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6화. 깨달음이란 (6)
특별한 밤이었다.
연기처럼 나타나 감당키 힘든 은혜를 주고, 나타났을 때와 같이 연기처럼 사라졌던 스승이다.
그런 스승이 또 한 번 홀연히 나타나서는, 잊었던 틈새의 기억까지 얻고 돌아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자에게 아낌없는 진심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연호정은 많은 것을 얘기했다.
그간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와 인연이 얽혔고 어떤 사건들을 겪었으며 어떻게 위협을 빠져나왔고 결과적으로 왜 그렇게 살았는지.
천인룡은 연호정의 얘기를 다 들어 주었다.
단순히 의무라서 들어 주는 게 아니었다. 천인룡은 제자의 인생 얘기를 들으며 진심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했고, 때로는 감탄했으며, 때로는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에게 천인룡은 누구보다 특별한 인연이듯, 천인룡에게도 연호정은 삼백 년을 훌쩍 넘는 세월 속에서 가장 빛난 인연이요, 깨달음으로 인도해 준 은인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는 관계. 등선지로의 깨달음을 얻어 홀연히 사라졌지만,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유일제자와 담소를 나누니 그 특별한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시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많은 얘기를 했는데도, 아직 얘기할 것이 많았다. 한 시진이 아니라 한 달을, 일 년을 붙잡고 얘기해도 아쉬울 인연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알고 있었다.
비로소 때가 되었음을.
바라 마지않던 스승과의 대화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지만, 이 인연을 마무리 지을 때가 왔음을 깨달은 것이다.
“스승님.”
“오냐.”
“스승님께서는 행복하셨습니까?”
천인룡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늘한 바람 속, 적당히 흩어졌던 구름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하늘 전체가 달과 별의 화려함으로 가득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너와 만나기 전까지는.”
“…….”
“내 인생은 언제나 험난했다. 세상 누가 있어 행복하기만 한 삶을 살았겠느냐마는, 내게 있어 인생이란 끊임없는 고민과 성찰, 깨달음으로 인한 신세계의 수레바퀴였다.”
“이해합니다.”
하늘이 내린 재능, 보통의 사람들은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떠올리지 못할 것을 떠올리는 재능을 타고난 분이었다.
주변 모두가 여유롭게 걸어가며 세상을 만끽할 때, 홀로 산길을 달려 나가 어린 나이에 정상을 차지한 천재의 외로움을 뉘라서 알 수 있을까.
하물며 그 산에서 내려오니 세상은 끊임없는 첩첩산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스승이었다.
그 막막함 속에서도 다시 산을 오르지 않을 수가 없어 뚜벅뚜벅 외로운 고행을 감행했던 스승에게, 삼백 년이 넘는 삶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나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너를 만나고 깨달았다.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
“남들 역시 자신만의 수레바퀴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상할 때를 엿보고 있었지.”
천인룡이 미소를 지었다.
“너처럼 말이다.”
“예.”
“혈교에 있을 때도, 혈교에서 나왔을 때도, 혈교를 제압하고 천하를 떠돌았을 때도 나는 누군가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승님 덕분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오직 나를 위해 그런 것뿐이다. 오히려 나는 중원 무림을 이용했어. 제아무리 나라도 혼자서 혈교를 상대할 수는 없으니, 함께 힘을 합쳐 저들을 물리치자고 이용했지.”
“목적이 맞았을 뿐,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달랐다면 피차 손을 잡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모든 것을 초월한 스승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자괴감 때문에 기분을 망칠까 싶어 연호정은 스승을 두둔했다.
천인룡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내 인생에는 언제나 나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내 주관으로 세상을 보았고, 나 홀로 깨달으려 했으며, 나는 나인 채로 만족하려 하였다.”
“…….”
“그러나 너를 만난 후, 나는 달라졌다. 지금까지처럼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길임을 그때 알게 된 것이다.”
천인룡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네 존재의 기꺼움 이전에, 참 화도 많이 났더랬다. 이놈은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 말을 안 듣는 것인지, 왜 덧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학대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지.”
“그랬지요.”
“하지만 나는 스승으로서 너를 올바르게 키우고 싶었다. 최소한 너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랐어.”
“…….”
“그렇게 애를 쓰며 깨달았다. 정작 너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나야말로 스스로의 인생을 증오로 물들이고 있었음을.”
천인룡이 걸음을 멈추었다.
달빛이 유독 환하게 드는 곳. 처음 연호정이 와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겼던 언덕 끝이었다.
“결국 나는 너를 가르치며, 나 자신을 고쳐 가고 있었던 것이다.”
연호정 역시 스승이 보는 하늘을 보았다.
고아한 달빛, 어둠으로 스며들어 주변을 환하게 물들이는 달빛은 마치 스승의 가르침과도 같았다.
“호정아.”
“예, 스승님.”
“행복해야 한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천인룡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행복이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풍부한 힘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그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려면 당연히 불행을 겪어야만 한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듯, 내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야 행복의 크기도 커지기 때문이다.”
“…….”
“고로, 행복하라는 말은 인생을 제대로 살라는 말이니라.”
행복하기만 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상대적이므로.
내 상황이 힘들 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로에 지칠 때, 사람은 때때로 쓰러지게 된다.
그러나 힘들게 땅 밑을 전전하는 사람에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권리가 있다. 하늘을 보고, 지금의 상황을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낸 사람에게는 크나큰 행복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그저 힘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 이 어찌 행복으로 가득한 삶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많이 울고, 많이 기뻐해라. 많이 힘들어하고, 많이 즐거워해라. 인생이란 어느 하나의 가치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즉, 어느 하나의 감정을 취사선택하여 단색으로 물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예.”
“그리고 너의 인생이,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도 버려야 한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스승님.”
“처음 세상에 나와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회귀하여 반쪽짜리인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해 도달한 지금 이 순간까지, 너의 인생에 무가치했던 순간은 없었다.”
“…….”
“그 모든 순간순간이 너의 인생을 장식하는 보석과 같다. 제대로 된 삶을 살려거든, 지금껏 너의 가슴을 붉고 검게 물들였던 기억 속 역사까지도 품에 안아야만 하느니라.”
연호정이 눈을 떴다.
삼교와 싸우면서,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산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격정의 나날들이었다.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그 과정에 쌓인 지독한 은원을 끝맺기 위해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싸움은, 과거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었다.
연호정은 그 피비린내 가득한 날들을 인생이란 책장에 꽂아 두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이 깊어졌다.
나는 왜 그 순간순간들을 나의 인생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스승이 옆에 있어서일까?
답은 금세 나왔다.
‘내 스스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호정은 자신의 나약함에 깜짝 놀랐다.
그렇다. 그는 삼교와의 전쟁으로 가득한 순간들이 자신의 인생을 침범하는 것 같아 싫었다.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나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치 제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스승이 눈을 감으며 얘기했다.
“네가 눈을 돌린 그 순간순간 속에서 터져 나온 찬연한 인연들을, 너는 결코 잊지 않았지.”
“……!!”
“너 역시 네 인생을 취사선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나처럼.”
연호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다시 눈을 뜬 천인룡. 그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만이 가득했다.
“스승이란 제자에게 기술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니라. 그간 얻었던 삶의 지식, 가치관, 나아가 인연과 이별까지도 전부 계승하는 것이 사제지간이다.”
“…….”
“그래도 내 제자라고, 너는 젊었을 적의 나와 비슷한 구석이 그렇게 많았다.”
“…….”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 스승은 말년에나 얻은 깨달음을, 너는 조금이라도 빨리 얻어 진정한 인생을 살길 바란다.”
“스승님.”
“고래로 스승에게 있어 청출어람의 제자가 나는 것보다 보람된 일은 없다고 하였다.”
천인룡이 연호정의 어깨를 두들겼다.
“너는 이미 나보다 빠르다. 그러니 스승보다 훨씬 더 빨리 인생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나를 스승으로 삼아 주어 고맙다.”
뿌옇다.
진탕되는 가슴.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지고 있었다.
연호정은 깨달았다. 이제 스승을 보내야 할 시간이 왔음을.
그러나 눈물과 아쉬움으로 보내 드릴 수는 없었기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정중하게 올리는 구배지례(九拜之禮).
절을 하고 다시 일어난 연호정의 얼굴에는 옅지만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다시 뵙게 되어 좋았습니다.”
“나도 그렇다.”
“스승님의 본가와 인연이 있는 이들이지만, 제 사람들 때문에라도 끝까지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천인룡이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는 그러지 않았더냐. 걱정하지 말고 뜻대로 하라.”
“언제고 그들과의 전쟁이 끝나면…….”
“그래.”
“그때 꼭 스승님의 묘를 만들겠습니다.”
“네 덕분에 얻을 깨달음 다 얻고 등선지로를 걷는 스승에게 묘는 무슨 묘냐. 다만 못난 스승을 추억하고 싶어 만드는 것이라면, 내 기꺼이 네가 만든 묘에 내려와 웃으며 제자와 대화할 것이다.”
“꼭 그래 주십시오.”
“훗날 자식이든 제자든, 네가 만든 묘에 데려와 인사나 한번 시켜 주거라.”
“물론입니다.”
“그래.”
“스승님.”
“오냐.”
연호정은 기어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저를 제자로 삼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환히 웃던 천인룡이 포권을 취했다.
스승과 제자가 아닌, 종사끼리의 예우.
스승 천인룡이 제자 연호정을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한 것이다.
“사신무 이십오 대 계승자 천인룡이 이십육 대 계승자 연호정에게 비로소 모든 것을 전수하였으니, 이십육 대 계승자 연호정은 그 역사를 중히 여겨 후대에도 우리의 빛이 전해질 수 있도록 선한 후사를 택하게.”
“명심하겠습니다.”
마주 포권하며 고개를 숙인 연호정.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손을 풀고 고개를 드니, 어느새 스승이 있던 자리에는 흩어지는 빛무리와 달빛만이 그득했다.
“스승님.”
연호정이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에 만족하고 흩어진 스승의 빛은 허공을 뱅뱅 돌다가 수많은 별빛 사이로 퍼져 나갔다.
연호정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연호정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