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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20화 (920/963)

920화. 천적(天敵) (1)

퍼버버버버벅!

비탈길을 내려온 철마단원은 이백이었지만, 그중 일행의 앞에 도달한 인원은 백이십에 불과했다. 연호정의 도끼질에 사십이 날아갔고, 묵비의 초고속 연사와 당관의 암기에 또 사십여 명이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쩌저저저저저정!!

당관과 묵비의 공격력은 누가 봐도 대단했지만, 기실 진짜 대단한 것은 옥청이었다.

태극혜검의 초식, 태극방산(太極放散)은 받아 낸 공격을 힘을 가해 돌려보내는 절묘한 무공이었다. 한데 그러한 초식을 범위만 넓혀 자신과 두 사람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내공 실린 단창의 개수가 워낙 많아서 옥청 역시 부담을 느꼈지만,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고 광범위한 공격을 막아 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혼원결, 혼원신공의 저력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다. 강렬한 마기 앞에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도가 최강의 신공은, 태극의 무도(武道)를 제대로 구현해 낼 수 있도록 옥청의 뒤를 단단히 받쳐 주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옥청 자신이었다.

‘혼원결이 이렇게 대단한 무공이었나?’

무당 역사상 손에 꼽히는 무신(武神)이 창조해 낸 신공이다. 당연히 대단한 무공일 수밖에 없다.

옥청은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혼원결을 단순한 내공심법으로만 여기고 수련해 왔다는 것을.

혼원결은 단순한 내공심법이 아니었다. 쌓이고 쌓인 그 힘은 곧 그가 지금껏 배운 무당 무공의 정수에 닿아 있으며, 그 자체로 깨달음의 보고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랬구나.’

산중 수련만을 고집한 스승이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유가 있었다. 굳이 그림자 진 세상사를 겪어 보지 않아도 신공에 모든 것을 압축시켜 놓았으니,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끊임없이 수련했다면 무종지벽은 진즉에 뚫고 올라갔을 것이다.

내공심법이 아닌 무당파 무공 그 자체.

만약 연호정이 태극발경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깨우치지 못했을 하나의 사실이, 이 순간 옥청의 경지를 또 한 걸음 나아가게 했다.

퍼퍼퍼퍼퍼펑!

일검(一劍)을 휘두르니 쏟아지는 단창들이 폭발하며 가루가 되었다.

압도적인 힘에 당관과 묵비조차도 놀랐지만, 옥청은 왜 이제야 이런 힘을 깨닫게 되었는지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 자책은 곧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자제로 다스렸으며, 자제된 마음은 어느새 호승심과 새로운 무공을 향한 흥분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옥청의 검이 또 한 번 허공을 갈랐다.

퍼어어억!

직선으로 나아가는 듯하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일검에, 철마단원 셋의 몸통에 사발 만 한 구멍이 뚫렸다.

압축된 검력의 힘이었다. 쏟아지는 검경(劍勁)에 태극무도를 실어 쏘아 내니, 극에 이른 부드러움이 곧 강함과 직결된다는 무당의 깨달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옥청의 눈이 번뜩였다.

파아아앙!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역시 직선이 아닌 곡선이다.

한데도 빠르다. 공기의 흐름을 타고 이동하는 제운종 신법은 이전에 펼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와 자유로움을 안겨 주고 있었다.

퍼버버버벅!

좌우 삼검(三劍)씩 휘두르니 철마단원 열다섯이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목이 날아갔다.

거리가 멀어도 상관없었다. 쏟아지는 마기를 잡아먹고 불타오르는 혼원기는 상식 밖의 거리라도 자연스레 위력을 살려 주고 있었다.

신공이 물을 만난 격이었다. 하지만 옥청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제대로 짚지 않았다면 이처럼 화려한 위력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건 뭐 장난이 아니구만.”

천독수 한 방으로 철마단원 둘의 머리통을 날려 버린 당관이 혀를 내둘렀다.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어. 뭐냐, 저놈? 저렇게 강했었나?”

피피피피피핑! 퍼버버버버벅!

신들린 속도로 철마단원의 목과 얼굴만 정확히 노리는 묵비의 궁술도 대단했다.

오히려 이곳에서는 당관의 살상 능력이 부각되지 못했다.

만천화우도, 융해삼생공도 전방위를 아우르는 절대살법이었다. 나 홀로 적진에 쳐들어가 깡그리 휩쓸어 버리기엔 제격이지만,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쓰기 어려운 무공인 것이다.

그렇다고 십방벽을 세우자니, 그럴 필요까진 없을 듯했다.

묵비의 내공량은 대문파 수장급 이상이었고, 옥청의 내공은 떨어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되고 있었다.

지치지 않고 적을 몰아치는 괴수 둘과 있으니, 굳이 당관이 나서서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묵비의 뒤로 돌아온 당관이 저 멀리서 단창을 던지는 철마단원들을 노려보았다.

‘요놈들.’

그가 손가락을 들어 한 사람씩 겨누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으아아아!”

“크악!”

단창을 던지던 마인들이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적을 상대하면서도 묵비와 옥청은 황당함을 느꼈다. 아무 공격도 당하지 않았는데 쓰러지고 있으니 이상할 만도 했다.

당관이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 거리를 격하고 쓸 만한 독 중에 그나마 괜찮은 게 표충독(表蟲毒)뿐이라.”

표충독은 살상력이 좋은 독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는 있었다.

농도에 따라 극단적인 가려움증을 일으키는 독이 표충독이었다. 심할 경우 정신없이 피부를 긁다가 근육까지 파내게 만들 수 있으며, 몇 가지 독을 배합하여 전신 피부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유발할 수도 있다.

즉살은 아니지만, 오히려 즉살보다도 지독한 독이라 할 수 있겠다. 당관의 성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독이었으나, 쓰임에 따라 효과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다.

“쯧. 좀스러워서 원.”

거리가 멀어서 표충독을 실어 날리는 데에 제법 내공을 써야만 했다. 물론 그의 내공량을 생각하면 별문제 없는 수준이었다.

파바바바박!

고작 십여 명을 중독시켰을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독의 무서움은 마인들에게도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단창을 던지던 마인들이 여기저기 이동하며 당관을 노리기 시작했다. 만도와 언월도를 휘두르는 마인들 역시 당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묵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피곤하게 됐네요.”

“아니, 차라리 잘 됐지.”

철마단원들의 움직임이 달라진 탓에 옥청 역시 두 사람 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당관이 두 사람을 뒤로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우우우우웅!!

그의 양손에 붉고 푸르고 누런 세 가지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통제된 독기라 기운을 끌어올린 것만으로 중독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양손에 머문 진기는 독공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막강한 기파를 뿜고 있었다.

“이 장법은?!”

옥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관의 안광이 사이하게 빛났다.

쿵!

강력한 진각과 함께 그가 전면으로 쌍장을 뻗었다.

뻗어 낸 쌍장에서 소용돌이치는 삼색의 기운이 화려한 돌풍과 함께 폭발했다.

콰르릉!!

“크아아악!”

섬뜩한 비명과 함께 전방 철마단원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직격을 당한 이들의 흉갑은 살벌하게 깨져 있었으며, 투구가 찌그러져 죽은 마인도, 팔다리가 꺾여 날아간 마인도 있었다.

하지만 멀쩡한 상태로 쓰러진 이들이 무려 오십여 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전방이 싹 쓸려 나간 것이다.

“……!!”

믿기 힘든 광경에 마인들조차 공격을 멈추고 멍하니 당관을 바라보았다.

손을 거둔 당관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장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삼양신장(三陽神掌)이 아닙니까.”

“용케 아는군.”

“본산 최고의 장법인 십단금(十段錦)과 비견할 만한 장법이 몇 개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소림의 대력금강이고, 세가 중에는 삼양신장이 있다고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검선 어르신이 그리 말씀하셨다고?”

“그렇습니다.”

당관이 쓰게 웃었다.

삼양신장은 파괴력 넘치는 장법이었지만, 십단금이나 대력금강장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 장법을 쓴 사람이 암왕 당형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버지는 삼양신장에 순수한 내공을 집약시켜 자신만의 파괴력 넘치는 무공으로 재탄생시켰으니까.

검선 탁무자 역시 그것을 보고 놀랐을 것이 틀림없었다.

“뭐가 됐든, 간만에 펼쳐 보니 구수하고 좋구만.”

당관이 품에서 비수 세 자루를 꺼내 들었다.

“뭣들 하는 거냐? 저 자식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거 안 보여?”

피피피피피핑!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묵비가 시위를 튕겼고, 옥청이 태극혜검과 삼절황검(三絶荒劍)을 연이어 펼쳐 냈다.

쉴 새 없이 적들을 몰아치는 젊은 신성(新星)들을 보며, 당관은 다짐했다.

적어도 아직은 이 녀석들에게 따라잡히지 않겠다고.

무극이고 나발이고를 떠나, 무림세가의 존장으로서 넘기 힘든 벽을 보여 주고야 말겠다고.

“빨리 날려 버리고 다음 싸움터로 가자.”

* * *

쿠웅!

무너진 벽면을 부수고 돌진한 연호정의 눈에 막 일어난 묵로가 보였다.

묵로의 안색은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두 눈에는 놀라움이 그득했다.

연호정은 용형보를 밟으며 일장을 내쳤다. 금룡이무의 하나, 금룡번천장(金龍翻天掌)이었다.

콰르릉!

부드러운 장력 속 폭발적인 경력을 심어 놓으니, 묵로 역시 무형마환장으로 응수했으나 충돌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재차 뒤로 날아가 버렸다.

파아아악!

연호정 또한 곧장 후방으로 몸을 날려 최대한 압력을 상쇄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묵로의 인기척이 씻은 듯 사라진 것을 느꼈다.

‘어디?!’

그때, 연호정의 왼손이 움직였다.

본능적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흘러나온 교룡쇄가 쭉쭉 늘어나며 묵로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묵로가 다급하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앙!

폭음과 함께 묵로의 몸이 출렁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이상은 안 된다는 듯, 이를 악물고 충격을 상쇄한 그가 교룡쇄를 재차 쳐 낸 후 무형마환장을 내쳤다.

쿠우웅!

연호정의 발밑으로 거대한 용신(龍身)의 환상이 일었다.

교룡쇄가 다시 움직였다.

콰드드드드득! 콰르르르릉!!

황룡기를 그대로 머금은 교룡쇄가 실제 용의 거체처럼 움직이며 궁전 내부를 휩쓸었다. 전후좌우에 머리 위 상부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종횡무진하는 사슬이 벽이며 철 기둥에 지붕 골조까지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거대한 궁전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몸을 뺀 연호정이 또 다른 궁전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콰아아아앙!

첫 싸움터였던 중앙 궁전이 기어이 허물어졌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와 사방으로 튀기는 돌 조각들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네놈은 대체.”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또 다른 궁전 뒤, 난간처럼 생긴 절벽 앞에 내려선 묵로의 얼굴에는 경악이 깃들어 있었다.

“네놈, 정체가 뭐냐!”

“…….”

“도대체 그 무공은 무엇이냐! 어떤 무공이기에 나의 마공이 아무 힘도 못 쓰는 것이냐?!”

나도 모르겠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그리 대답할 뻔했다.

“뭐가 되었든…….”

우우우우우웅!!

크게 기지개를 켠 황룡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묵로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연호정은 마치 자신이 황룡이 된 것처럼 묵로를 내려다보는 기분을 느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쩔래? 도망칠래?”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도발은커녕 농담도 되지 않을 말이다. 한데도 연호정은 자신의 이 말이 상대의 마음에 격동을 일으킬 거라고 확신했다.

과연 그 확신은 옳았다.

“이노옴!!”

콰아아앙!

절벽을 부수며 날아오는 묵로.

광룡부를 쥔 손에 힘을 준 연호정이 마침내 광풍구룡살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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