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50화 (950/963)

950화. 엉킨 실을 푸는 방법 (10)

‘누구인가.’

노인은 이상함을 느꼈다.

달빛을 등지고 선 청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 놓인 거대한 도끼는 미세한 세공까지도 보이는데, 이상하게 청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느낀 감정은 감탄이었다.

‘놀랍도다.’

죽음을 허락받지 못한 육신으로 천하를 돌아다녔다.

너무나도 짧게 느껴진 삼백 년 세월. 그러나 천하를 주유하며 만난 사람들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했다. 그는 망각의 자유조차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이 청년 같지 않았다.

‘빛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음에도 이승에 발을 묶고 있다니.’

이유는 알 수 없다. 실제로 본인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저 청년의 공부가 태산의 정상에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그 정상은 단순히 무공의 성취만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경험, 그리고 무수히 많은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넘어 잡티 하나 없는 투명함으로 자아를 들여다본 자만이 오를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구도 저 나이에 저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혈교사(血敎史)에 비춰 보면 젊은 나이에 저 못지않은 경지를 구축한 마왕들이 극소수 존재했지만, 저처럼 깨달음까지 개화한 자는 단언컨대 한 명도 없었다.

당장 혈교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불리던 자신조차도 저 연배에 심신(心身)과 자아를 제대로 연마하지 못했다.

‘대단하다. 제대로 연마된 혼(魂)을 이렇게 마주하는구나.’

감탄에 감탄이 더해지는 순간.

청년을 살피던 노인은, 이내 온몸이 굳어지는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훅!

밝게 빛나던 세상이 단숨에 어두워지는 듯했다.

찬연하게 터져 나오던 달빛도, 태양처럼 반짝이던 별빛도 삽시간에 그 빛을 잃어버렸다. 창백했던 대지는 시커먼 어둠으로 가라앉아 끈적거렸고, 흐르는 공기는 진창에 빠지기라도 한 듯 무겁고 텁텁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노인의 감정이 어둡고 독해지자,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경지였다. 단순한 기세로 인한 착각이 아니라, 대자연의 빛과 어둠은 물론 공기의 밀도와 중력까지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고작 감정이 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숨을 죽인다.

그렇게 지독했던 사음교주도, 얼마 전 싸웠던 천교홍도, 전생에 궁극의 검력을 손에 넣어 검신(劍神)이라 불리던 모용군도 감히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자네였군.”

훅.

무저갱보다 어두웠던 세상에 다시 빛이 돌기 시작했다.

노인은 경직된 얼굴로 연호정을 보았다.

“자네였어. 저 먼 숭산의 그림자 속에 숨은 나를 이곳까지 끌어낸 사람이.”

떨리는 눈으로 노인을 보던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스승의 압도적인 능력, 하늘에 이른 무력에 대한 놀라움은 크지 않았다. 정확히는,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스승은 자신을 모른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간을 역행하여 스승과 만나기 전의 과거로 돌아왔다. 애초에 만난 적도 없게 되었으니, 자신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사실이 어찌 이리 마음을 불편케 하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구나.”

삼백 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의 감정을 바닥까지 마모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세월이었다.

노인은 연호정의 존재에 무척 놀랐지만, 그 놀라움이 평정을 잃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혈교지란이 끝나고 지금까지, 단연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목도하였음에도 표정에 큰 변화는 없었다.

노인은 살아 있지만, 동시에 살아 있지 않은 존재였다.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고 이승을 떠돈, 생명력 넘치는 유령이었다.

“어찌하여…….”

그가 기억하는 스승의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지독히도 낯선 목소리였다.

“어찌하여 자네에게서 황룡이 느껴지는 것이지?”

연호정은 미동도 없었다.

“어찌하여 자네는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눈을 뜨고 싶었지만, 뜨기가 두려웠다.

스승의 존재가 온몸으로 느껴졌지만, 자신을 낯선 눈으로 보는 스승의 얼굴을 보기가 싫어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도대체 자네의 정체가 무엇인가.”

순간 연호정은 머릿속에 대화 한 자락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도대체……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내 정체 따위가 아니다.’

‘……?’

‘중요한 것은, 너와 내가 앞으로 어떤 인연을 만들어 가는가다.’

처음 스승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처음 스승을 봤을 때, 연호정은 하늘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딱히 기세를 발하지도 않았고 일국의 황제처럼 비범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압도적인 위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랬던 스승이, 지금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정체가 무엇이냐고.

연호정은 마침내 눈을 떴다.

한참 동안 노인의 얼굴을 보던 연호정이 천천히 절을 올렸다.

노인은 자신을 향해 절을 하는 청년을 막지 않았다. 막는다고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딱 한 번의 절을 올린 연호정이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폈다.

스승을 올려다보며, 연호정이 말했다.

“중요한 것은 저의 정체 따위가 아닙니다.”

“……?”

“중요한 것은.”

인연.

연호정은 인연을 떠올렸다.

멸문한 가문을 뒤로한 채 천하를 떠돌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심신으로 산을 올랐을 적.

바로 그때, 하늘의 계시처럼 나타난 스승을 떠올렸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연호정은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이곳에 와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아니, 천리(天理)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와야 했지만 인간 연호정에게 이곳은 더없이 착잡하고 서글픈 자리가 될 것임을 깨달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중단전이 당장이라도 폭발해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스승이 그것을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자신 역시 서글픈 얼굴로 스승을 보내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것으로 스승님과 저의 인연이 완성(完成)되었다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연호정은 대답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어두웠지만, 다시 환한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얄궂지요. 그 오 년의 시간 동안 저는 스승님보다 저 자신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스승님의 은혜가 하늘과 같다는 것을 느꼈으니, 이렇게 배은망덕한 제자가 세상천지에 또 있겠습니까.”

“……?!”

“스승님께서도 못난 제자 녀석의 머리통을 때려 주기 위해서, 제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던 모양입니다.”

노인은 청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대체……?”

“돌이켜보면, 스승님께서는 제게 무공만 전수해 주신 게 아니었습니다.”

“뭐?”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이 눈물 때문인지 별빛 때문인지는, 적어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저는 무너지기 쉬운 놈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바위를 쳐 댔으니, 죽으려고 용을 쓴 격이지요. 그때, 스승님이 저를 막아 주셨습니다.”

“…….”

“약초를 찾다가 오백 근이 넘는 범과 마주했을 때, 스승님께서 제때 나타나 주지 않으셨다면 산군(山君)의 뱃속에 들어가 버렸겠지요.”

“…….”

“떼어 내려 할수록 깊어지는 증오와 한이 두 눈 밖으로 적들의 모습을 환상처럼 비출 때,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저를 막아 주지 않으셨다면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보게.”

“스승님은 저를 수도 없이 많이 구해 주셨습니다.”

“…….”

“그러나 그것보다도 한마디 말도 쉽게 못 하던 저에게 정을 나눠 주시고, 희망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 나아가 세상에 나갈 준비를 잘 시켜 주신 것이 제게는 훨씬 더 기억에 남습니다.”

“나는 자네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우웅!!

연호정의 가슴 속에 웅크리고 있던 황룡이 환상과도 같은 빛을 두른 채 모습을 드러냈다.

명치 밖으로 전신을 드러낸 황룡의 자태는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황금빛 비늘로 뒤덮인 몸체와 사슴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웅장한 두 개의 뿔, 그리고 바람에 따라 휘날리는 용수(龍鬚)와 무엇이라도 잡아 깨트릴 것 같은 다섯 개의 발톱이 그렇게 신비로울 수가 없었다.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현현환상(顯現幻像)!’

오색지옥공의 구결과 깨달음이 정확하게 일치되면 몸 안에 깃든 지옥수(地獄獸)를 끄집어낼 수 있다. 그것을 현현환상이라 한다.

품고 있는 기가 너무나도 거대하고 상단전의 깊이가 한계를 초월한 고수라면, 굳이 오색지옥공을 익히지 않아도 저와 비슷한 것을 보여 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생명력 넘치는, 억지로 쥐어짜 내는 것이 아니라 진기 자체가 또 다른 자아를 가지게 되는 무공은 고금에 둘뿐이었다.

연호정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신비로운 빛으로 물든 황룡이 꿈틀거리며 노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보십시오.”

“……?!”

“그 안에 스승님이 계십니다.”

노인은 저도 모르게 황룡에 손을 대었다.

그때였다.

번쩍!! 콰르르르릉!!

구름이 비켜 간 천공에서 한 줄기 시퍼런 벼락이 내리꽂혔다.

나타나서는 안 될 곳에서 출현한 벼락은 단숨에 노인의 몸을 잡아먹었다. 천둥은 벼락이 내리친 후에야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 하늘의 위엄을 알렸다.

‘헉!’

노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연호정의 황룡, 그 안에 깃든 무제(武帝)의 사념은 고스란히 원주인에게 돌아가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으니.

시간을 역행해도, 천하가 뒤바뀌어도 하늘에 이른 깨달음은 어디 가지 않는 법.

다만 앞으로만 흘러가던 역사가 싹둑 잘려 나가고, 텅 빈 허공을 채우는 시간의 채색 아래로 잘려 나간 역사는 한없이 깊게 떨어지며 메아리를 일으켰다.

그 메아리치는 역사의 한 조각을 들고 온 제자의 손에서, 비로소 등선지로(登仙之路)를 포기하면서까지 또 한 번의 기회를 안겨 준 스승의 중첩된 기억이 되살아났다.

수많은 장면, 수많은 대화, 수많은 기억이 협곡을 몰아치는 강물처럼 노인의 머리를 꽉 채웠다.

입을 떡 벌린 채로, 지나간 시간과 역사를 고스란히 느끼는 노인.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달빛은 점점 밝아져 환한 밤을 선물했고, 별빛들은 이전처럼 화려한 자태로 두 사제의 되돌아온 역사의 순간을 찬양했다.

스르르.

환하게 빛나던 황룡이 소리 없이 흩어지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노인의 몸에서 희뿌연 빛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저 빛, 가루와 비슷하면서도 환한 빛을 내는 저 기묘한 빛의 무리는 바로 스승의 육신이 허물어지는 광경이었다.

기억 속, 등선에 이르는 스승의 모습이 이번에는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스승님!”

“멀고도 멀고, 길고도 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노인의 얼굴에, 더는 혼란이 보이지 않았다.

“그 옛날, 바닥까지 추락한 영혼을 들고 와 죽은 눈으로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절규하던 어린 청년이, 인고의 세월을 거쳐 증오 속에서 되살아나 당당하게 개화(開花)하였구나.”

연호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같은 목소리지만, 또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낯설기만 했던 딱딱함은 어디로 갔는지, 무뚝뚝하면서도 정이 있고 무거우면서도 부드러운 그 목소리가 연호정의 귓가를 아득하게 울렸다.

“스승님.”

노인, 천인룡(天仁龍)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제야 너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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