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94화 (894/963)

894화. 마도의 고향 (7)

철컹.

묵직하고도 서늘한 소리에 노인이 눈을 떴다.

눈을 떠도 보이는 것 대다수가 어둠이었다. 그 어둠을 배경으로, 찢어진 하의와 제법 앙상해진 무릎이 보였다.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는 소리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기괴했다.

“……사부님.”

노인의 눈이 흐려졌다.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힘이 없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때가 탔는데도 하얗게 보였다.

우스운 일이다.

진정한 역천(逆天)을 이루기 직전, 진짜 역천이란 도달해선 안 되는 곳임을 깨닫고 마(魔)의 극치가 아닌 무(武)의 극치로 눈을 돌렸다.

마보다 무를 우선으로 두었을지언정 그가 연마한 마공은 천하에 적수를 찾기 힘든 마공임이 분명했다. 팔십에 가까운 나이를 먹도록 머리카락이 허옇게 세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윤기가 자르르했더랬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은 무엇인가?

머리카락은 하얘졌고, 완벽하게 압축된 근육을 자랑하던 팔다리는 벌레 다리처럼 가느다랗기만 했다.

앙상해진 무릎을 덮고 있는 살거죽을 보건대, 팽팽하던 얼굴도 온통 주름으로 뒤덮였으리라.

평생에 노화(老化)는 죽기 직전에나 맛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참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대단하십니다.”

머리카락도, 피부도, 근육도, 시야도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의 두뇌만은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사고의 속도가 예전보다 확연히 느려졌을 뿐.

“마기(魔氣)를 완전하게 봉쇄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한 그 위용……! 역시 저 발칙한 강호인 놈들이 마선(魔仙)이라 부르며 경외하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너냐?”

목소리가 탁했다.

힘이 없었고, 둔탁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곳이 노화를 맞았어도 목소리만큼은 이전의 흔적이 잘 남아 있었다.

이런 순간에도, 노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자신을 구하러 올 사람이 있다면 이 목소리만으로도 신마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과연 다르긴 다르십니다. 물만 마신 채로 며칠을 버티고 계신 건지.”

“…….”

“어찌 식사는 드시지 않으십니까? 숙수가 나름대로 몸을 생각해서 성의 있게 만든 건데.”

노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목에 힘이 없어 고개를 들기도 어려웠지만, 묘하게 말할 힘은 남아 있었다.

“네 생각이 나서 먹을 수가 없더구나.”

“사람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본모습이 나온다는데, 제가 사부님의 이런 모습을 다 봅니다.”

“향긋하고 맛나 보이더구나. 참으로 먹음직스러웠지.”

노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제대로 뜨이지 않았지만, 상대를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의 눈빛은 달라졌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역겹기 그지없는 독약이 잔뜩 들어 있어,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내 몸에 해가 될 것이 분명했느니라.”

“…….”

“처음 너를 본 순간, 나는 본 림의 규율과 법도를 바꾸었다. 너만 한 인재가 앞으로 또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이처럼 대단한 천재(天才)가 있거늘 부족한 자식에게 대를 이어 수장 자리를 내어 준다는 것은 너무 안이한 처사가 아니겠느냐?”

“…….”

“내 실수였다.”

“…….”

“겉만 번지르르한 네놈의 흉중에 썩어 빠진 독주머니가 있다는 걸 몰랐어. 내 그것을 알았다면, 네 재능이 고금 제일이라 한들 제자로 삼았겠느냐?”

“하지만 절 제자로 삼으셨지요.”

“그래서 두 번의 실수는 피하기 위해 식사를 거르는 중이니라.”

“…….”

“내게서 뭘 그리 알아내고 싶어서 별의별 약물을 다 쑤셔 넣었더냐?”

“…….”

“하긴, 알 것도 같구나.”

스르르.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기운이 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기운이 나기도 했다.

그 기운을 끌어낸 것은 상대에 대한 안타까움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분노였다.

노인의 눈에, 마침내 사내가 보였다.

역광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그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마기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제압당한 상태였다.

온통 시커멓기만 한 사내. 그러나 두 눈만큼은 확연하게 보였다.

붉은 욕망으로 가득한 눈.

강철처럼 단단하고 바위처럼 무거운, 그리고 불처럼 사납기 그지없는 사이한 마안(魔眼).

“파천결(破天訣)이 그리도 탐이 나더냐?”

“…….”

“왜? 광혈의 주인이 너에게 따로 마공을 전수하지는 않겠다더냐?”

사내의 눈이 깊어졌다.

한때 스승이었던 사람을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강렬한 욕망에 대비되는 스산한 한기도 깃들어 있었다.

“내 비록 그들과 손을 잡았으나 광혈의 무공이 탐이 나진 않았습니다. 그들의 힘이 두렵고, 그들의 힘을 원했을 뿐 마공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냐?”

“대를 이어져 내려온 신마림주의 마공이 광혈교주의 마공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

“신마림의 시조가 만든 림주의 무공은 명실공히 천하제일입니다. 이룬 경지가 낮아 잠시 광혈교주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있지만, 사부의 무공을 다 깨우치고 정진한다면 광혈교주 따위가 문제겠습니까?”

“……재미있는 말이구나. 결국 네놈은 광혈교와 한패가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여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냐?”

“사부님이 꼭꼭 숨기고 있는 그 파천결만 내 손에 들어오면, 천하제일마가 될 수 있습니다.”

“방심했구나.”

“……?”

“평소라면 너의 거짓말, 나라도 꿰뚫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신마림의 실권을 잡고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하여 방심을 한 것인가.”

“…….”

“네 꿈은 천하제일마가 아니다. 아니, 너에게는 꿈이랄 것이 없지.”

“…….”

“너는 그저 진실과 오해를 구분할 눈도 없는, 그릇이 작아 질투밖에 못 하는 못난 놈이다. 너의 행동에는 목적이 없어.”

말을 하면서도 노인은 자책했다.

방심? 아니다.

이놈은 원래 그런 놈이었다. 지금 와서 방심했다고 놈의 거짓말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저 자신이 첫째를 너무 믿었을 뿐이다.

내 수련이 바빠 지나치게 방치했다. 워낙 잘하는 걸 알아서 다른 제자들에게 더 신경을 썼다.

결국, 이 사태를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재미있군요.”

사내가 몸을 돌렸다.

“음식을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드시지 않아도 죽음은 찾아올 겁니다.”

“…….”

“당연히 쉽게 돌아가시진 않겠지요. 그러고 싶어도 사부님의 몸에서 잠자고 있는 마기는 결코 죽음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끼이익.

문을 반쯤 닫은 사내가 다시 노인을 돌아보았다.

휘어진 그의 눈꼬리에 조소기가 감돌았다.

“제정신이 아니게 되면, 그때는 파천결의 구결을 알 수 있겠지요.”

“……이놈.”

“뭐,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긴 합니다. 사실 만에 하나를 위해 살려 드렸을 뿐입니다. 사부가 파천결을 누구에게 전수했는지 알고 있거든요, 저는.”

순간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철문이 느릿하게 닫혔다.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제 사람들이 조만간 셋째를 잡아 올 것입니다. 지금쯤 중원에 도달했을 터이니, 셋째가 오는 날이 곧 사부가 저승으로 가는 날입니다.”

철컹!

문이 닫히고 걸쇠가 잠겼다.

다시 어둠 속에 갇힌 노인이 벽에 등을 기댔다.

“……효락아.”

* * *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군요.”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뜻밖에도 그 말을 한 사람은 옥청이었다.

우우웅.

옥청의 몸에서 청아하고도 신비로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천효락과 화향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공공대사만큼은 아니지만, 옥청의 도가 신공 기운 역시 그들에게는 무척 껄끄러운 것이었다. 심지어 옥청의 혼원기(混元氣)는 검선 탁무자가 무당의 무공을 집대성하여 창안한 희대의 신공이었다.

“옥청?”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옥청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날뛰는 혼원기를 다스리느라 무진 애를 썼다.

이유는 명백했다. 천효락과 화향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수준 높은 마기가 자꾸 혼원기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마기는 옥청의 진기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억압했으며, 그것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옥청은 혼원기를 훨씬 세밀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살육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부대 단위의 싸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순수한 기공 싸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심법의 깨달음.

게다가 혼원기의 밀도 역시 마기에 대항하여 올라갔으니, 이번 여행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옥청의 수준을 상승시켰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천 공자께서 더 숨기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

“그리고 그걸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아니 느낌이 듭니다.”

천효락의 눈이 깊어졌다.

그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어정쩡한 무사를 왜 데려왔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저 도사의 직감이 좋은 건지, 도가 신공의 힘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이쪽의 목소리나 눈빛, 기세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이나 목적을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건가?’

그 공공대사도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읽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저 옥청이라는 도사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천효락이 입을 열었다.

“저는…….”

“됐소.”

그의 말을 끊은 것은 연호정이었다.

“반드시 말해야 할 게 있다면 말하시오. 하지만 주저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오.”

“……!”

“섬서를 벗어나기 전에만 말씀해 주시오. 아직 시간은 많고 갈 길은 머니까. 아시겠소?”

“……배려 감사합니다.”

“알고 있겠지만 당신의 말에는 파고들 틈이 상당히 많소.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알려 줘야 할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소.”

옥청의 감지 능력 이전에 연호정의 빠른 눈치는 이미 천효락을 꿰뚫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도 상관없소.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지금 말해 주시오.”

연호정의 동공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금빛 눈을 보는 순간, 천효락은 마음속의 무언가가 와르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저쪽에서도 당신을 노리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놈들에게 있어서 하남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섬서요. 나는 그들이 섬서에서 난리를 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오.”

“…….”

“하지만 당가주님과의 대화로 인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하니 묻겠소.”

“…….”

“지원을 요청한 이유 외에, 놈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소?”

“……그렇습니다.”

“청해성은 꽤 멀리 떨어진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쪽 소식을 잘 알고 있더군. 그렇다면 그들 역시 우리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 맞소?”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럼 확실하다는 전제를 깔고 가야겠군. 마지막으로 묻겠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군.”

“…….”

“반란의 주동자, 그자가 손을 잡은 것이 광혈교 하나요?”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는데 먼저 묻는다. 그만큼 연호정의 전술적 안목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광혈교 아닌 이들 또한 광혈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겠지요.”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지.”

그가 당관을 바라보았다.

“조를 바꿔야겠습니다.”

“뭐? 왜? 뭔데, 또?”

“묵비와 함께 두 사람이 이 조(三組)입니다. 저격과 암습을 맡아 주십시오.”

“이 자식이 또 혼자만 아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연호정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전방 돌파의 일 조(一組)는 막원 형님을 필두로 패율 선배와 부선으로 합니다. 저와 지평, 옥청은 마차와 딱 붙어 이동하는 삼 조(三組)로, 지휘와 전력 보강 역할을 맡겠습니다.”

“야, 인마!”

“최대한 빨리 식량과 예비 의복 등 생필품을 구하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길을 잡아야겠습니다.”

당관은 기어이 성을 냈다.

“가면서 설명하라! 제대로 알려 주지 않으면 네놈 머리통에 구멍을 뚫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