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92화 (892/963)

892화. 마도의 고향 (5)

일행의 출발은 어두운 밤, 고요하게 진행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특명 전권 대사로 온 묵룡부의 소부주를 주축으로 행해지는 특별 작전이다. 적어도 겉으로 봤을 때 무림맹이 주축이 된 집단은 아니니, 아무래도 보는 눈이 적을수록 좋았다.

천효락과 그의 호위 무사인 화향, 마차를 모는 마부까지 신마림의 인원은 셋.

연호정을 필두로 막원, 당관과 패율, 묵비와 부선의 초절정고수들과 아직은 부족하나 특출난 재능을 지닌 연지평과 옥청까지 무림 연합 여덟.

맹의 서쪽 성문, 백호대문을 열고 나아가는 일행은 총 열한 명이었다.

청해성까지의 길도 멀거니와 그곳에서 얼마나 살벌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작전인 만큼, 나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썩 가볍지 못했다.

* * *

천효락이 탄 마차를 중심으로 선두에는 막원과 묵비, 패율, 옥청이 자리를 잡았고, 후미에는 연호정과 부선, 당관과 연지평이 자리를 잡았다.

그 배치는 여덟 명의 고수 집단을 두 개의 조(組)로 나눈 것이었다.

선두지만 막원을 좌장으로 한 네 명이 이 조(二組)이고, 후미의 연호정을 좌장으로 한 네 명이 일 조(一組)였다.

그들의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말의 체력 때문에 쉰 적은 있어도 일행 중 체력의 문제가 온 사람은 없었다.

이들 중 단순 경지로는 연지평과 옥청이 가장 약했지만, 연지평은 연위의 엄격함 가르침과 스스로의 광적인 수련 덕분에 체력이 극단적으로 높았다.

옥청은 의정군 소속으로 숱한 실전을 겪었으며, 무당 특유의 지구력 강한 내공은 물론 수일을 잠도 자지 않고 진군했던 경험이 충만했다.

급하진 않지만 마냥 느긋하지도 않은, 아주 빠르진 않지만 너무 느리다고 하기에도 힘든 속도.

서로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은 일행은, 열흘이 넘어서야 섬서로 진입할 수 있었다.

“묘하군.”

길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행.

일행은 일부러 조끼리 거리를 벌린 채 앉았다. 개개인이 워낙 특색 있는 고수들이라, 각자가 속한 조와 함께 행동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옥청이 제안한 것으로, 부대에 소속되어 숱한 전투를 벌여 본 그의 경험으로 봤을 때 너무나도 당연한 조취였다.

그리고 모두는 옥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늘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고수의 힘은 대단하지만, 제대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면 집단의 힘은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연호정이 짚지 못한 것을 짚어 낸 옥청의 능력은 초반부터 빛을 발했다.

“꽤 느긋한 이동이었는데, 이게 또 묘하게 힘이 드는구만.”

비수로 손톱을 다듬는 당관의 목소리는 내용과 다르게 상당히 유유자적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넘어갈 때, 무림인이라는 족속들은 수련한답시고 신법을 구사하거나 무언가에 몰입하고는 하지요. 그래서 생각보다 지루할 틈이 없는 겁니다.”

“네 말이 옳다. 말 위에 앉아서 달리기만 하다니, 이것 참 보통 지루한 일이 아니구만. 아, 육포 좀 줘 봐.”

“여기요.”

당관이 육포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무림인의 대사 조절 능력은 여느 범부와 차원을 달리한다. 마음만 먹으면 밥 한 끼로도 며칠을 쌩쌩하게 지낼 수 있다.

당연히 이룬 경지가 높을수록 그 능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체내의 진기 밀도가 높으면 외부에서 영양을 섭취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데에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하다는 것뿐, 실제로는 여느 범부처럼 끼니를 다 챙겨 먹는 것이 좋다. 다만 이처럼 기나긴 여행을 할 때는 나름대로 대사를 조절하여 최소한의 끼니로 더 멀리 이동할 수 있는 것이 무림인들의 능력이었다.

“오랜만에 씹으니 맛나고 좋구만.”

“사천에서 왕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신 분이 육포 하나로 감동하십니다.”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은 다 진수성찬인 법이야. 그나저나…….”

당관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슬슬 정보 좀 나눠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까지 이동하면서 일행은 최소한의 대화를 제외하곤 공적,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어차피 청해성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섬서는 감숙과 이어져 있지. 감숙 다음은 청해야. 아직 갈 길이 수천 리는 남았지만, 만에 하나…….”

당관이 힐끔 마차를 바라보았다.

“저 수상쩍은 얼간이가 꼬리를 달고 왔다면 뜻밖의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겠냐?”

“그랬다면 진즉 싸웠겠지요.”

“장난하는 거냐? 제아무리 마선을 주인으로 모시는 놈들이라도 무림맹의 힘을 얕보지는 않을 텐데? 감히 무림맹 영역에서 활개 치다가는 저희들만 손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잖느냐.”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섬서도 맹의 영역이라 할 수 있지. 하물며 화산과 종남까지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종남 전쟁으로 섬서 무림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 종남의 전력은 많이 줄었고, 화산은 건재하긴 해도 종남에 보낸 전력을 상당수 잃었어.”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죽자고 달려들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는 거다.”

“놈들이 섬서에서 활개 칠 가능성은 하남성에 들어와 활개 칠 가능성과 거의 비슷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말씀하신 대로 종남 전쟁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섬서 무림의 전력 자체는 약해졌지만, 그 긴장감은 아직도 진하게 유지되고 있지요.”

정보력을 말하는 것이다.

화산이든 종남이든 개방의 섬서 지부들이든, 그들의 눈은 한껏 날이 서 있었다.

섬서는 북부에서 직접적으로 치고 들어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 길이 한정적이지만, 한번 뚫리면 또 한 번 된통 전란을 겪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곳의 첨예하기 그지없는 정보력을 뚫고 들어올 가능성은 결코 높지 않다. 설령 들어왔다 한들,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을 만큼 치솟은 무림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상대를 분노케 하여 빈틈을 유발하는 것도 전술의 하나라지만, 섣불리 도발하기에는 무림맹의 전력이 너무 막강했다.

거기에 무림맹주 임명식이 가까워진 지금 도발을 한다면?

그때는 백도의 모든 무림인이 청해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성보다 감성을 먼저 건드리는 악수. 그리된다면 신마림도 초긴장 상태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하물며 신마림 출신인 천효락까지 중원에 나와 있는 바에야 절대 쓸 수 없는 수법이었다.

“무슨 말인진 알겠다만, 세상에는 변수라는 것이 있다.”

당관의 목소리가 살짝 작아졌다.

“만에 하나 신마림이 삼교와 손을 잡고 있다면, 오히려 섬서를 한 번 더 건드리는 수를 쓸 수도 있겠지.”

정국을 보는 사람 모두가 머리에 한 번쯤은 떠올렸던 생각을, 당관은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 신마림의 근거지만 알고 있다면 삼교가 충분히 건드렸을 법한 집단이었다.

오히려 무림보다 더 건드리기가 쉬울 것이다.

새외 무림의 강자들이라는 소뢰음사마저 장악했을 거라는 유추가 나오는 판이었다. 그 외에 수많은 문파를 흡수한 삼교의 능력은, 모르긴 몰라도 신마림을 압도했으면 압도했지 모자라진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신마림은 섬서에 마인들을 투입하지 못할 겁니다.”

“왜?”

“마인이 아닌 다른 놈들을 투입할 테니까요.”

“응?!”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가주님의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제가 말한 것은 다 가능성에 불과하니, 이제 이것저것 따져 볼 때가 됐지요.”

당관이 투덜거렸다.

“어차피 그럴 거 뭐 하러 이런저런 장황한 얘기를 꺼낸 거냐?”

“아셔야 하니까요.”

“음?”

“조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셔야 혹시 제게 문제가 생겼을 때 이 조를 이끌어 가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관이 피식 웃었다.

“천하의 당씨 문중 주인을 조원으로 부리더니 아주 살판난 모양이군.”

“제가 언제 또 당가주님을 부하로 부려 보겠습니까.”

“부하가 아니라 협력 관계 정도로 생각해라. 난 누구 밑에서 개처럼 움직일 생각 전혀 없으니까.”

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이자고 하겠다.”

“아니요.”

연호정이 마차를 보았다.

“저 양반도 당가주님과 같은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덜컥.

마차의 문이 열리고 천효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간 서너 번을 제외하곤 마차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그였다.

천효락이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잠시 후.

실로 오랜만에 일 조와 이 조가 한데 모였다.

연호정이 말했다.

“때가 된 거요?”

천효락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일부러 이런저런 정보를 숨겼다는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모르는 일이지.”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능구렁이 백 마리는 삶아 먹은 것 같은 낯짝이라 당최 믿을 수가 없어서.”

화향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천효락이 손짓으로 화향을 제지하며 말했다.

“감사한 말씀이로군요. 그간 잘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뭐라?”

“능구렁이 행세를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거든요.”

당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서 있던 막원이 말했다.

“마도 무림은 중원의 어떤 세력보다도 강자존의 원칙을 고수한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아니, 맞을 겁니다. 제가 중원 무림의 모든 문파를 살펴본 적은 없으니까.”

“강하면 잡아먹고 약하면 도태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천형(天刑)을 안고 있는 그대가 지금까지 버티고 산 것, 그게 참 궁금하긴 했지.”

천효락이 화향을 힐끔거렸다.

“믿음직한 호위 덕분에 많은 위험을 이겨 낼 수 있었지요.”

“호위 하나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었나?”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처럼 믿음이 가는 수하는 또 없을 겁니다.”

“보기 좋은 군신지간이군.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무엇이오?”

가만히 일행을 둘러보던 천효락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러분들은 자세한 사정도 듣지 않은 채 저와 함께 이곳까지 달려와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저도 어디까지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하러 왔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신마림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알려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성공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러나 천효락은 명백한 신마림의 사람이라 훗날을 위해서라도 모든 정보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상식적으로는 그러했다.

그리고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천효락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상식으로 이겨 낼 수 없는 사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에 앞서, 제 비밀스러운 개인 신상부터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 주인님?!”

화향의 놀란 목소리에도 천효락의 표정은 여일했다.

“신마림의 주인이 중원에서 마선이라 부르는 혁련휘, 혁련 림주님이라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소.”

“틀렸습니다.”

“음?”

“신마림주, 제 스승의 진짜 이름은 혁련휘가 아니라 천인걸(天仁傑)이라 합니다.”

“……?!”

“그리고 삼교의 하나, 광혈교(狂血敎)는 대대로 천씨가 대를 이어 교주를 맡았지요.”

일행 모두, 심지어 연호정조차도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천효락이 눈을 감았다.

“신마림은 광혈교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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