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화. 천적(天敵) (2)
짧게 여러 번을 내치는 장법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퍼퍼펑!
회전하며 휘두르는 광룡부에 무형마환장 네 발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묵로의 눈이 흔들렸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허공을 디디며 접근하는 연호정의 모습은 마치 보이지 않는 용의 등판을 밟고 나아가는 듯했다.
번쩍!
연호정의 춤사위는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왼손은 자연스레 뻗어 상대를 가리키고, 그토록 거대한 광룡부를 쥔 오른손은 검무(劍舞)를 추는 무희처럼 부드럽고 경쾌하게 움직였다.
광풍구룡살 일초, 무참(舞斬)이었다.
번쩍! 콰드드드득!
이어지는 춤사위.
미친 바람을 불러일으킨 연호정이 태극권을 펼치는 듯 자연스레 몸을 회전하며 하단에서 상단으로 광룡부를 휘둘렀다.
광풍구룡살 이초, 승공세(昇空勢)였다.
콰콰쾅!
절벽에 세 줄기 거대한 고랑이 새겨졌다.
고랑 하나의 길이가 족히 칠, 팔 장은 될 듯했다. 너비는 두 자에 가까웠고, 깊이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깊었다.
가히 파멸적인 공격력이라 할 만했다. 묵로는 연호정의 무식한 공격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위력을 자아내는 것이지?’
저토록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했음에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런 걸 떠나서라도, 단순한 무공의 경지만 보면 연호정은 확실히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고 높았다. 한 수 차이라면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단전이란 불안정한 것이라, 상태에 따라 한 수 차이가 무(無)가 될 수도 있고 더 큰 차이로 벌어질 수도 있다지만, 일단은 자신이 연호정을 밀어붙여야 옳았다.
결정적으로.
‘저런 공격력은…….’
절벽에 새겨진 흔적은 마치 태산처럼 거대한 괴수가 상상키 힘든 무게의 앞발로 내리친 것만 같았다.
저것은 정상이 아니다. 성마에 이른 고수에게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저만한 공격을 감행하고도 지친 기색이 없는데, 당대에 저런 체력과 내공력 그리고 파괴력을 갖춘 사람은 삼교에서도 다섯을 넘지 않았다.
‘비정상적이야. 그리고…….’
묵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놈은 내게 있어 최대의 난적이다.’
아직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지만, 싸움까지 급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묵로는 기쾌한 신법으로 연호정의 공격을 피해 내며 그를 살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자신의 빈틈을 노리던 묵로의 움직임이 돌변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관찰이라.’
연이어 광풍구룡살을 구사하려던 연호정이 공격을 멈추었다.
묵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그러시는가? 도끼질 안 할 건가?”
가만히 묵로를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광룡부를 던졌다.
콰앙!
절벽 중앙에 박힌 광룡부.
묵로가 있는 방향과는 한참 틀어진 곳이었다. 거대한 도끼날이 손바닥만 한 너비만 남기고 전부 박혀 버렸다.
“뭐 하자는 수작이냐?”
우두둑. 우두두둑.
주먹과 어깨, 목을 차례대로 돌리며 연호정이 말했다.
“맨손으로 승부를 봐야 할 놈 같아서.”
도발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묵로의 신법은 빠르고 변칙적이며 기척을 느끼기 힘들었다. 상단전의 모든 능력을 개방하면 끝까지 따라잡아 싸움다운 싸움을 벌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무공에는 저마다 쓰임이 있는 법. 적어도 지금의 황룡공은 그러했다.
연호정이 손을 까딱였다.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슬슬 들어오려무나.”
묵로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한참 동안 연호정을 노려보던 그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목계담의 모욕적인 발언도 웃어넘길 만한 심계를 가진 그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연호정의 말 몇 마디에는 자꾸만 감정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단순히 연호정의 도발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묵로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좋다.”
콱!
지팡이를 땅에 박아 넣은 묵로가 천천히 연호정을 향해 걸어갔다.
“제대로 확인해 주지.”
“확인만 하고 곱게 죽어 줘라. 피곤하다.”
훅!
묵로의 신형이 연호정의 우측 상단 일 장 거리에서 나타났다.
무형마환공과 짝을 이루는 신법, 유령십팔보(幽靈十八步)였다.
보법이자 신법이었다. 실체 없는 유령처럼 움직이는 묵로의 신법은 연호정조차 겪어 보지 못한 음험함으로 가득했다.
묵로가 무형마환장을 내쳤다. 연호정 역시 우장을 들어 금룡번천장을 밀어 넣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연호정의 상반신이 옆으로 꺾였다.
반면 공격에 나선 묵로의 신형은 뒤로 훨훨 날아갔다.
금룡번천장은 황룡신왕공의 내공과 직선으로 연결되는 파괴력 넘치는 기공술이었다. 그건 금룡진악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형마환공 역시 광혈교에서 손에 꼽히는 마공이었다. 파괴력으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데도 달려가서 공격한 묵로가 자리에서 받아 낸 연호정보다 더 멀리 밀려 나갔다. 허공이었다지만, 경지의 차이를 생각하면 분명 한 수 물린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묵로는 침착하게 허공을 밟으며 재차 연호정의 전면으로 접근했다.
부우웅!
연호정의 주먹이 움직였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나아가는 주먹 위로 산을 짓누르는 용의 앞발이 겹쳐 보였다.
묵로 역시 주먹을 말아 쥐며 무형정권(無形釘拳)을 내질렀다.
퍼어어엉!
대기가 요동치며 무너진 건물 잔해들에 실금을 만들었다.
땅이 쩍쩍 갈라졌다. 세 걸음을 물러난 묵로의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틈이 생겨났다.
투우우웅!
두 걸음 물러나 충격을 상쇄한 연호정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묵로의 눈이 커졌다.
‘뭐야?’
빠르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느리다.
치고 들어오는 공격선이 그대로 보였다. 마땅히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데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순간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떤 식으로 대응해도 떨쳐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받아쳐도 피해를 주지 못할 것 같았다.
묵로의 양손이 활짝 펴지며 전방위를 아우르는 쌍장 공력을 뿜어냈다.
콰르르릉!!
보이지만 않을 뿐, 그 힘은 성벽이라도 날려 버릴 것처럼 막강했다.
촤르르르륵! 콰앙!
어느새 뻗어 나온 교룡쇄가 수직으로 내리쳐지며 장력을 반으로 쪼개다가 대지를 후려쳤다.
쾅! 쾅!
쪼개진 두 줄기 장력이 건물 하나를 부수고 절벽을 뒤흔들었다.
오른손을 뒤로 빼 교룡쇄를 회수한 연호정이 변칙적인 박자를 이용, 묵로의 상체를 향해 각법을 뻗었다.
쾅!
묵로의 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런……?!’
발길질 한 방에 오 장 거리를 밀려나 버렸다.
각법을 막은 어깨부터 쇄골까지, 한순간 마비가 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결과 결을 이어 완벽하게 세운 무형마환공의 방벽을 일발 타격으로 깨부순 것도 모자라 충격까지 전달한 것이다.
파파팡!
재차 유령십팔보를 밟아 연호정의 후미를 잡은 묵로가 그의 등판을 향해 팔꿈치를 휘둘렀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적과의 일대일 교전에서 후미를 잡혀 본 적이 언제던가. 묵로의 신법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속도도 대단했고 기척을 줄이는 능력도 대단했지만, 일순간 오감을 방해하고 움직이는 상단전의 능력이 특히 돋보였다.
‘신법이다.’
퍼억!
본능적으로 상체를 틀었지만, 견갑골 부근에 타격을 입고 말았다.
천만다행히도 부러지진 않았다. 몸을 회전한 그가 그대로 묵로의 복부를 향해 장을 질렀다.
이미 복부를 노릴 줄 알았는지 묵로가 무릎을 휘둘렀다.
쾅!
묵로의 몸이 회전했다.
번천장의 힘을 그대로 이용, 회전하며 뒤꿈치를 도끼처럼 휘둘러 연호정의 머리를 노렸다.
퍼어엉!
묵로의 발이 땅에 균열을 만들었다.
한 발 뒤로 물러난 연호정이 쌍장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묵로의 몸이 훨훨 날아 부서진 건물 잔해 위에 처박혔다.
“…….”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우우우우우웅!
황룡신왕공이 점점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온몸을 꽉 채운 기운의 양은 그대로였지만, 기세가 더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상단전 때문이 아니었다. 상대에게 몰입해서 진기의 밀도까지 올라간 게 아니라, 그저 묵로라는 적을 만난 황룡신왕공이 알아서 힘을 부풀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놈의 무공 핵심은 신법이야. 상단전을 움직임 그 자체의 보조 수단으로 삼고 있다.’
묵로의 마공은 여러모로 대단했지만, 그의 진짜 장점은 움직임에 있었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연호정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부드럽게 오감을 흔드는 상단신기로 인해 안 그래도 빠르고 음험한 신법이 더더욱 완벽해진 것이다.
‘놀랍군. 사신귀안과는 전혀 다른 발상이야. 그보다 더 적은 힘으로 자신의 무공을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도록 보조한다.’
그때였다.
“……그렇군.”
푸스스.
돌 더미를 헤치고 일어난 묵로.
잔해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몸을 일으키니 먼지나 돌가루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대체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지만…….”
묵로의 얼굴에 침중한 기색이 어렸다.
그의 표정과 기세를 보며, 연호정은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이 내친 번천장을 일부러 받아 보았다는 걸.
‘어쩐지 좀 허무하다 했지.’
쿵!
잔해에서 나온 묵로가 연호정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네놈의 무공, 무형마환공의 상극이로구나.”
“그랬던가?”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난 잘 모르겠던데?”
“순간적인 진기 밀도는 분명 내가 한 수 위였다. 그런데도 네놈의 공격 한 방에 찢겨 날아가거나 무시되고 있다.”
“흐음.”
“무슨 무공을 익힌 거냐? 누구에게 사사했지?”
“내 생각에는 말이야.”
“설마하니 네놈이 고대 혈신의 무공을 익혔을 리도 없…….”
“상극 이전에, 그냥 네 실력이 떨어지는 거 아닐까 싶다.”
순간 묵로의 몸에서 폭발적인 살기가 터져 나왔다. 그 살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연호정조차 흠칫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고수를 만났지만, 이 정도로 짙은 살기를 뿜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자신을 제외하고.
“……좋다.”
발끝으로 땅을 툭툭 치던 묵로의 기세가 돌변했다.
조금 전에도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를 알아보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죽일 기세로 상대하지 않으면 절대 쓰러트릴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인정한 것이다.
“사지가 뽑히고도 그리 여유로울 수 있을지 보겠다.”
“사지가 뽑히면 죽지, 이 병신아. 그것도 몰라?”
“이놈!”
파아아아악!
묵로가 움직였다.
그리고 상대가 움직인다 싶은 순간, 연호정은 선수를 쳤다.
‘……?!’
찰나에 찰나를 쪼갠 그 순간.
묵로는 유령십팔보와 함께 적의 오감을 흐리는 무무마안(霧舞魔眼)을 구사하려다가 흠칫했다.
‘상단전……?!’
훅!
묵로의 눈이 흔들렸다. 어느새 연호정의 손이 자신의 목을 향해 짓쳐 들어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위험!’
슥.
묵로의 신형이 단숨에 연호정의 어깨 위를 타고 넘어갔다.
사신귀안으로도 잡아내지 못할 만큼의 반응 속도였다. 빠르고 절묘했다.
그때였다.
곧장 연호정의 등판을 갈기려던 묵로는, 시야를 가득 메운 거대한 손을 보았다.
‘익!’
퍽!
연호정의 큼직한 손이 묵로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콰아앙!
묵로의 얼굴을 쥔 연호정이 그대로 그의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상극인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네 움직임이 익숙해지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