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1화. 엉킨 실을 푸는 방법 (1)
천교홍이 매서운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의 표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천교홍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가?”
“…….”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사색광인이라 불리며 증오와 두려움을 한 몸에 받던 고금제일의 천재가 이렇게까지 무너지다니, 정말이지 세상일이라는 건 알 수가 없어.”
“…….”
“혈옥은 어디 있나?”
“혈옥이라.”
연호정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천교홍이 버럭 소리쳤다.
“혈옥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었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걸 알아서 무엇 하시게?”
“……?!”
천교홍의 눈이 흔들렸다.
“기억이 돌아온 것이냐?”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한다.”
다시 고개를 내려 천교홍을 보는 연호정의 눈빛은 지극히 차가웠다.
“너희들은 참 세상을 쉽게 산다고.”
“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믿고 싶은 것만 믿지.”
“……?”
“그것이 너희가 강하게 집결될 수 있었던 이유겠지. 동시에 너희가 위험한 이유이며, 그 강력한 힘을 갖고도 여태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닥쳐라! 네놈이 수백 년을 숨죽이고 산 우리의 증오와 인내를 아는가! 혈옥은 신물(神物)이자 마물(魔物)이야! 우리가 천하를 손에 넣었다 한들, 혈옥을 가진 이가 시간을 역행한다면 결국 우리의 패권은 뿌리부터 무너지게 될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시간을 역행하는 단 한 사람의 힘을 그리도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너희의 정복 사업이 올바르지 않다는 증거다, 이 머저리 같은 자식아.”
“이유가 뭐냐.”
천교홍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이유 말고, 어찌 네놈이 우리를 배신했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사색광인이 아니야.”
“헛소리!”
“사방무제도, 황룡제도 아니다.”
“말 같지도……!”
“그저 고금 제일의 천재라 불리던 사신무장의 제자일 뿐.”
“……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혼란스럽군.”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스승님께서 혈교 출신이었다는 건,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감당키 힘든 사실이었다.”
“……?!”
“그러나 네놈의 말처럼, 스승께서 혈교를 배신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판단이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닥쳐라!”
“절대 권력이 보장된 자리, 육신을 갈아탈 수 있는 능력, 궁극에 이르면 시간까지 역행할 수 있는 천고의 마물까지.”
“……?”
“무엇 하나 포기하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인 선택지가 한가득 차려진 인생인데, 뭐가 아쉽다고 혈교를 나와 천하를 위해 싸우셨겠는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너희는 절대 그분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들어 봤자 의미도 없겠지. 네놈들은 그저 스승님에 대한 증오로 복수 이외의 선택은 하지 않을 테니까.”
천교홍의 눈가가 살짝 떨려 왔다.
연호정의 말은 실로 옳았다. 그 어떤 거창한 이유를 들이댄다 한들, 사색광인이 나타난다면 삼교의 총력을 퍼부어서라도 죽이려 들 것이다.
“혈옥의 회귀 능력 때문에 숨어 살았다고? 웃기지 마라.”
“…….”
“그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야. 오랜 시간을 들여 중원을 공략한 끝에 발톱을 드리우기 시작한 것 또한 이제야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더냐?”
천교홍의 눈이 깊어졌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뭐, 어차피 네놈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상황이지. 곧 죽을 테니까.”
“…….”
“쓸데없는 데에 신경 쓰지 말고, 지옥으로 가서 열심히 고통받고 살아라.”
천교홍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지옥이라…… 평생 대권을 손에 넣기 위해 싸웠고, 광인의 혈옥 회귀를 신경 쓰며 살았다. 죽어서는 저승으로도 가지 못한 채 광혈을 위해 되살아났지.”
“…….”
“내 의식이 바로 선 이후, 단 한 순간도 지옥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내가 거기까지 알아줘야 할 필요는 없지. 차라리 잘 됐군. 평생 지옥같이 살았다니 통쾌하기라도 하네.”
“나 하나가 아니다.”
번쩍!
천교홍의 안광에 진한 살기가 일었다.
“지옥 속에서 산 것은 나 하나가 아니야. 역대 교주들은 물론 후계자가 되지 못해 죽어 나간 이들도, 그 외에 무수히 많은 신도도 지옥을 겪었다. 사색광인, 네놈 하나 때문에.”
“네놈이 날 스승님이라고 여기는 것도 내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너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자는 벌레의 날갯짓 소리에 성가심을 느낄 뿐 긴장하지 않지.”
“……!”
“오늘의 대화, 즐거웠다. 네놈 덕분에 스승님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어.”
쩍!
광룡부를 든 연호정의 몸에서 다시 황룡기가 피어올랐다.
“혼자서 못 간다면,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마.”
천교홍의 얼굴이 굳어지는 순간.
‘……?’
연호정은 자신의 몸 안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뭐지?’
폭발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과격했지만, 그 충격은 결코 크지 않았다.
다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상이 아닌 상태, 멀쩡했던 몸이 갑자기 알 수 없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투두두두둑!
한번 시작된 폭발은 순식간에 몸 여기저기로 전파되어 또 다른 폭발을 촉발했다.
연쇄 폭발이었다. 도대체 뭐가 터지는지도 알 수 없는, 실제 충격은 하나도 없는 괴이한 현상이었다.
연호정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이게 대체…….’
그때, 사지로 뻗어 나간 수많은 폭발의 힘이 벼락처럼 가슴 한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쾅!
손에서 놓친 광룡부가 바닥에 떨어지며 살벌한 굉음을 냈다.
“컥!”
비틀거리며 서너 걸음 물러난 연호정이 쓰러지듯 주저앉아 가슴을 움켜쥐었다.
주르륵.
코와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연호정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멀쩡했던 내부에서 폭발한 지점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내상이 터지며 탁기를 유발하고 있었다.
심지어 내상을 입는 순간 온몸의 피부가 시퍼렇게 변했다.
피멍이었다. 체내 미세 혈관들이 터지고 혈도가 마구 이지러지며 끔찍한 고통을 일으키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상황. 지독한 고통에 눈앞이 핑핑 도는 순간에도 연호정은 이것이 무슨 사태인지 고민했다.
그때, 천교홍이 말했다.
“그것이 바로 오색지옥공의 힘이다.”
연호정이 부들부들 떨며 천교홍을 바라보았다.
푸스스.
천교홍의 몸 여기저기에서 미세한 가루가 흩날렸다. 그 가루는 서늘한 청해의 바람에 실려 서쪽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 죽음의 시작이었다.
조금씩 흩어지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천교홍이 말했다.
“오색지옥공은 만마(萬魔)를 지배하는 절대마공,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한들 구결이 가진 폐해까지 없애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크윽!”
“그래도 대단한 거야. 오색지옥공은 익히면 익힐수록 인성이 사라지고 상상을 초월하는 마기를 담아내지. 말하자면,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진짜 지옥의 공부다. 살아 움직이는 마귀가 되는 거야.”
천교홍이 씁쓸하게 웃었다.
“마귀가 되어 인세를 지배하니, 추종자들 역시 마귀가 될 수밖에 없지. 오색지옥공을 익혔던 자들은 그야말로 재앙이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하나같이 혈관, 신경, 근육, 내장에 이르기까지 몽땅 폭발하여 죽어 버렸다.”
“……!”
“인세에 허락되지 않은 기운을 몸에 담았으니, 인간의 육신으로는 그러한 기운을 버틸 수가 없는 것이지.”
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황금빛 찬연한 기운이 명멸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
치이익!
그의 몸 곳곳에서 불그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천교홍의 눈이 커졌다.
“설마 치료인가?”
“쿨럭!”
흐르는 피를 닦아 낸 연호정이 천교홍을 바라보았다.
지쳐 보이는 눈동자. 그러나 그 어디에도 죽음의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구결을 바꾸어 반마(反魔)의 무공을 만든 것이 스승님이라 하지 않았더냐?”
“……!!”
“네 말마따나 스승님께서 고금 제일의 천재라면, 그 자신도 익히고 있는 이 무공에 치명적인 제약을 남겨 두었을 리가 없지.”
아니, 황룡신왕공에도 제약은 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도 깊고 광활한 깨달음의 문이었다.
무의 경지가 높다고 개방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깨달음은 물론 무도(武道)를 대하는 자세, 살아온 마음가짐 등등 온갖 요소가 집약되어야 하며, 그 와중에 천운까지 있어야 열 수 있는 것이 황룡신왕공이었다.
이제야 연호정은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왜 황룡신왕공을 이토록 신비로운 경지와 하나로 만드셨는지.
‘황룡신왕공은 무(武)의 종결과 닿아 있다.’
무의 종결, 무의 끝은 무엇인가.
‘심검(心劍).’
호사가들이 말하는 심검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황룡신왕공이었다.
황룡신왕공은 단순히 더 강하고, 더 빠르고, 더 위력적인 무공이 아니었다.
황룡신왕공은 토대였다.
황룡을 깨달은 이의 몸을 지탱해 주는 토대이자, 깨달은 바를 가장 알맞게 구현해 주는 궁극의 내공 운용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하면 깨달음의 무공은 무엇인가? 심검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내 마음, 내 생각만으로 무공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벼락같은 일격을 염원하면 진정 벼락과 같은 속도로 무공을 구사할 것이며, 태산과도 같은 무게를 염원하면 주먹질 한 방으로 절벽도 무너트릴 수 있다.
그 자신의 내공과 육신만 탄탄하다면, 내가 원하고 상상하는 힘을 현실로 구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황룡신왕공이 궁극의 무공인 이유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전무결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
벼락같은 힘을 원한다 할지라도 실제 그만한 힘을 구현하기 위한 힘, 즉 내공의 양과 질이 충분하지 않다면 결코 뜻한 바를 이뤄 낼 수 없다.
연호정은 그것을 해냈다.
천교홍과 싸우며, 절벽을 무너트리고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고 위력적인 무공을 숨도 안 쉬고 쏟아부었다.
그 결과로 몸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지속적으로 선보였으니까.
다만.
“완벽한 치유는 불가능하겠지만…….”
연호정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러나 몸 곳곳에 든 피멍들은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극히 높은 밀도를 자랑하는 황룡기의 치유 능력과 육신을 본래의 멀쩡한 상태로 되돌리고자 하는 연호정의 강력한 정신력 덕분에 내상과 외상이 바로잡히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너처럼 죽지는 않을 것이다.”
천교홍의 눈이 흔들렸다.
“사색광인. 그대는 도대체 어찌하여 우리를 배신하고 그런 고약한 무공을 만들었단 말인가?”
“모른다니까. 나한테 묻지 마라.”
“진정 그대는 사색광인의 제자인가.”
“다 죽어 가는 놈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광인이라고 부르지 마라. 스승님께서는 위대한 분이시다. 광인이라는 말로 폄하될 만한 분이 아니야.”
“……큭큭.”
푸스스스.
천교홍의 어깨와 가슴이 푹 꺼졌다. 가루가 되어 날리는 살점 속, 허연 갈비뼈와 시커멓게 죽은 심장이 보였다.
“오색지옥공의 한계마저도 고쳐 버렸다…… 사색광인, 그대는 진정 하늘이 내린 괴물이로구나.”
훅.
천교홍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후욱!”
연호정이 가슴을 매만졌다.
사신기(四神氣)로 오장육부가 극에 이르도록 연마되지 않았다면, 황룡기와 의지만으로 몸을 치료하진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극한까지 연마되지 않았다면 황룡기를 열 수도 없었겠지.
어쩌면 사신기 자체가 황룡공을 일깨우기 위한 초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연호정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스승님. 당신은 대체…….’
쿵.
기절한 연호정이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