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7화. 엉킨 실을 푸는 방법 (7)
연호정은 꿈을 꾸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 꿈은, 황룡신왕공을 깨닫기 직전 꾸었던 그 꿈의 연장이었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산. 부서지고 잘려 나간 나무들 때문에 멀리서 보면 돌산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과 스승이 있었다.
“어떠냐?”
운기가 끝난 어린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빨라졌겠지.”
“그렇습니다.”
스승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사신기(四神氣)는 오장육부를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천하의 신공이다. 그 외에 헤아릴 수 없는 공능을 갖고 있으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인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자는 어떤 영역에서도 한계를 감당할 수 없다.”
“예.”
“오장육부를 잘 다스린다는 것은 곧 중단전를 제대로 연마했다는 뜻이다. 사신기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하나 혹은 두 가지의 내공심법으로 내부를 다스리는 여느 무림인과 달리 사신공은 장기별로 극에 이른 연마가 가능하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느냐?”
어린 연호정은 곧장 답하지 못했다. 질문 자체를 고민한다기보다는 신중함이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절대적인 부동심을 얻거나, 혹은 감정의 극단적인 발현이 가능하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정확하다.”
칭찬은 없었지만, 스승의 무뚝뚝한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명 기특함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의 자신은 스승의 감정을, 무심함 속에 드리워진 표정 변화를 알기 힘들었다. 제삼자가 되어 돌아보는 지금에서야 연호정은 스승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스승이 말했다.
“중단전을 잘 연마하면 부동심을 얻을 수 있고 오장육부가 튼튼해진다. 반면 사신기는 오장육부를 극단적으로 활성화시켜 중단전의 한계 없는 연마를 가능케 한다.”
“반대로군요.”
“반대다. 그래서 한때는 사신공을 두고 마공(魔功)이라 부른 이도 있었다. 딱딱한 무공만 익힌 이들이 보기엔 연성 방법 자체가 역천(逆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말은, 어느 정도 옳다고도 할 수 있다.”
“예?”
스승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흩어지는 구름 사이, 그리 밝지 않은 햇빛이 기를 쓰며 달리고 있었다.
“마기(魔氣)를 풀풀 풍기는 것만 마공이라더냐? 올바른 이치를 거스르는 것은 다 마공이요, 사공(邪功)이다. 중원인들이 말하는 좌도(左道)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 사신기는 성스러운 기운이다. 오히려 백도 정파라 불리는 이들의 어떤 신공보다도 더 깊고 깨끗한 기운을 발하지.”
“예. 그에 더하여, 저는 사신기로 얻는 중단의 연마가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 생각했느냐?”
“순리(順理)라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리를 따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사신공은 이치에 반하는 무공이 아니라, 순리로 향하기 위한 여러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예?”
하늘을 올려다보던 스승이 고개를 내렸다.
“나는 네 나이 때 한 번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경험과 좌절을 겪은 후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을 때 그것을 깨달았다.”
“아…….”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황룡을 열었다.”
“그, 그러셨군요.”
“어쩌면 너는 나보다 훨씬 더 빨리 황룡에 이를 수도 있겠다.”
어린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제겐 그럴 만한 재능이 없습니다.”
“무공이 어디 재능 따라 올라간다더냐.”
“그렇지 않습니까?”
“재능을 무시할 수는 없지. 그러나 진정한 무도(武道)란 끊임없는 자기 수양과 시기적절한 수련으로 꽃을 피운다.”
“시기적절한 수련이란 어떤 것입니까? 하루하루 끊임없이 연마하는 것이야말로 무공의…….”
“당연히 끊임없이 연마해야지. 그러나 오늘 백 관 무게의 돌을 들고 일 년 뒤에 이백 관 무게의 돌을 들었다면, 십 년 뒤에는 몇 관짜리 돌을 들겠느냐? 천 관의 돌을 들고 수련할 것이냐?”
“……!”
“수련은 삶 속에 있다. 삶은 언제나 변화를 추구하며, 하루하루 내 마음과 상황이 같지 않다.”
“…….”
“당연히 수련도 달라져야겠지. 돌을 들고 나르면서까지 수련해야 할 때가 있고, 좌선을 통한 명상으로 나 자신의 지식과 감정을 면밀히 들여다봐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리고 때로는 적과 생사결을 나눠야 하는 순간도 있겠지. 결국 같은 무공을 익혔다 해도 사람에 따라 수련의 양과 질, 방향이 전부 달라지는 것이니라.”
연호정은 무척 놀랐다.
‘저런 대화를 나누었구나.’
황룡을 얻기 전에도 그랬지만, 참 많은 것을 잊고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스승의 가르침은 겹치는 것보다 겹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았다. 그만큼 방대한 지식과 깨달음을 지닌 분이었다.
“그렇다면…….”
“…….”
“수련이 달라져야 할 순간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습니까?”
“너 자신에게 물어보면 된다.”
“저 자신에게요?”
“진정 네가 하루하루 무공을 깊게 연마했다면, 너의 본능이 알아서 필요한 공부의 종류를 알려 줄 것이다.”
이 또한 연호정의 기억에는 없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얼핏 기억이 날 것도 같은 말이었다. 다만 지금껏 스승의 저 말을 지표 삼아 수련한 적은 없었다.
지금 이렇게 들어 보니 새삼 기억이 났다. 황룡공을 깨닫기 전 꾸었던 꿈과 똑같았다.
“오늘은 이만 자거라.”
“아직 날이…….”
“그간 운공으로 수면을 대체해 오지 않았더냐. 사람은 잠을 자야 한다. 설령 네가 황룡에 이르렀다 한들 잠을 포기해선 안 된다. 수면이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의 모든 부분을 회복시키는 천연 치유제와 같다.”
“알겠습니다.”
어린 연호정은 고개를 숙이곤 그대로 누웠다.
베개도, 이불도 없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 누운 어린 연호정은 열을 세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순간 연호정은 깨달았다.
‘설마?’
수면에 빠진 제자를 보며, 스승의 표정이 변했다.
기억에 없는 그 얼굴은 분명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둥글게 휘어진 눈.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은 다 사라지고, 한 점 어색함이 없는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가 연호정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스승이 입을 열었다.
“지난 오 년여의 시간은 참으로 꿈만 같았구나.”
역시 그렇다.
연호정이 꾸는 이 꿈은, 바로 스승이 말없이 사라지기 전날이었다.
“어쩌다가 너처럼 위험한 녀석을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천도(天道)란 신비롭구나.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스승이 잠에 빠진 제자의 옆에 앉았다.
제자의 이마 위로 늙수그레한 손이 올라왔다.
“무엇 하나 확신하기 어려운 이 세상에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인연이라고 보았다. 천품이라고 보았어.”
스승이 눈을 감았다.
“나와 네가 만난 것 역시, 너의 천품을 알아본 나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 비로소 이어진 인연이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제지간이란 곧 하늘이 내린 인연이니, 이는 천륜으로 얽힌 부모 형제와 다를 바 없도다.”
묘한 목소리였다.
연호정은 스승의 목소리가 마치 노랫소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스며든다. 멋들어진 기교도, 구슬픈 음률도 없지만 온몸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
“그러나 어제, 내 생각은 바뀌었다.”
스승이 눈을 감았다.
“너와 내가 만난 것은 정해진 인연 따위가 아니었다. 우리의 사제지간은 내가 아니라 네가 만든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연호정은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의 천품이 뛰어나다고 여겼다. 비록 바다와도 같은 한과 증오로 매몰되어 있었지만, 타고난 천성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도 같았기에 나는 너를 선택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번쩍!
다시 눈을 뜬 스승의 얼굴은 마치 탈속한 도인과 같았다.
“내가 틀렸다. 내가 너의 천품을 보고 고른 것이 아니다. 너와 내가 태곳적부터 만들어진 절대적 인연으로 얽혀 있기에 이리 만난 것이 아니야.”
“…….”
“나를 스승으로 택한 것은 너였다. 애초에 그려지지도 않았던 인연이란 명화(名畫)의 밑바탕은, 나를 보는 너의 눈빛으로 완성되었다. 나는 그 그림에 채색을 했을 뿐, 네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이다.”
제자의 이마에서 손을 뗀 스승이 한숨을 쉬었다.
“너를 만나, 이 사부는 비로소 영혼을 물들인 지독한 심마지기(心魔之氣)를 이겨 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너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후우웅.
바람이 불었다.
복잡한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았던 연호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
스승의 어깨에서 하얀빛의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놓이는 동시에 벅차오르는, 너무나도 아리땁고 성스러운 기운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
들릴 리 없는 목소리.
제 어깨를 돌아본 스승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불그스름한 기운이 도는 작은 구슬이었다. 그 크기가 엄지손톱만 했는데, 꿈속에서 보는데도 등골이 서늘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었다.
“본디 이 물건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역천이요, 혼돈이다. 나의 선조는 통제할 수 없는 마물을 손에 넣고 자만하여 대자연의 순환에서 벗어나 영원과 같은 소멸의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자칫 온 천하의 사람들을 억겁의 미아(迷兒)로 만들 뻔했지.”
“……!”
“이 물건은 마물이요, 귀물(鬼物)이라 그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한다. 혈교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나조차 이 물건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구슬을 쥔 스승의 주먹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파삭!
스승이 다시 손을 펴자, 붉은 구슬은 사막의 모래보다도 더 고운 모래가 되었다.
그런데도 바람에 휘날리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대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물건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이 귀물의 주박(呪縛)에서 벗어났으니, 너로 인해 깨닫고 너로 인해 되찾은 나의 자아가 빛에 이르려 하는구나.”
스승이 잠에 빠진 제자의 이마 위로 붉은 가루를 뿌렸다. 바람에 휘날리지 않는 붉은 가루는 그대로 제자의 미간으로 떨어졌다.
가루는 쌓이지 않았다. 미간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라도 있는 것인지, 단 한 톨도 빠짐없이 모두 제자의 미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우웅.
어깨에서 날리던 빛의 가루들이 점차 온몸에서 일기 시작했다.
스승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의 광경. 연호정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신화와 전설로 회자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는 것을.
마(魔)의 씨앗에서 탄생한 최강의 마인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道)에 이른 것이다.
“스승님!”
“더 이상 신옥(神玉)은 없다.”
“…….”
“네가 너다운 삶을 살다가 귀천하게 되면 만나기 어려울 것이요, 너답지 못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홀로 외로운 역사를 반복하게 되겠지.”
“……!!”
“수천만 명의 존재를 지울 수 있는 마물을 부순 것은 네 덕분이다. 그러니 너도 역천의 복(福) 한 자락은 받아야 할 것 아니겠느냐.”
후우우우우웅.
스승이 흩어지고 있었다.
연호정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처음 백 년은 십 년처럼 살았다. 두 번째 백 년은 일 년처럼 살았다.”
“…….”
“그리고 널 만나게 된 마지막 백 년은, 내게 찰나와 같은 아쉬움으로 남아 천년의 기쁨을 맞게 했다.”
“……!”
스승이 눈을 감았다.
동시에 스승의 몸은 사라지고, 그가 남긴 목소리만 남았다.
“웃으며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