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화.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2)
“흐음.”
패율이 턱을 쓰다듬었다.
“굉장하구만, 이 녀석.”
부선이 의아한 눈으로 패율을 바라보았다.
다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는데도 패율은 가부좌를 튼 옥청을 보며 말했다.
“도가의 신공들은 죄다 근원이 달라. 도(道)를 보는 관점이 다르니 추구하는 목표도 다를 수 밖에 없지. 마(魔)에 항거하는 힘은 다들 안고 있지만, 기도는 가지각색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
“하지만 이 녀석이 익힌 신공은 분명한 도가의 신공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탁한 부분이 있어. 무공을 잘못 익힌 게 아니라면 제작 시기부터 저러한 기도를 추구했다는 것인데…….”
패율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 모르겠군. 전형적인 무당 무공의 특성을 보이면서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검선(劍仙) 어른께서는 어찌 저런 무공을 전수하셨지?”
묻는 사람 없이 홀로 말하는 패율. 그런데도 전혀 부끄럽거나 어색한 기색이 없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의 폐관으로 저러한 습관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부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패율의 혼잣말은 혼잣말로 끝나지 않았다.
“당신도 대단하던데?”
“저 말인가요?”
“그래, 당신.”
부선을 보는 패율의 눈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의미를 알기 쉽지 않은 눈빛이지만, 그 바탕에는 호승심이 있었다.
“체술을 그렇게 역동적을 구사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연호정 저놈도 그 정도는 아니던데, 그게 진정한 투왕의 무공인가?”
“모르지요.”
“모르다니?”
“사부님의 무공을 내 나름대로 재해석한 것뿐이에요. 내 몸에 맞도록.”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의 무공으로 만드는 것. 정말 중요한 것이지. 그 나이에 벌써 그만한 깨달음을 수용하다니, 과연 투왕의 제자라 할 만해.”
“패율이라고 했던가요?”
“그렇지.”
“왜 반말이죠?”
패율이 멍하니 부선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기묘한 대화를 이어 갈 때, 다른 곳에서도 저마다 대화가 이어졌다.
당관은 묵비에게 사출식에 관해 설명해 주었고, 묵비는 진지한 얼굴로 그의 가르침을 들었다.
연호정과 막원, 천효락 역시 쓰러진 위소강을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향은 천효락 뒤에 시립해 있었는데, 신마림의 본진 쪽을 보는 그녀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했다.
홀로 말의 갈기를 쓰다듬던 연지평은 문득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형님.’
연호정의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물론 막원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이백오십여 명에 달하는 마인 부대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쓸어 버린 직후임에도 연호정은 아무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그것이 연지평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다.
‘형님은 죄책감이 없는 게 아니야.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모르지도 않을 거다. 그건 확실해.’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분명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법이었다.
‘한데도 형님은 충격을 받지 않는다. 단순히 경험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한참 동안 연호정을 보던 연지평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아직 멀었어. 모르겠다, 아직도.’
그때였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한숨은.”
연지평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대화를 끝냈는지 연호정이 앞에 있었다.
“형님.”
“몸은 괜찮으냐?”
“예, 괜찮습니다.”
하필 기다렸다는 듯 의복의 어깨 부근에서 피가 점점이 배어 나왔다.
연호정이 혀를 차며 품에서 허연 천을 꺼내 들었다.
“어깨를 보이거라.”
“괜찮…….”
“사소한 상처 하나가 실제 전투에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네가 무극에 도달했다면 모를까, 지금은 내 말을 듣도록 해라.”
“……예.”
연호정이 연지평의 어깨에 천을 묶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앉아 있던 연지평이 나지막이 말했다.
“형님.”
“왜?”
“언제까지 쉬는 것입니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왜? 벌써 몸이 근질근질하냐?”
“아,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
“적진을 앞에 두고 너무 여유로운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진의 경계선에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무시무불대진이 환상을 일으키기 시작할 것이다.
당연히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연호정과 막원 둘만이라면 모를까, 일행 모두가 함께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름의 조치가 필요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저 진을 해체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해체 이전에, 왜 저 진이 펼쳐졌는지 그 이유부터 알아봐야겠지.”
“적측 대장을 잡았는데, 그 사람에게 물어보지는 않습니까?”
“대장은 무슨, 조무래기지. 내상이 심해서 정신도 못 차린다. 설령 정신이 있어도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저 진을 돌파할 방법을 알고 있을 리가 없잖냐.”
“아, 그렇군요.”
“천 공자는 분명 신마림을 떠날 때만 해도 저 진법이 펼쳐지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저 진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료들이 필요하다고 했지.”
“음.”
“천 공자가 떠날 때를 노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만한 재료나 병력을 데리고 올 정도면 천 공자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즉 놈들은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것이고, 천 공자가 그 전에 저곳을 빠져나온 것은 순전히 운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
“그, 그런가요?”
“광혈과 손을 잡았으니 광혈에서 나온 무극수들이 있을 거다. 중요한 것은 그 숫자야. 전 중원과 한판 하려는 놈들이니 결코 많은 수를 파견하진 못했을 거다. 당장 소뢰음사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
“다만 신마의 역사를 생각하면, 어중이떠중이를 보냈을 리는 없어. 광혈은 신마를 방계의 일종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병력과 책임자를 보냈겠지. 그래도 광혈의 무극수가 둘을 넘지는 않을 거다.”
연지평은 멍하니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턱을 쓰다듬으며 현 상황에 대한 분석을 말하는 연호정의 얼굴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연지평 역시 전략 전술에 대해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지만, 이렇게 날카롭고 빼어난 눈을 가지진 못했다.
‘형님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무공은 무공일 뿐이다.
전장에서 그 무공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전략이요, 전술이다. 힘도 써야 할 때 써야 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지, 무작정 뻗어 나가는 힘은 전세에 별 영향을 끼칠 수가 없는 것이다.
“여하간, 그런 이유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번 싸움은 장기전이 될 확률이 높아. 혹은 생각지도 못하게 빨리 진행될 수도 있지. 지금은 휴식도 취할 겸, 잠시 상대의 반응을 지켜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형님.”
“응?”
연지평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진정 뭐가 대단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서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즉, 연호정에게 이 정도 분석력은 지극히 당연하게 발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연지평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형님은 진짜 대단하세요. 제가 평생 노력하고 공부해도 형님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연호정의 얼굴이 온화해졌다.
“지평아.”
“예, 형님.”
“내가 왜 널 이번 싸움에 데리고 왔는지 아느냐?”
연지평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한숨을 쉬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본가의 소가주는 너다.”
“……형님.”
“한 가문을 이끈다는 것은 빠른 발전을 위해 오랜 시간 무공을 연마하는 것보다 열 배는 더 힘든 일이다. 나는 너에게 그런 힘든 일을 떠넘겨 버렸다.”
“혀, 형님! 그런 말씀 마세요.”
“가문을 이끈다는 것은 단순히 휘하 무사들의 무력을 끌어올리는 게 전부가 아니다. 때로는 장사치처럼 물건을 두고 흥정해야 하고, 때로는 별것 아닌 일로 머리를 숙여야 하며, 때로는 너의 일이 아닌데도 목숨을 걸고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
“하지만 그런 것은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섣불리 머리에만 담아 뒀다간 결정적인 순간 안 해도 될 실수를 하게 되겠지.”
연지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럴 때는 어떤 기준을 잡고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할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너란 사람의 본질, 너를 너답게 해 주는 요소를 들여다봐야지.”
“마음인가요?”
연호정은 가타부타 대답해 주지 않은 채 연지평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우웅.
은은하게 일어난 황룡기가 연지평의 심와(心窩)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아버지를 닮으려 하지 마라. 나를 닮으려 하지 마. 아버지와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위험에 처하거나 고민에 빠진 순간마다 나타나 만사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예. 알고 있습니다.”
“우리 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있겠지. 그러나 결국 도움을 받으려는 마음 또한 네 것이다. 너의 판단 아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끌고 온 이후,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아서 서운했지?”
연지평은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서운하다니요. 그럴 리가요.”
“그러냐?”
잠시 말이 없던 연지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서운하긴 했습니다.”
연호정은 크게 웃으며 연지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었지만, 그래도 연호정의 눈에는 어리고 귀여운 동생일 뿐이었다. 적어도 아직은 그러했다.
“이번 일은 너 스스로 깨닫길 바란다. 나는 절대 말해 주지 않을 거야. 서운하게 해서 미안하다.”
연지평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형님. 제가 부족해서 그렇지요.”
“다만 이것 하나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너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지 않은 것은, 네가 충분히 홀로 깨달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 이 세상이 두 쪽이 난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한때 나 자신의 못남을 인정하기 싫어 너를 질투한 적이 있었지만, 하늘에 맹세코 또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형님.”
“너는 천하에 둘도 없는 내 동생이다. 그래서 너를 믿는 것이다. 네가 날 따라 줘서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너라서 믿는다는 거다.”
연지평은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왠지 감동스럽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에는 내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틀렸어. 나에게도 재능이 있었다.”
“저는 형님만 한 천재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지금 그보다 더 대단한 천재를 보고 있다.”
“예?”
“네가 있잖느냐?”
“혀, 형님. 저는…….”
“핏줄은 핏줄인지, 너도 나처럼 그런 부분은 도통 인정을 못 하는구나.”
연호정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너 자신을 믿어라. 그러면 답이 보일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너를 믿는데, 너 자신은 스스로를 못 믿는다면 그처럼 힘 빠지는 일이 또 없을 것이다.”
“…….”
“다치지 마라. 네 어깨에 새겨진 검상 하나에 아버지와 나는 팔이 잘린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말을 하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젠장, 사지로 끌고 온 주제에 할 말은 아니구나. 이 말은 잊어라.”
잊으라고 말했지만, 연지평은 평생 그 말을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형의 그 말에서 진한 정과 진심이 묻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지평은 등을 돌린 채 걸어가는 형의 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두 시진 후.
어둠이 깔린 하늘, 헤아릴 수 없는 별이 반짝이던 그때.
귀신은 느닷없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