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4화. 진실 (1)
“…….”
마른 고목 같은 노승이 눈을 떴다.
얼마 만에 뜨는 눈인가. 볼 위로 흘러내린 진물이 굳어 송목의 진액처럼 보였다.
노승이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많이 흐릿해졌다. 평생 연마한 불가의 내공도 어느새 삼 할 이하로 떨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괜찮다. 당장 죽지는 않을 듯하니까.
노승이 입을 열었다.
“어인 일이신지…….”
너무 오랫동안 말을 안 하고 지냈다. 말하는 중간중간 탁한 목소리가 툭툭 끊어지는 듯했다.
“실로 오랜만에 깊은 명상에 들었습니다. 짧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깊었지요.”
그때, 그의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림자가 물었다.
“평온하였던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불법의 낱알 하나 깨치지 못한 땡중입니다. 깨달음이 깊지 못하니, 평온할 수도 없지요.”
“가장 나태해질 수 있는 환경에서 그만한 깨달음이라면 충분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
노승이 미소를 지었다.
어찌나 말랐는지 목내이를 연상케 할 정도의 외관이었지만, 힘없는 그 미소는 몹시 인자해 보였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어떻습니까. 몸은 괜찮아지셨습니까?”
“덕분에.”
“허허, 다행입니다.”
노승의 등 뒤에 선 그림자가 천천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노승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무장 어른.”
“아직도 날 그리 부르는가.”
“저는 충분히 오래 살았습니다. 물론 무장 어른 앞에서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만.”
“오래 살았지. 내가 비정상일 뿐.”
“허허.”
“하지만 더 오래 살 수 있네. 적어도 그대의 제자가 권신(拳神)의 칭호를 이어받을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칭호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애초에 내가 아니면 짧아질 수명도 아니었어. 나는 그대에게 책임감을 느끼네.”
“그래서는 안 됩니다.”
“…….”
“무장 어른 덕분에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민초가 살았습니다. 천하를 구한 은공을 도울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더는 살아서 숨 쉴 이유가 없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림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반 각 후.
“시간의 흐름을 잊은 지 오래되었네. 그래서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어. 얼추 오 년에서 팔 년 사이 같군. 어쩌면 더 오래전일지도 모르지.”
“…….”
“신옥(神玉)이 깨졌어.”
“……!!”
노승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깨졌다고요?”
“그렇다네. 그 물건이 깨졌는데도 큰 감흥이 없는 걸 보니, 새삼 많이 무던해졌다는 걸 느끼네.”
무던해진 걸 넘어서서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이란 것이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신옥은 이 그림자가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해 준 물건이었다. 말하자면, 신옥이 깨졌다는 건 그림자가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뜻했다.
“내 몸이 멀쩡했더라면 깨진 즉시 찾아왔을 것이네. 와서 그대의 몸에 자리 잡은 지옥기(地獄氣)를 회수했겠지.”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대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네. 지금도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이제 그 감정이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도 모르겠어.”
노승은 서글픔을 느꼈다.
이 그림자는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생존해 왔다.
무장일 때도 천하를 위해 살았고, 시간을 뛰어넘을 때도 천하를 위해 살았다. 그리고 이제는 감정이 마모되어 평범했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기도 힘든 괴물이 되어 버렸다.
“이제 내게 남은 감정은 하나뿐이라네. 아니, 그게 감정인지는 모르겠네만 원하는 게 있어.”
“무엇입니까?”
“평온.”
“…….”
“처음 백 년은 좋았네. 다음 백 년째부턴 힘에 부치더군. 그리고 지난 십수 년간, 나는 내가 왜 살아 움직이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지 못했네.”
“이유가 있어야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지.”
그 대답에서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 그렇게 느껴서 그렇다고 하는 건지, 그저 몸에 밴 보편적인 반응을 보여 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친 것 같네.”
“고생하셨습니다. 그러니 여생은 즐겁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여생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평온할 수 없어.”
“무장 어른의 삶을 살아 보지 못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기억합니다. 십 년 전 무장 어른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을, 그때의 그 눈빛을.”
“내가 무어라고 했지?”
“언젠가, 언제고 연이 닿으면 본인이 갈고닦은 평생의 공부를 후인에게 전해 주고 싶다고 하셨지요.”
“…….”
그림자의 기운이, 어쩐지 조금은 흔들리고 있다고 노승은 생각했다.
노승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재능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성품 좋은 사람도 많지요. 그러니 무장 어른께서 평생을 연마하고 쌓아 오신 그 공부, 후인을 찾아 건네주시지요.”
“아깝긴 하지.”
“물론입니다.”
“그러나 후인을 찾겠답시고 또 천하를 이 잡듯 뒤지는 것도 귀찮은 일이야.”
“물론 반드시 후인을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른께서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살았습니다. 하물며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타인을 위해 목숨 걸고 사셨지요.”
“그랬나? 내가 정녕 그랬던가?”
“어쩌면 그 또한 무장 어른 본인을 위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지요.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어른께서 자기 자신과 깊은 대화를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산을 뒤흔드는 내공이 없어도, 바다를 가를 만한 무공이 없어도, 천하의 이치를 꿰뚫는 눈이 없어도 오래 살다 보면 그런 것은 알게 됩니다.”
“…….”
“달리 말하면, 어른께서는 저보다 훨씬 오래 사셨음에도 아직 그것을 모르고 계신다는 뜻이지요.”
노승이 눈을 감았다.
“목적 없이 거닐 뿐인 삶이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평온은 죽는다고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제자를 구하려 해도 좋고,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좋습니다. 저는 적어도 무장 어른께서 좋은 휴식을 취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휴식…….”
“죽으면 평온이 온다…… 그렇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온은 완결(完決)이자 종료(終了)를 뜻합니다.”
“…….”
“천하의 많은 사람이 뜻하지 않게 인생을 종결짓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지요.”
“…….”
“불행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힘든 삶을 사셨으니 남은 인생만큼은 살아서 평온을 얻는 법을 궁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 아닙니까? 살아서 얻을 수 있는데, 가장 편한 죽음의 길을 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그대 말도 일리는 있어.”
“그리 생각해 주셨다면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실, 신옥이 깨진 시점에서 나는 달라졌어야 했네. 한데도 이러고 있는 걸 보면 그대 말마따나 죽음은 아직 이른 모양이야.”
“허허허.”
“다만 이상한 게 있네.”
“어떤?”
그림자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드디어 미쳤는가 싶었는데, 그대와 얘기를 나누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군.”
“누군가의 부름을 느끼셨단 말입니까?”
“그 부름을 듣고 명상에서 깼네. 정확히는, 그 부름을 들은 후 꿈을 꾸다가 깼어.”
“어떤 꿈입니까?”
“제자에게 마지막 남은 길을 열어 주는 꿈.”
“……!”
“아니, 마지막인지는 모르겠네. 그저…… 마치 오래전 가르쳤던 제자가, 기특하게도 황룡에 이르러 이런저런 말을 했던 것 같네. 그 부분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아.”
다시 눈을 뜬 노승의 얼굴에 격동이 일었다.
황룡.
무공이지만, 무공이 아니기도 한 그 무엇.
대단한 신공이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깨달음이었다. 도(道)는 말로도, 글로도 형용하기 힘든 것처럼 황룡 역시 무학의 도(道)라고 할 수 있었다.
즉, 황룡을 깨우쳤다는 것은 승려가 불법에 통달하여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노승은 황룡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불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사람은 불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그 옛날 지옥기를 받아 냈을 때, 그림자와 반나절이 넘는 담론을 나누었다.
그 담론 안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학의 이치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림자는, 지금껏 늘어놓은 무학의 이치를 한데 담아 놓은 것이 바로 황룡이라고 말했다.
황룡. 황룡제(黃龍帝).
그림자, 아니 황룡제와의 담소로 노승의 경지는 두 단계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노승은 깨달았다. 자신에게 있어 무(武)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동시에 진정한 무(武)란 불법처럼 말로도, 글로도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다행이구나.’
휘하에 두지 않은 제자가 황룡을 열었다는 건, 그만큼 황룡제의 무의식이 제자를 원한다는 뜻이 아닐는지.
“꿈의 내용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마음에 든다…… 그래, 마음에 들었지.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네.”
“왜 행복할 것 같습니까?”
그림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는 자식이 없다네.”
“그렇지요.”
“만에 하나 내가 제자로 삼을 만한 녀석이 있다면, 그 녀석은 내 모든 것을 주어도 괜찮을 녀석일 게야.”
“물론 그러실 겁니다.”
“고통스러웠던 내 인생에 모든 것을 건네줄 만한 녀석이 나타났다면 재능 따위는 상관없는 문제겠지. 그저…… 인연을 이을 만한 천품(天品)을 타고나지 않았을까.”
“…….”
“그런 녀석이 황룡에 이르렀다면, 나는 그 녀석에게 더는 조심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테니 그처럼 좋은 일이 있겠나.”
노승의 얼굴에 애잔함이 일었다.
나 자신의 증명을 위해서가 아니다. 제자가 기특해서가 아니다.
황룡에 이르렀다는 것은 곧 절대 무적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의 포문을 열었으니, 험한 세상에서 별다른 위험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 것이다. 안쓰럽지만 기특하고 애틋하지만 걱정스러운 제자가 이 거친 세상에서 목숨 걱정 없이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황룡제는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시는 게 아닙니다. 어른께서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누구보다 엄하고 자상하신 분입니다.’
노승이 웃으며 말했다.
“꼭 제자를 키우시길 바랍니다.”
“일단은 그대 몸에서 지옥기부터 회수해야겠네.”
“제가 정한 천명입니다. 괜찮으니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
그때였다.
훅!
황룡제의 기도가 일순간 뒤흔들렸다.
“왜 그러십니까?”
“…….”
“무장 어른?”
“……황룡이다.”
“예?”
“…….”
“무장 어른.”
“황룡을 느꼈네. 아니, 이게 느낀 것인지 뭔지…….”
“……?”
“당금 천하에, 나 말고도 황룡을 깨우친 이가 있었던가?!”
노승은 황룡제가 진정 황룡공을 익힌 사람을 말하는 건지, 무(武)로써 도(道)에 이른 사람을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한마디는 할 수 있었다.
“가 보십시오.”
“…….”
“앞으로 십 년은 더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서 확인하고 오십시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노승은 그림자가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제자라…… 이 녀석아, 못난 사부는 불법의 끝자락도 보지 못했으니 너는 꼭 열반에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