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3화. 대종사(大宗師) (8)
“후욱!”
창백했던 옥청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한계를 넘어 부풀었던 혼원기가 잦아들며 그의 단전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혈도부터 신경, 근육까지 손상시킬 뻔했던 혼원기가 이제야 비로소 본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괜찮아?”
“예.”
심호흡을 하는 옥청, 혼원기를 완벽하게 갈무리했는지 불안정했던 기도가 안정적으로 변했다.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인 묵비는 문득 연호정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쿠구궁!
건물 하나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삼백여 장을 물러났는데도 공기가 마구 출렁였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나구나.”
무극에 이른 초고수들의 공방을 여러 번 봐 왔지만, 이렇게 지독하고 파괴력 넘치는 싸움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정녕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힘인가 싶었다. 그간 보았던 무극수들의 힘이 수준이 다르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면, 지금 저곳에서 벌어진 싸움은 아예 허구의 이야기 속 일처럼 느껴졌다.
“인간이 어떻게 저런…….”
그때였다.
“지금 저곳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당관의 말에 두 사람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강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빌어먹을. 저쪽 싸움이 뜻대로 안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제야 묵비와 옥청은 무서운 속도로 접근하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지이이잉!
옥청의 혼원기가 다시 요동쳤다. 묵비의 홍천기도 첨예하게 곤두섰다.
저 멀리,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를 직선으로 달려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막원 선배님?!”
막원이 누군가를 뒤쫓고 있었다. 한데 막원의 경신술로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옥청의 얼굴에도 강한 긴장이 떠올랐다.
“제가 느꼈던 그 기운의 주인입니다.”
혼원기가 제멋대로 출렁거려서 가까이 오는지도 몰랐다.
새삼 옥청은 느꼈다. 천하의 어떤 신공이든 주인의 마음이 바로 서지 않은 무공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렇군.”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마인의 다급함이 여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분명 저곳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관련이 있을 터.”
심란한 와중에도 최대한 냉정하게 분석하려 한다. 당관이 지닌 여러 장점 중 하나였다.
“저 싸움은 누구도 끼어들게 해서는 안 돼. 백병신군이 잡지 못했다면, 우리라도 도와야 한다.”
우우우웅!
제왕독공을 운용하는 당관의 몸에서 암녹색 광휘가 피어올랐다.
순간적으로 뿜어내는 기파는 대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있는 이들에게 독기를 전파하진 않는다. 독기의 운용 능력이 자유자재인 덕이었다.
적어도 아직은 그러했다.
“묵비는 지원 사격, 옥청은 알아서 대처해라. 저 짐승은 여기서 막는다.”
두 사람의 얼굴에 결단의 기색이 어렸다.
파아악!
비탈길을 타고 내려간 당관이 순식간에 평야로 내려섰다.
그 잠깐 사이에 야혁은 벌써 이백여 장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내려다보았던 거리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기가 질리는 속도였다.
하지만 당관은 놀라지 않았다.
막원도 잡지 못한 고수다. 저 정도 속도는 당연했다.
‘속도로 치자면 나도 지지 않는다.’
구파일방, 육대세가 정도 조직의 수장급 무력이라면 절대적인 속도에서 무극수에 뒤처지지 않는다. 다만 그 속도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막을 수 있다.’
뜬금없지만, 당관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강한 자존심이 고개를 쳐들며 외치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생각이 계시처럼 들었다. 막아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당연히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기도는 흔들리고 몸뚱이는 피범벅이 된 걸로 보아 막원에게 호되게 당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정도 상태로도 무극수는 차원이 다른 힘을 발산할 수 있다.
그렇다. 당관의 힘으로는, 묵비와 옥청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셋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저 짐승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된다.’
훅!
암녹색 광휘가 점차 진해지며 넘실거리는 독기로 화했다.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었다. 그가 품은 독기는 무극수들의 목숨마저 위협할 수 있는 지독한 맹독이었다.
그 맹독의 기운을 느낀 야혁의 표정이 돌변했다.
‘백병신군과 힘을 합쳐 잡는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 말랑말랑한 생각으로는 세 합도 버티지 못해.’
쿠르릉!
당관의 몸에서 일어난 암녹색 독기가 천년 세월을 버티고 성장한 거목처럼 마구 증식되었다.
‘싸가지.’
당관은 연호정의 무공을 떠올렸다.
극한에 이른 정신력으로 구현해 낸, 초식의 형태를 뛰어넘어 기(氣)가 지닌 본연의 힘을 끌어낸 상단전의 힘을.
당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왕일보(帝王一步).”
쿵!
내디딘 한 걸음에 땅이 울렸다.
그 잠깐 사이에 야혁은 벌써 백 장 안쪽으로 들어왔다.
당관의 양손이 올라갔다.
“제왕삼보(帝王三步).”
두 걸음 더 나아가니 어느새 당관의 주위가 온통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다.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당관이 퍼트린 독 구름을 통과할 수는 없었다. 야혁의 두 발이 미친 듯이 대지를 밟아 가며 속도를 줄였다.
‘그래야지.’
통과해도 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피해가 상당할 것은 자명하다.
그럼 결국 죽는다. 그의 앞에는 만독의 제왕이 될 자는 물론 신궁이라 불리는 여걸, 검선이 직접 가르친 천재 도사가 있었다.
하물며 뒤에는 실력 차이가 거의 없는 백병신군이 쫓아오고 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쿠르르릉!
삼 보를 내디딘 당관 주변으로 위험천만한 기운이 들끓기 시작했다.
십방벽과 융해삼생공은 구사할 수 없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치명적인 무공이니까.
그러나 제왕독공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제왕독공이 아니면 안 된다.
촤르르르르륵!!
사방으로 퍼져 나간 무형의 기운을 타고 수백 개의 암기들이 허공을 유영했다.
몸 어디에 저 많은 암기를 숨겨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묘기에 가까운 무공에 야혁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왕독공의 모든 것을 개방한 그였다. 웃을 수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도,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풀어헤쳤다는 사실만으로 웃을 수 있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사천당가 역사상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괴물의 자식이었다.
당관이 쌍장을 휘둘렀다.
콰르릉!
독무를 뿜어내는 제왕천독수(帝王千毒手)의 경력이 야혁의 좌우로 퍼져 나갔다.
이동할 수 있는 영역을 한 방에 줄여 버렸다. 야혁의 얼굴에 살기가 일었다.
“이 애송이가!”
콰앙!
통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 돌진하는 야혁.
순간 당관은 온몸의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무극에 이른 초고수의 압력을 온전히 받아 내는 그였다. 제대로 된 공격이 들어오기 전인데도 몸 이곳저곳에 통증이 일고 맹독을 들이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아버지인 암왕이 진지하게 기세를 피울 때와는 또 달랐다. 강력한 살기와 마기가 어우러지며 무공 전개 자체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
야혁의 기세는 아버지의 기세로 인해 익숙하다.
야혁의 살기는 연호정의 살기로 인해 익숙하다.
아버지와 연호정, 두 초고수의 기파와 살기를 생각하면 야혁 정도는 우습다. 우습다고 생각해야 했다.
‘이 정도도 못 버틸 만큼 나약하게 단련한 내가 아니다.’
당관의 쌍장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퍼퍼퍼퍼펑!
폭풍처럼 내지르는 장력이 야혁의 코앞에서 폭발했다.
훅!
독장이 분명하지만, 야혁은 그 경력을 뚫고 돌진했다.
독 구름이 너무 짙어서 막원도 진입하기 난해한 상황이었다. 마기를 동원해 온몸에 방어막을 두른 게 분명했다.
‘제왕사보(帝王四步).’
당관이 한 걸음 물러났다.
고작 한 발을 뗐을 뿐인데 후방으로 쭉 밀려 나갔다. 경신술을 쓴 것 같은 거리였다.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괴성을 지르며 돌진하는 야혁이 제왕삼보 거리 안쪽으로 진입했다.
훅!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독기가 일순 당관의 오른손 한 점에 집중되었다.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오른손으로 야혁을 겨누는 당관의 자세.
순간 야혁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당관이 입을 달싹였다.
‘제왕독공회천포(帝王毒功廻天砲).’
번쩍!
장심에서 폭발한 한 줄기 흑선(黑線)이 야혁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그야말로 빛살과도 같은 속도였다.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무조건 직격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무공이었다.
피슉! 쾅!
야혁의 귀를 스치고 지나간 흑선이 막원의 어깨 너머 후방 대지에 닿고 폭발했다.
굉음이 울렸지만, 폭발 자체는 요란하지 않았다. 다만 흑선이 닿은 땅이 융해공에 가까운 맹독으로 인해 녹아서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피했나.’
솔직히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해 냈다고 해서 당황스럽진 않았다.
상대는 무극을 돌파한 초고수였다. 어떤 요술 같은 행위를 보여 줘도 이상하지 않다.
“이놈이!”
야혁의 왼쪽 귀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살기가 극에 달한 야혁이 당관을 공격하려던 순간이었다.
촤르르륵!
허공을 유영하던 암기들이 서로 부딪치며 휘황찬란한 빛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함부로 진입할 수 없다. 야혁의 직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묵로의 죽음을 직감한 그였다. 심지어 이 폭발적인 마기는 방원후의 몸속에 잠자고 있던 ‘그분’께서 깨어났다는 뜻,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우우웅!
당관의 두 눈이 진녹색 안광을 터트렸다.
번쩍! 번쩍!
동시에 암기들이 빛살처럼 야혁을 향해 쏘아졌다.
쩌저저저저정!
아무리 대단한 암기술이라 해도 야혁의 손아귀에 닿으면 가루가 될 뿐이었다.
놀랍기 그지없는 마력이었다. 바위도 꿰뚫는 암기들을 손짓 몇 번으로 부숴 버리는 위용이었다.
‘안 되겠군.’
찰나지간, 야혁은 판단을 내렸다.
‘뚫고 간다.’
상대가 평범한 고수였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 망할 애송이 놈이 피워 내는 독기는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강력했다. 다행히 지금은 그 독기가 많이 사그라들었으니,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하고 뚫으면 될 것 같았다.
야혁이 두 발에 야수마기를 쏟아부었다.
그때였다.
‘……?!’
야혁의 눈이 흔들렸다.
시간이 느려진 듯, 혹은 나 자신만 느려진 듯.
머리가 띵하고 사지가 무거워졌다.
‘독?!’
순간 야혁은 왼쪽 귀를 잡아떼어 버렸다.
부욱!
뜯겨 나간 귀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치익! 소리를 내며 녹아 버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귀를 잡은 손바닥이 암녹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마기로 손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뚫은 독기가 손으로 전이된 것이다.
‘이럴 수가!’
전신을 꽉 채운 마기를 뚫고 귀에 상처를 낸 무공이었다. 당연히 손에도 피해가 갈 수밖에.
쉬이이익!
직선으로 쫓아오던 막원이 우회하여 돌아와 주먹을 내질렀다. 한참 떨어져 있었지만, 권풍은 닿고도 남을 거리였다.
콰앙!
야혁의 몸이 흔들렸다.
독기가 퍼진 손으로 막아 일부러 상처를 냈다. 터진 손바닥에서 쏟아진 독혈이 땅에 닿자 회색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때.
당관의 손이 다시 한번 야혁을 겨누었다.
“만천화우(滿天花雨) 쌍두룡(雙頭龍).”
콰르릉!
수백 개의 암기가 두 줄기 용체(龍體)로 나뉘어 야혁의 몸을 휩쓸었다.
극에 이른 독암의 위력, 무공 경지의 차이를 불문하고 생명의 위협을 주는 치명적인 살법이었다.
당대 사천당가 최고의 천재라 불리던 한 남자가, 마침내 선대의 재능을 위협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