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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899화 (899/963)

899화. 혈승(血僧) (5)

두두두두.

마차와 기마들이 평야를 달렸다. 군데군데 잡풀이 난 초원 위를 두들기고 지나가자 자욱한 모래바람이 일었다.

저 멀리 우측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맥은 그야말로 거인의 등뼈를 보는 듯했다.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는 초원과 산맥은 지나치게 황량한 듯하면서도 개미만도 못한 인간을 압도하는 위용을 자랑했다.

마차 바로 앞에서 말을 모는 연호정은 생각했다.

‘숨을 곳도 없군.’

흑암제 시절에도 감숙은 몇 번 와 봤다. 게다가 무림맹이 만들어 준 지도는 세밀하기 그지없어서, 지금 어느 곳을 달리고 있는지 꽤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몸을 숨길 만한 바위들도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의미가 없어.’

시야가 너무 탁 트였다. 이런 환경이라면 어두운 밤보다 시야가 명확한 대낮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럽던 와중.

‘……!’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우웅.

잠들었던 황룡이 한쪽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외양은 그대로지만, 순식간에 황룡기가 온몸을 꽉 채웠다. 본능이었다.

‘또.’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시선을 느끼는 그였다.

무극에 도달하여 천지의 기운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서 더 깊은 수련을 거듭해 지금의 경지에 도달한 연호정의 기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 예민함만 따지면 막원도 연호정에 비빌 수 없다. 같은 걸 느낄 순 있어도, 느낀 대상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기괴하긴 하구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이런 술법을 무한정 쓸 수 있다면 그것만큼 무서운 힘이 없겠지.’

내공은 무서운 힘이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이 바로 내공, 기(氣)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생처럼 호리호리한 자가 주먹질 한 번으로 바위를 부수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러나 내공은 그것을 가능케 해 준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지식과 강렬한 욕망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내공, 기라는 것은 무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무공이 신체의 완력, 파괴적인 힘을 추구한다면 술법이나 도술, 환영을 보여 주는 진법 등은 다른 면에 있어서 초인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기(氣)만큼이나 모호한 정신력이라는 힘을 이용하여 천지간의 신비로운 조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연호정은 오랜 옛날 스승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무(武)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목재를 정교하게 깎아 건물을 세우거나 철을 추출해 병기를 만들기도 전, 원시(元始)의 시절부터 무는 인간과 함께했다. 당연하지. 인간은 동물이야. 힘이 더 강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잡아먹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다.’

‘그렇다면 술법은요?’

‘술법은 다르다. 술법 역시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왔지만, 무(武)만큼 원초적이진 않았다. 술법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늘의 힘을 빌려 이루고자 한 고대의 제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제사…….’

‘결국 술법 역시도 기의 조화다. 무(武)가 상대를 꺾기 위해 발전되었다면, 술법은 불가능한 것을 이루기 위해 발전되었다. 그리고 기어이 성공해 버리고야 말았지. 인간의 정신과 욕망이란 이처럼 지독스러운 구석이 있다.’

‘술법이 그리도 신통한 것입니까?’

‘내공이 평범한 인간을 초인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술법은 신선(神仙)의 능(能)을 훔쳐 오는 것에 가깝다. 인간 이상의 힘을 휘두르는 것은 동일하나, 술법이 무공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며 위험하다.’

‘위험…….’

‘특히나 주술(呪術)은 대다수가 조화를 깨 버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탓에 구현 자체가 사도(邪道)요, 역천이다. 주술의 끝을 본 사람이라도 상식 밖의 힘을 자유로이 휘두르지 못한다. 하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때는 스승의 말에 다소 허황된 표현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지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지금의 연호정은, 이제야 비로소 스승의 가르침과 말씀 하나하나를 전부 이해하고 체감할 수 있었다.

‘천리안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섭리를 벗어난 힘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해.’

눈의 존재만 느끼는 게 아니라, 그 시선 속에 섞여 있는 극히 미세한 사기(邪氣)의 흐름을 느끼는 그였다.

그 사기는 곡경의 사공과 전혀 달랐다.

‘끈적해. 피 냄새가 난다. 술법 중에서도 주술에 가까운 술수임이 분명하다.’

스륵.

광활한 하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눈 하나가 일행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보지 못할 것이다.’

연호정은 확신했다. 놈들의 주술로는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술법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기(氣)에 대한 이해도만큼은 중원 정점에 이른 그였다. 제아무리 대단한 주술이라도 내공의 한계를 초월한 사람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막원을 다른 길로 보낸 것 또한 그런 이유였다.

‘이제 곧이다.’

나아가, 연호정은 느꼈다.

이제 전투가 코앞이라는 것을.

주술이나 도술 따위는 쓰지 못해도, 연호정에겐 숱한 생사결을 치러 온 경험과 살의 감지 능력이 있었다.

‘바람이 부는구나.’

잠시 눈을 감고 초원의 바람에 몸을 맡기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옥청.”

담담한 목소리인데도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옥청의 귓가에 내려앉는다.

“승현진인께 따로 검을 받았겠지?”

“그렇습니다.”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송문고검은 집어넣고, 승현진인께 받은 검으로 상대해라.”

옥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어이.”

살짝 말의 속도를 늦춘 패율이 연호정의 옆으로 다가왔다.

“느꼈느냐?”

“물론입니다.”

패율이 인상을 찡그렸다.

“느꼈으면 말 좀 해 주지?”

“어디 숨을 곳도 없지 않습니까. 초원이 넓어서 발견해도 한참 떨어진 곳입니다. 준비할 시간은 충분합니다.”

코웃음을 친 패율이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적은 얼마나 되겠느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백은 넘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 일백의 고수가 한꺼번에 덤빌지, 찢어져서 덤빌지, 시차를 두고 들이닥칠지는 모르겠습니다.”

“흐음.”

“다만 그 안에 감당키 힘든 고수가 있습니다. 그놈은 저에게 맡기시지요.”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구대문파 장문인급이라도 자신 앞에서는 감당키 힘든 적이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극.’

패율의 볼이 씰룩였다.

‘빌어먹을, 무극이 장난도 아니고.’

새삼스레 느낀다. 세상엔 고수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부선.”

“네.”

부선 역시 연호정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기마에 탔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창검술을 쓸 필요는 없다. 지금껏 너를 지켜 준 것은 언제나 두 주먹이었다.”

연호정이 부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우웅.

부선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의 손을 타고 흘러 들어온 기운은 흑사자기였다.

‘엄청나구나.’

자신의 흑사자기와는 차원이 다른 고농도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전신의 진기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손을 거둔 연호정이 말했다.

“설령 기마전이 벌어져도 너는 네가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싸워라. 꼭 명심해.”

“알겠습니다.”

“좋아.”

그때, 저 멀리 뒤쪽에서 당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싸가지.”

“예. 압니다.”

“어떻게 할 거냐?”

“일단 가 보시죠.”

쿠르르르릉!!

일행이 속도를 올렸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이 훨씬 더 커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번쩍!

패율과 부선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선두에서 달리는 두 사람의 눈에 비로소 적의 모습이 보였다.

‘……!!’

패율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후우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에서 달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달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쁜 냄새였다. 끈적하게 몸에 들러붙는데, 무슨 짓을 해도 잘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냄새의 정체를, 패율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살기!’

분명 살기지만, 전혀 다르다.

중원 무림에서 온갖 싸움을 벌여 본 패율조차도 처음 느끼는 종류의 살기였다.

익힌 무공의 차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사이했다. 진기가 사이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듯했다.

부선 역시 기괴한 살기를 느꼈는지,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너머.

화아아아아악!!

갑작스레 폭발적으로 증가한 살기의 바람이 일순 폭풍이 되어 일행에게로 불어닥쳤다.

그때였다.

연호정의 동공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휘이이이이이잉!!

광룡부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니, 어느새 부선과 패율 앞에서 일어난 반투명한 금빛 바람이 몰아치는 폭풍과 부딪쳤다.

파아아아아!!

폭음은 없었다. 폭풍과 질풍의 부딪침, 정면으로 충돌한 두 바람이 산산이 흩어지며 좌우로 거대한 먼지구름을 피워 올렸다.

히히히히힝!!

기마들이 투레질과 함께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기수들이 고삐를 당긴 게 아니라, 말이 겁을 먹은 것이었다.

잠시 후.

일행이 질주를 멈추었다.

후우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일행의 옷깃을 희롱했다.

일행의 전방 오십여 장 거리에 일백이 훌쩍 넘는 병력이 보였다.

그중 열여덟 명은 피처럼 붉은 가사를 입은 채 손에는 불길한 명왕상이 그려진 석장을 들고 있었다.

그 뒤, 백여 명에 달하는 이들은…….

“……괴물?!”

연지평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열여덟 승려 뒤에 도열한 일백 명의 무사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귀신 형상의 가면을 썼고, 상체는 짐승의 등처럼 구부러졌다. 길고 굵은 두 팔은 무릎 밑까지 내려왔는데, 놀랍게도 손톱이 비수처럼 뾰족했다.

허리를 펴면 그 키가 진양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괴물들이 무려 일백이나 된다.

결정적으로 기파.

열여덟 괴승은 아무 기운도 뿜어내지 않는 반면, 일백의 귀신 가면을 쓴 무리가 뿜어내는 사이한 기운에선 도통 산 자의 생기(生氣)가 느껴지지 않았다.

“불쾌한 놈들이로고.”

당관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옆의 묵비 역시 인상을 찡그렸다.

연호정이 고삐를 흔들었다.

몇 번 투레질을 한 말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스르륵.

그러자 일백 귀신들 사이로 한 명의 승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석장 대신 독고저를 든 노승이었다. 열여덟 괴승보다 더 풍성하고 짙은 색의 가사와 시커먼 백팔염주가 눈에 띄었다.

그렇게 각 진영을 놓고 나온 두 명의 고수가 십여 장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대단하군.”

노승, 혈승의 얼굴은 한껏 굳어져 있었다.

“혈불경에 달한 고수가 있을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이토록 완성도 높은 고수였을 줄이야.”

혈승과는 달리 연호정의 평가는 꽤 박했다.

“소뢰음사?”

“그렇다, 동대륙의 이름 모를 고수여. 빈승은…….”

“같잖구만.”

“……?”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먼지 많은 이곳에서 우리를 들여다보고 계셨나? 할 일이 그렇게도 없으신가?”

혈승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재앙은 입에서 나오는 법, 하나 이미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얼마냐?”

“무슨 말이냐?”

“삼교가 얼마를 줬길래 자긍심 높은 소뢰음사가 그 병신들 발바닥이나 핥고 있느냐 물었다.”

“……?!”

“불필요한 싸움은 지양하는 편이니 꼭 알려 줬으면 좋겠군.”

“네놈…….”

연호정이 오른 발목을 까딱였다.

“돈이야 사부님께 말씀드려서 융통할 수 있으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해 봐. 얼마 주면 우리 발바닥 핥아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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