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2화. 깨달음이란 (2)
연호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스승님.
몸은 물론 마음까지 피폐해져,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산을 떠돌아다니던 자신을 구해 준 일세의 은인이었다.
만약 당시 스승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황야를 떠도는 광인이 되었다가 눈먼 칼에 맞아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즉, 지금의 자신이 삼교를 막을 수 있게 된 것도, 나아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발전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스승의 은덕이었다.
그런 스승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은인이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다.
연호정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스승님.”
달리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인가.
꿈에서는 얼굴이 흐릿하게 나와 수십 년 만에 뵙는데도 이상함을 먼저 느꼈다.
생각해 보면 기억도 모호했다. 분명 스승님의 목소리와 행동은 명확히 기억하면서도, 그분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야 연호정은 자신이 스승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스승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의 변화만으로 자연기까지 조종하는 위대한 무신은, 기의 조절 능력이 극에 이르러 강한 의념만으로도 사람의 인지 능력을 증폭시킬 수도, 저하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절을 한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외양만으론 그리 특이하거나 특출한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어느 마을을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노인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의 얼굴엔 여느 노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눈빛이었다.
깊고도 깊게 가라앉은, 심연보다도 더 깊숙한 어딘가를 담고 있는 듯 신비로운 눈빛은 보는 사람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이마와 눈가, 볼에 팬 주름은 천년의 풍상을 이기고 살아남은 어느 거목의 표면과 같았다. 단정하게 맨 머리카락은 단 한 올의 예외도 없이 은백색으로 물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몸은 펑퍼짐한 옷에 가려졌음에도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의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탄탄했다.
연호정은 새삼 눈이 부시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비로소 스승은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스승과 같은 황룡을 연마했기에, 스승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신인(神人).’
신과 같은 인간이다. 그 말 외에 다른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멍하니 스승을 보던 연호정이 이내 표정을 굳혔다.
스르르.
스승의 어깨와 등 뒤에서 흩날리는 빛의 가루.
스승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스승님.”
후욱.
흩날리던 빛의 가루가 양을 줄여 갔다.
연호정은 스승이 잠시 등선을 막았음을 깨달았다.
“일어나거라.”
연호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인룡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스승의 손이 닿은 어깨가 왠지 시원하다고, 연호정은 생각했다.
“좋구나.”
어깨, 상완, 하박에 이어 손목을 잡는 천인룡의 손길에서 깊은 정이 묻어 나왔다.
“사신의 틀을 깨고 황룡에 이르렀으니 끊임없이 연마해 왔음을 짐작했지만, 육신까지 이리 훌륭하게 단련했을 줄이야.”
연호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스승의 온기인가. 자신의 팔을 쓸어 보는 스승의 손이, 그의 존재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하지만.”
손을 내린 천인룡이 미소를 지었다.
연호정은 스승의 미소를 처음 보았다. 이토록 분명하게 표정을 짓는 스승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연마된 몸과 기보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그 혼을 지금까지 유지한 것이 훨씬 인상적이다.”
스승은 혼을 말했다.
영혼. 지금의 연호정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개념이었다.
“사람이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타인과 마주하며 나 자신을 찾아야만 하는 법이다. 이 스승은 그것을 제대로 못 했다. 만약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삼백 년을 넘게 살았음에도 빛에 이르기는커녕 바닥을 전전하며 살다가 썩은 육신을 저승으로 끌고 갔겠지.”
“스승님.”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참 좋구나.”
연호정은 시야가 뿌예지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번도 이런 진심을 보여 준 적 없던 스승의 따뜻한 말이, 어떤 적의 칼날보다도 손쉽게 마음을 뒤흔들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언제고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안다.”
“제자가 불민하여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천인룡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스승의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고상하고 깊은 울림을 담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시원해졌다.
“네 스승이 황룡을 깨달은 것은 한 갑자를 넘게 살아온 이후였다. 너는 스승보다 훨씬 빨랐다. 하물며 다 커서 사신무를 접했으니, 너의 천품과 재능은 가히 청출어람이라 할 만하다.”
“스승님께서 안겨 주신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스승보다 못했던 제자들은 무엇을 변명 삼아 부끄러움을 이겨 내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스승님보다 빨리 황룡에 이르렀다 하여, 스승님보다 나은 무인은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사념의 기억 때처럼, 네 녀석의 말솜씨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사실을 말했을 따름입니다.”
천인룡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은 궁금했다. 신선의 경지에 오른 스승의 눈에 저 하늘은, 이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 것일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천인룡이 다시 고개를 내려 연호정을 보았다.
“밤하늘이 좋구나.”
“예.”
“잠시 걸을까.”
두 사제는 야산 주변을 걸었다.
“그것이 너의 병기냐?”
“그렇습니다.”
“한번 보자.”
연호정이 공손하게 광룡부를 건넸다.
한 손으로 광룡부를 들어 이곳저곳을 살피던 천인룡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대단한 병기로다. 철의 생기로 보아하건대 고대의 신병(神兵)은 아닌 듯하다. 제작자가 누구냐?”
“본가 인근에 솜씨 좋은 장인이 삽니다. 그분께서 만든 병기입니다.”
“솜씨 좋은 장인이라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술이다. 내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이토록 완성도 높은 병기는 몇 번 본 적이 없구나. 백 년 역사에 획을 그을 신장(神匠)이라 할 만하다.”
연호정은 스승이 누군가를 이렇게 칭찬하는 걸 처음 보았다.
등선 직전이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크게 성장한 제자를 보며 감격해서 그런 것일까.
스승은 과거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생생한 감정들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이 풍부한 감성만 보면, 정말 같은 분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천인룡이 광룡부를 다시 건넸다.
“천하의 명품이라도 다루는 자의 자격이 맞지 않으면 푸줏간 백정의 육도(肉刀)만도 못한 법이다. 황룡에 이르기 전, 어지간히 손에서 놓고 싶었으리라.”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너 자신의 일이기에 투명하게 보지 못했을 뿐, 타인의 무공과 병기를 볼 때는 너도 나 못지않은 시선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게다.”
전혀 그렇지 않다.
처음 광룡부를 얻었을 때, 연호정은 어떤 싸움이라도 광룡부를 쥐고 휘둘렀다. 병기의 중량감, 파괴력이 본인의 실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경지가 상승하자 어쩐지 광룡부를 쥐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자신의 무공 변화에서 찾았다. 실제로 광룡부를 놓고 여러 무리(武理)를 접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더랬다.
한데 그것이 자신의 변화 때문이 아닌, 오직 병기의 위대함 때문이었다니.
“신병(神兵)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본인의 기량을 한참 뛰어넘을 수 있도록 길을 알려 주는가 하면, 자격에 맞지 않은 이를 거부하거나 심지어 퇴보시키기도 하지.”
“……!”
“네 도끼도 그와 같다. 크기와 중량 때문에 너라도 쉬이 다룰 수 없는 병기였을 터, 출중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병기에 어울리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네가 여러 시도 이후 빠르게 성장했으니, 이 또한 신병이기의 위대함이라고 볼 수 있다.”
연호정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광룡부를 바라보았다.
어떤 병기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명품이라는 건 알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병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반면 네 허리에 달린 두 개의 손도끼는 다르다. 그 또한 신병이라면 신병이겠으나, 이 검은 대부(大斧)만큼의 혼이 실리진 않았어. 쥐고 휘두르기에 큰 부담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군요.”
“한낱 병기도 제대로 된 혼이 실리면 주인을 압도하는 법. 그 병기를 제작해 준 장인에게 목숨의 빚을 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훗날 꼭 시간을 내서 찾아가 보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자격이 있고 없고를 무의식적으로 느꼈다는 것은 너의 감각이 무척이나 예민하다는 뜻이다. 끊임없는 수련과 자기 수양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변화의 시기를 맞이할 수 없었을 게다.”
천인룡의 목소리는 마치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노랫소리와 같았다.
“세상은 다 그런 것이다. 타인에게서 자신을 찾는가 하면, 신외지물(身外之物)인 병기에게도 영향을 받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산길도, 밤하늘도,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도 우리를 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겠느냐.”
“…….”
“깨달음은 어디에나 있다. 어떤 형상이나 물질을 접하는 것으로도 사람은 변한다. 오감을 바짝 세워 항상 천하를 느끼도록 나 자신을 열어 두어야 비로소 성장의 가능성이 확률을, 수를 늘리는 법이다.”
천인룡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너는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예민하게 세상을 느끼려고 했구나. 남들보다 부족한 무재(武才)를 지니고도 누구보다 빨리 성장한 이면에는 언제나 주변을 보고 느끼려 하는 너의 천품이 깔려 있었느니라.”
연호정은 담담하게 스승의 말을 들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처음 스승이 본래의 기억을 찾았을 때만 해도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데, 막상 함께 걷기 시작하니 무척이나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스승의 말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과거 여유가 없어 주옥같았던 스승의 가르침을 많이 잊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도 짧다.
그 확정적인 이별 앞에서, 연호정은 발전한 자신의 모습을 스승에게 전부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겠지.”
“물론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
넉넉한 여유가 깃든 목소리.
연호정은 혈교에 관해 물어보려다가, 이내 마음을 접고 다른 의문을 꺼내 들었다.
“사신무(四神武)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전투 무공의 총화로서, 여러 세대를 거쳐 보완되었다가 이내 극도로 자유로운 형(形)을 갖추게 된 둘도 없는 무공이라 하셨습니다.”
“그랬지.”
“또한, 사신무를 연성한 자를 고래로 사신무장(四神武將)이라 일컬으며 어떤 전쟁이라도 종식시킬 만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또한 맞지.”
“그러나 황룡신왕공은 혈교의 오색지옥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요.”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고 천인룡을 바라보았다.
“사신무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사신무의 계승자가 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