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화. 마도의 고향 (3)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이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모용군의 이 당당한 배포만큼은.
양천은 모용군의 그 말투에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이전에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양천의 뒤에 시립한 백서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흑도 연맹의 주인이요, 성천의 일좌를 차지한 절대고수 앞에서 저리 뻣뻣한 모습을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백서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섣불리 언사를 조심하라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얼마 만이지?”
“모르겠소. 꽤 많은 시간이 흐르긴 했소.”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말이야. 자네가 내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들고 거래를 하자며 뻗대던 게.”
“지나고 보면 빠르지.”
“내 제자 놈 덕분에 뒤통수가 제법 얼얼했었지, 아마?”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눈알이 다 튀어나오는 줄 알았소. 세상에 그런 식의 차도살인도 존재하는구나, 했지.”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상대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려 보았는데, 생각보다 몹시 유연하게 대응하지 않는가.
‘확실히 달라지긴 했군.’
모용군의 변화는 서신으로 받아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양천은 그 말을 다 믿진 않았다.
자신이 마음을 돌렸던 것과 모용군이 마음을 돌린 것은 분명 닮은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과 모용군의 차이는 확실했다.
양천은 꿈이 모호했다. 목적 지향적인 삶은 살았으되 그럴듯한 계획이나 차후를 위한 준비가 너무 미흡했다. 말하자면 지나치게 막연한 꿈이라 할 것이다.
모용군은 달랐다.
천성이 냉혹하고 욕심 많은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많은 것을 준비하며 살았다.
그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목표로 나아가는 길이, 어떻게 살아가야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가.
차갑기 그지없는 천성과 분명한 목표를 지닌 악인. 그런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처음이군.’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탄인 동시에 씁쓸함이었다.
‘천성을 바꿀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모용군은 스스로를 바꾸었어. 천성까지 바뀌었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포기를 깨달은 건 분명하다.’
포기를 알았다 하여 진짜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그 깨달음을 거부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려 했을 것이다. 특히나 모용군 같은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한데도 모용군은 그 깨달음을 받아들였다.
무림맹주라는 꿈, 천하제일이라는 목표를 담담하게 내려놓은 것이다.
그것이 양천에게는 무척이나 대단하게 보였다.
“천변만화하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지만, 명확한 주관을 지닌 성인이 스스로를 바꾸는 것만큼 힘들고 위대한 일은 없지.”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참 많이 바뀌었네.”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소.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바뀐 것뿐이오. 만약 내 목표를 이룰 수 있겠다는 확신이 계속 들었다면, 내가 미쳤다고 그것을 포기했겠소?”
모용군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여유가 있었다.
상황에 순응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상황에 순응하지 못하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물은 대부분 도태되게 마련이다. 모용군은 지금의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바꾼 것이다.
“뭐가 되었든 감회가 새롭군.”
양천이 모용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모용군의 무력은 이전에 봤을 때와는 또 완전히 다른 영역에 진입해 있었다.
무극이 코앞이다. 어중간하게 무극의 문을 두들기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코앞까지 도달한 것이다.
‘천재들이 범람하는 시대로군.’
일가를 이룬 모용군도 양천의 눈에는 아직 젊은 중견이었다.
저 나이에 무극을 돌파한다면 자신의 재능과 별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인재인 것이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부주와 나에 관한 얘기는 이쯤 하고, 슬슬 소개를 해 드려도 되겠소?”
“말이 많았군. 그러시게.”
그러자 모용군 옆에 서 있던 청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태사의에 앉은 양천을 앞에 두고도 조금의 위축됨이 없었다. 굳이 기파를 드러내지 않아도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 느껴질 텐데, 굳은 심지로 그것을 이겨 내고 있는 듯했다.
양천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청년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홍익천(紅翊天)이라 합니다. 강서 상무 연합(江西商武聯合)의 맹주가 흑도 연맹의 주인께 인사를 드립니다.”
당당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눈가에 드리워진 묘하게 어두운 기색이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다. 나름의 사연이 있는 인물 같았다.
“양천일세. 묵룡부의 주인이 나라네.”
“중원 최고의 명성, 많이 들었습니다.”
물끄러미 홍익천을 보던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 맹주라 부르면 되겠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맹주께서는 연배가 어떻게 되시는가?”
홍익천이 고개를 숙였다.
“금년에 딱 서른이 되었습니다.”
제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만 사람 볼 줄 아는 이들은 홍익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관록의 여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안이지만, 서른이라는 나이가 거짓은 아닌 듯했다.
“서른…… 서른이라…….”
양천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무종은 넘지 못했군.”
“재능이 출중하지 못하여 주위 분들의 기대를 저버릴까 무섭습니다.”
“무종은 넘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강해 보이는군. 묘한 무공을 익히고 있어.”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과연 투왕.’
그는 홍익천과 맞상대해 보고 나서야 그가 독특한 무공을 익히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양천은 한눈에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 과연 무극수의 안목은 범용한 무인들의 그것과 차원이 다른 듯했다.
“독특하기는 하지만 무재가 천재라 불릴 정도는 아니니, 필시 그 이외의 능력이 출중한 것 같은데.”
“무공 이외로는 나름대로 수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런 말을 하고도 표정에 변화가 없다.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도 그대로였다. 그러고도 그토록 당당한 말을 뱉는 것이다.
양천의 얼굴에 강한 흥미가 일었다.
“좋구만. 젊음은 혈기요, 또한 당당함이지. 나는 이름 있는 사람 앞이라고 꼬랑지부터 마는 약자보다 자신의 가치를 당당히 증명할 줄 아는 사람을 더 선호한다네.”
“저희 강서 상무 연합이 묵룡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부주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양천이 크게 웃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성격 한번 시원시원해서 좋구만.”
“과찬이십니다.”
“그래, 나는 자네를 그리 보았는데, 자네가 보는 나는 어떤가?”
홍익천이 고개를 들어 양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없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 양천의 눈빛엔 강한 위엄이 어려 있었다. 웃고 있지만, 홍익천의 눈에는 미소보다 눈빛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패자(覇者)처럼 보입니다.”
“그게 끝인가?”
“그 이상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제 안목으로는 거기까지가 한계인 듯합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다면 된 것이지.”
그가 모용군에게 물었다.
“자리는 어떻게 할 텐가?”
모용군이 홍익천을 바라보았다.
홍익천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상무 연합의 맹주라고는 하나, 모용가주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입니다. 아직 거물들의 대화에 낄 수준은 안 된다고 보니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지요.”
“그러고 싶다면 그러시게나.”
“그럼.”
홍익천이 대전을 나갔다.
태사의에서 일어난 양천이 손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지.”
잠시 후, 백서가 술을 가져왔다.
모용군의 잔을 채워 주며 양천이 말했다.
“기묘한 무공이구만.”
“역시 무극수의 안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소. 나는 붙어 보기 전까진 전혀 모르고 있었소.”
“그럴 만도 해. 어지간한 암살공(暗殺功)보다도 더 은밀하더군. 무종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초절정고수보다도 위험해 보였네.”
“그렇소?”
“술법(術法)이라…… 도관이나 불사에서 난 법술, 도술 같지는 않고, 민간에서 난 술법을 근본으로 하는 것 같았네.”
모용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런 것도 알아보시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투왕이라는 칭호를 얻기 전까지, 중원 천하를 돌아다니며 숱한 고수들과 혈전을 벌였네. 경험으로는 누구 못지않아.”
물끄러미 양천을 보던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역시 못 당하겠소.”
“무엇이?”
“한 단체의 주인이 되려 할 때, 굳이 여러 경험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오.”
“잘나면 그래도 되지.”
“하지만 역시 풍부한 경험이 좋은 수장을 만드는 것 같긴 하오.”
“칭찬인가?”
“그렇소.”
담백한 어조다.
설마하니 모용군과 이런 대화가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양천이었다.
“참 신선한 자리라서 좋군. 한잔하지.”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잔에서 손을 뗀 양천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
“재미있구먼.”
“무엇이 말이오?”
“강서 상무 연합이라…… 상당한 세력이기는 하네만, 굳이 여기까지 와서 잘 봐 달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모용군이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세력 간의 불필요한 잡음을 없애고자 함이오. 힘으로만 치면 상무 연합은 묵룡부의 삼 할 전력에도 미치지 못하오.”
“흐음.”
“약하면 기어야지.”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 말투가 도저히 약자의 말투로는 들리지 않는데?”
“천성은 바꾸지 못하는 법이오.”
“하하하!”
그 한마디로 양천은 상무 연합에 대한 태도를 우호적으로 취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모용군이 양천의 잔도 채워 주었다.
양천이 잔을 가져와 들었다.
“그저 약하다고 와서 기는 것 같지는 않네만.”
“물론 다른 이유도 있소.”
“크기를 키울 생각인가?”
“물론이오. 앞으로의 전쟁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양천의 눈빛이 대번에 바뀌었다.
“자네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차피 중원이 불바다가 되면 내 꿈과 목표도 사라지는 거요. 일단은 지키고 봐야지.”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나 보군.”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이오.”
들을 때마다 새롭다. 정말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
양천은 새삼 세상에 대해 통달했다고 여겼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나저나, 얘기는 들었소. 황제 폐하의 따님과 혼인을 하신다고.”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됐네. 광혼귀군이 와서 혼삿날을 정할 걸세.”
“출세하셨소.”
“출세했지. 포기도 했고.”
모용군이 눈을 빛냈다.
“황궁과 무림이 하나가 될 기회요. 부주께서 그 사이의 교각으로서 존재해 준다면, 이는 모두에게 좋을 일이오.”
“바가지나 안 긁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구먼.”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고.”
“고약한 사람 같으니.”
모용군이 잔을 비우며 물었다.
“보냈소?”
“음? 무엇을?”
“들으셨을 텐데. 사랑스러운 제자분께서 또 한바탕하려고 새외로 나간다는 소식을.”
“……나야 들어서 알고 있네만,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았나?”
“용두방주가 알려 주었소.”
“친분이 깊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강제로라도 깊어져야겠다고 생각했지. 무시 못 할 세력을 등에 업고 있으니까.”
“그도 그렇군.”
“그래서, 보냈느냐 물었소.”
“무엇을?”
모용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후계자가 죽기를 바라는 거요?”
“…….”
“여기서 후계자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으면, 무림맹이 묵룡부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동맹은 문서 쪼가리 하나로 탄탄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시지 않을 텐데? 하물며 후계자가 위험에 처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보면, 연호정이 묵룡부 사람이 아니라 무림맹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더 되겠소?”
“…….”
“녀석에게 힘을 보태 주시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