체를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오늘에서야 알았다. 연호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경지에 올랐는지.
투지가 샘솟았다.
아버지와는 멀고도 먼 사이였지만, 연씨 부자들과는 그렇지 않았다. 첫 만남은 최악이었을지언정 지금은 무림에서 이처럼 가까운 사이도 없었다.
그중 아들뻘인 후배 녀석이 이처럼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질투도 나고 욕심도 났다.
“하면 저는 먼저…….”
그때였다.
저 멀리서 막원이 다가왔다. 지금 잠깐 보이지 않았는데, 어딜 다녀온 모양이었다.
“여, 동생.”
“형님.”
“비무 잘 봤어. 피가 끓더구만.”
“아닙니다. 아직 멀었지요.”
“그런 것 같더군.”
막원이 피식 웃으며 엄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팔성각에 광룡부가 있었지. 그걸 들고 오는 길이라네. 저 뒤에다 뒀어.”
“……?!”
“몸이 꽤 엉망이 되긴 했지만, 쥐고 휘두르기에 부족함은 없겠지?”
모두가 깜짝 놀랐다. 혹시 호승심을 느끼는 막원과 또 한판 붙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읽으셨습니까?”
“무리하지는 마라. 새 신공이 불세출의 무공이라고는 하나, 그걸 품고 있는 우리의 몸은 결국 사람의 그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묵비가 물었다.
“또 싸우려고요?”
“그래야지. 나 자신과.”
“네?”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안 그러면 잊어 먹는다.”
그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막원 말대로였다. 대기실 밖에 시커먼 광룡부와 흑백쌍룡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쌍룡부는 허리에, 광룡부는 어깨에 멘 연호정은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
모두가 당황한 눈으로 대기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진양이 막원에게 물었다.
“무슨……?”
“새로운 깨달음은 얻은 동생의 무공은 아직 거칠어. 놀라운 안목으로 권장보(拳掌步) 세 가지 무공을 만들었지만, 섬세함에서 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일동은 경악했다.
도제 종리백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싸운 연호정이다. 그런 그의 무공이 아직도 섬세함에서 뒤지고 있단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거야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만, 문제는 병장기술이지. 온갖 무공에 능하다지만, 그래도 호정의 주 무공이라 하면 도끼질이니까.”
막원의 눈이 깊어졌다.
“종리 선배의 거도술은 도끼질의 그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 그걸 몸으로 겪은 호정은, 비로소 새로운 부법(斧法)을 만들 단초를 얻은 것이야.”
한 번 싸웠다고 끝이 아니다. 무도(武道)란 끝이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여정인바. 폭풍우와 같은 상대와 싸웠던 그는, 이제 자신이 해일을 일으킬 수 있도록 또 다른 힘을 손에 넣으려 하는 것이다.
“하여간 못 당하겠어. 무공은 수단일 뿐이니 뭐니 말은 많지만, 저렇게 무공에 열성적인 녀석도 달리 없을 거야.”
* * *
홀로 공터에 온 연호정은 순간 시야가 컴컴해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띵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밑바닥까지 쏟아부었던 황룡기가 치솟으며 연호정의 정신을 맑게 붙잡아 주었다.
연호정이 심호흡을 했다.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그 안에 최소한 기틀은 만들어 놓는다.’
훅!
힘차게 한 발 내디딘 그가 광룡부를 휘둘렀다.
후우우웅!
공기를 가르는 묵직한 도끼.
언월도보다도 다루기 힘든 초중량 병기가 산뜻한 움직임을 발한다.
‘칼질 한 번에 모든 것을 건 노선배처럼, 내 무공도 그래야만 한다.’
복잡할 필요가 없다. 복잡해서도 안 된다.
단순하지만 확실하게, 빠를 필요도 없이.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도록.
광룡부를 휘두르는 연호정의 얼굴은 어느새 환희로 물들어 있었다. 새 무공을 창안하는 기쁨에 힘든 것도 잊은 것이다.
그리고.
스륵.
어느새 공터 한옆에 도착한 연위는 신명 나게 도끼를 휘두르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직 무(武)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건 구도자처럼, 그러면서도 그 힘든 과정 자체를 즐기는 천재처럼.
번쩍! 번쩍!
햇살에 번뜩이는 거대한 도끼도, 주인의 마음처럼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첫 목표가 완수되었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셔야 합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을 품에서 떠나보낸 아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자식을 보며 살았던 부모가, 자식을 보낸 후 되찾은 자신만의 기쁨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에 일생을 바쳤는가.
‘검(劍)…….’
연위가 눈을 감았다.
번쩍!
창천을 밀어젖히는 한 줄기 광채가 연위의 몸에서 솟구쳐 올랐다.
치이이이이이익!!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대량의 진기.
수백, 수천 자루의 검이 일순간 네 배, 다섯 배는 더 커지고 선명해지며 일제히 환호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판관검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