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49화 (949/963)

949화. 엉킨 실을 푸는 방법 (9)

“형님, 저 왔…… 응?”

연지평의 눈이 커졌다.

“누님?”

묵비가 창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지평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누님. 형님은 어디에……?”

“갔어.”

“예?”

묵비가 손에 쥔 종이 한 장을 흔들었다.

“이 서찰 하나 남겨 두고 갔어.”

“가, 갔다고요? 어딜요?”

“글쎄.”

묵비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번 청해행에서 당관에게 많은 것을 배운 그녀였다. 큼직한 싸움을 끝낸 무극의 고수들이 있어서 부각되지 않았을 뿐, 그녀가 없었다면 꽤 많은 사상자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도 아무 내색 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챙기는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다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었고, 그 피곤함은 연씨 형제나 당관과 대화를 나누며 잘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피곤해 보였다. 마치 그간의 모든 피로가 한 방에 몰려오기라도 한 듯 수척해진 표정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직접 말이라도 해 주고 가면 오죽 좋겠어.”

쓰게 웃는 묵비,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하는 연지평.

그때, 다소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간 건가.”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문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막원과 당관이 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당관과는 달리 막원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했다.

연지평이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막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연제가 다소 조급해하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 기가 팍! 하고 튀었거든.”

무한의 우주에 몸을 담지 못한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그들만의 감각이었다.

묵비는 그녀답지 않게 자조하며 말했다.

“이제는 그 영역에 오르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되어 버렸군요.”

막원은 괜스레 헛기침을 뱉었다. 연지평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당관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무의 경지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따라 그 사람을 이해하느냐 못 하느냐를 따질 거라면 나는 진즉에 싸가지와 연을 끊었겠지.”

묵비가 당관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당관은 벽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있었다. 느닷없는 연호정의 증발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가 연호정의 기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다.

“때로는 섭섭하고, 때로는 화가 날 수도 있겠지. 그 때문에 상대를 이해하고 싶지 않아 오랫동안 응어리진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도 있다. 사람은 다 그렇다.”

“…….”

“그러나 상대를 이해하고 싶다면, 상대와 더 나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해야 해.”

당관이 하는 말이기에 발언에 무게감이 실렸다.

그 부분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바보처럼 산 사람이 그였다. 심지어 피가 이어지지 않은 타인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와 이십여 년을 안 보고 살았다.

그런 당관의 깨달음이 묻어 나오는 말이라, 묵비도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천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간다 한들 그 말들이 서로의 가슴에 들어가지 않고 허공에 흩어진다면 무의미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와 많은 대화를, 분명한 상호 작용이 가능하도록 깊게 하는 것이지.”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걸 아는 나도 잘 못한다. 다만 가까운 사람의 기행에 화가 나고 답답할지언정, 연을 끊을 요량이 아니라면 대화는 꼭 필요한 법이다.”

“결국 상대를 이해하라는 것인가요?”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 상대를 이해하라는 것이지.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연을 끊으면 되는 것이야.”

지극히 단순한 말이지만, 단순하기에 쉽게 깨닫기 힘든 발언이었다.

팔짱을 푼 당관이 막원에게 말했다.

“우리는 조금 더 쉬다가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 녀석이 따로 움직였다면 나름의 일이 있을 터, 우리는 우리대로 행동하면 그뿐이오.”

“음, 가주의 말씀이 옳소.”

연지평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던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못난 꼴을 보였구나.”

“아닙니다, 누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도 한 번씩 말도 없이 떠나 버릴 때면 답답해. 말 몇 마디 해 주고 가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연지평이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이 그런 부분은 참 못됐지요.”

가만히 연지평을 보던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못된 형님이라도 보고 싶지?”

“물론입니다.”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쉰 묵비가 연지평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당분간은 더 머물다 가야 할 것 같은데 술이나 마시자. 창고에 좋은 술이 있더라.”

“천 공자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럼 허락받고 같이 마시지, 뭐.”

“좋지요.”

방문을 나서던 연지평은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연지평이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은 참,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또 멀어지시네요.’

* * *

천종운행비로 청해를 가로지르는 연호정의 신법은 고절해 보이면서도 무척이나 빨랐다.

황룡신왕공을 완성한 이후 전반적인 무공의 형태와 흐름이 전부 달라진 그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 바로 신법이었다.

천종운행비는 근본적으로 사신무에 속한 신법이 아니었다. 연가 비전의 신법으로, 내공심법에 따라 미세한 출력의 차이를 보이지만 무척이나 안정적이고 빠른 속도를 제공한다.

제대로만 익힌다면 어떤 내공으로도 빠르고 지구력 있는 이동이 가능하다. 무극에 이른 고수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세 자루의 도끼를 메고 있는 터라 맨몸보다는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말을 타고 이동할 때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청해를 탈출할 수 있었다.

홀로 이동하며, 연호정은 그간 신경 쓰지 못했던 천종운행비의 요결을 황룡공에 맞게, 그리고 자신의 몸에 맞게 바꿀 수 있었다. 금룡이무나 용형보법처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건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수련이었다.

그렇게 연호정은 감숙에 이르렀다.

밤이 되면 모닥불을 피워 잠을 청했고, 날이 밝으면 이동했다.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거나 맑은 물을 찾아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소화가 되면 다시 달렸다.

딱히 마음 급하게 서두른 건 아니었지만, 오직 신법을 수련하는 마음으로 이동했기에 그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며칠, 그리고 또 며칠.

청해에서 감숙을 지나 섬서로 진입한 연호정이 어느 야산 정상에 올랐다.

어두운 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과 휘영청 뜬 달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은 봇짐에서 새 옷을 꺼내 들고 냇가로 가서 반나절이 넘도록 씻었다.

말끔하게 몸을 단정한 그는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고는 명상에 잠겼다.

하루라는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잠시 집중에서 깼지만, 다시 명상에 잠기자 이틀도 금세 지나갔다.

꼬리를 물고 다가온 사흘째에는 유독 해가 뜨거웠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또 한 번 집중이 깨졌지만, 이내 곧장 명상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닥쳐도, 뜨거운 햇살이 피부를 지져 대도, 산짐승의 독한 노린내가 밀려와도 연호정의 명상은 깨지지 않았다.

그 고독하고도 포근한 어둠 속에서, 연호정은 생각했다.

‘나는 왜 이곳으로 왔는가.’

행장을 꾸리고 출발했는데도 그는 자신이 왜 떠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달려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본능이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아야 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간 지금, 그는 이해하지 못할 스스로의 행동을 비로소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누구의 의지인가.’

나의 의지인가? 아니면 본능은 잡아냈지만 머리로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의지인가?

그도 아니면.

‘황룡.’

쿠르르릉!

황룡을 담은 가슴 속 거대한 동혈(洞穴)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 동굴 전체를 깨부수고 싶기라도 한 듯 똬리를 튼 황룡이 거세게 울부짖었다.

쿵! 쿵!

몸 안에 환상처럼 들어가 있지만, 너무나도 거대한 용의 몸체가 동굴 벽을 마구 후려쳤다.

그것은 분노의 몸부림이 아니었다. 다급함 때문도, 긴장 때문도 아니었다.

‘환희?’

그렇다. 지금 황룡기는 환희로 울부짖고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기뻐하는 거지.’

황룡은 영성을 지닌 기로, 명확한 객체인 동시에 연호정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모순적인 기운이었다.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다. 황룡신왕공을 일깨우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머리로 알아도 몸으로,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면 도달하기 힘든 영역이기 때문이다.

연호정은 황룡에 이른 후, 처음으로 황룡의 몸부림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근하다.’

걱정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황룡의 감정에 따라 연호정 그 자신의 심장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이 무언가 크나큰 분기점이 될 것 같은 느낌.

하나의 조(組)를 일구었으니, 신마림으로 향한 일행은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껏 자신이 져야 할 책임에서 눈을 돌려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그간의 모든 인연을 잠시 접어 두고서라도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막연하면서도 강렬한 본능에 따라 이곳에 도달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어떤 상황이 벌어지건 나는 그저 나인 채로 존재하면 그뿐이다.’

작게 다짐하는 연호정.

그러나 다음 날, 그의 평온하고도 강렬한 다짐은 뿌리부터 뒤흔들리게 되었다.

‘……?’

한참 명상에 들었던 연호정의 귀가 움찔했다.

동시에 현실과 명상 사이의 어딘가로 의식이 이동했다.

‘뭐지?’

나른한 와중에도 긴장을 느끼게 된다.

‘짐승인가? 아니면…….’

짐승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도 아니다. 생명체임이 분명한데도 어떠한 존재로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우우웅.

한참을 몸부림치다가 잠잠해졌던 황룡이 또다시 고개를 쳐들며 포효했다.

주르륵.

연호정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츠츠츠.

그의 미간에서 은은한 붉은빛이 새어 나오다가 흩어졌다.

번쩍!

비로소 눈을 뜬 연호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아닌데도 그보다 훨씬 더 밝은 달빛이 언덕에 내리쬐고 있었다.

흐르는 구름은 멋스러웠고, 반짝이는 별빛은 산란된 빛처럼 꿈틀거리며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유독 아름다운 하늘인지, 아니면 내 눈에 비친 하늘이 아름다운 건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두근!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치이이이이익!

그의 몸 전체로 뻗어 나간 황룡기가 금빛 연기를 피워 올렸다. 금빛 아지랑이를 두른 연호정의 모습은 달빛을 받아 비로소 완전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한 명의 노인이 있었다.

오래되어 허름하지만 깨끗한 백의, 등 뒤로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은 회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았지만, 마치 수천 마리의 용들을 두 손 가득 쥐고 다가오는 듯했다.

연호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내리쬐는 달빛이 진하게 울었고, 반짝이는 별빛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어둠의 불빛 속, 창백해진 대지를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오는 노인의 지친 얼굴에 놀라운 빛이 어렸다.

연호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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