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61화 (961/963)

961화. 하늘을 뒤덮는 불꽃 (1)

“……!”

황제의 말에 청년의 눈이 묘해졌다.

감정적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말에 작은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반면 그를 제외한 일천 병력의 군기는 확 달라졌다.

후우웅!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강렬한 열기.

바닥에 깔린 흙먼지가 원을 그리며 흩어졌다. 손도 대지 않고 기파만으로 흙먼지를 날려 버리는 그 모습이 몹시 신비롭고 위험해 보였다.

한편 성벽과 성문 안에서 진을 치고 있던 무장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던 황제가, 신(神)에 이른 무공을 지닌 침략자의 행군에 직접 찾아와서 훈계하듯 말하고 있다.

이 상황이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통쾌하게 다가왔다. 황제와 함께라면 어떤 전투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이다.

“잘 왔어.”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눈썹 밑으로 푹 파인 눈,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와 그림자가 진 눈두덩이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 먼 길을 건너온 보람이 있었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멀리하고 타고난 재능을 썩히며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고 들었거늘, 역시 직접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이렇게 다르지.”

황제는 잠시간 말없이 청년을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도다.”

황제의 말에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금한 것?”

“우헌 태감을 보낸 것이 네 녀석이냐?”

곡경은 힐끔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간신배는 신화교 출신이었다. 당연히 신화교주가 직접 보낸 세작일 텐데,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것일까?

놀랍게도, 청년의 대답은 곡경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우헌 태감이 누구인가?”

황제의 눈이 깊어졌다.

“그대가 보낸 사람이 아니로군. 예상했던 대로.”

곡경은 내심 깜짝 놀랐다.

‘예상하셨다고?’

천하의 황제를 무너트리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신화교가 대단하다 한들, 그 정도 결정을 교주 선에서 처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설령 결정은 아랫선에서 했더라도 그에 대한 보고는 끊임없이 받았을 것이다.

한데도 신화교주로 예상되는 저 청년은 우헌 태감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으며, 황제는 세작을 보낸 사람이 신화교주가 아니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단다.

‘어떻게?’

의문이 든 것은 청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것을 어찌 예상했는가?”

“대담을 원하느냐? 아니면 싸움을 원하느냐?”

“…….”

“대화를 원했다면, 말했듯 전서 하나 보냈으면 될 일이었느니라.”

싸움.

번듯한 단어이긴 하지만, 황제의 입에서 싸움이라는 말이 나오니 왠지 모르게 지금의 상황이 무척 시시하게 느껴졌다.

청년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대화는 관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것인가?”

“거취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그대 말대로 먼 길을 찾아오지 않았느냐?”

“맞는 말이군.”

“나를 보고 싶어 했다고 들었다. 전서 따위를 보내지 않고 직접 찾아와, 교전 없이 나부터 찾은 것은 아무래도 직접 보면서 할 말이 있는 듯한데.”

“…….”

“짐의 말이 맞느냐?”

물끄러미 황제를 올려다보던 청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말없이 눈까지 감은 청년.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황제는 그가 생각을 정리 중임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물러들 나거라.”

청년의 말에 도열해 있던 일천 신도들이 좌우로 길을 트더니, 그대로 오체투지를 하였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들. 경건함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한 종교의 수장이 아니라 신을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체투지로 예를 표한 신도들이 일어나 공손한 자세로 물러났다.

‘엄청나군.’

금헌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제대로 훈련받은 이들이다. 사교에 홀린 멍청한 이들이 아니야. 광신교이기 전에 제국군에 필적할 만큼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정예들이 분명하다.’

일천 병력은 그 잠깐 새에 무려 백 장 뒤로 물러나 있었다.

가마를 든 장정들과 깃발을 든 무사들은 그대로였지만, 그들이 있다고 해서 전투 의지가 살아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청년이 황제를 보며 말했다.

“내려오라.”

금헌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무엄한!”

그때였다.

번쩍!

청년의 손가락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어느새 성벽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렸다.

철컹. 쿵!

금헌태의 눈이 흔들렸다.

한 줄기 작은 광채가 스치고 지나간 그의 요대가 스르륵 풀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요대에 걸려 있던 장군검(將軍劍)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정확히 금헌태가 찬 요대의 끈만 지워 버렸다. 그리고 금헌태는, 그 뜨겁고도 시원한 빛이 성벽을 뚫고 요대의 끈을 지워 버린 순간에야 적의 공격을 알아차렸다.

‘이럴 수가.’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

가벼운 한 수였지만, 맞상대할 마음을 뿌리부터 뽑아 버리는 무공이었다.

그 빛이 가슴이나 이마로 날아왔다면 그 길로 금헌태는 죽었을 것이다. 구대문파 장문인급 이상의 무공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고수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후우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유독 차갑게 느껴진다.

청년은 금헌태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먼 거리였지만, 모두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내려오라.”

청년은 한 번 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한참 청년을 바라보던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저자의 십 장 거리 앞에 푹신한 의자 하나 가져다 놓도록.”

“폐하!”

금헌태가 무릎을 꿇었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사교의 수괴는 놀라운 무공의 소유자로 자칫 폐하의 옥체에……!”

곡경이 금헌태의 말을 끊었다.

“수비대장.”

“……?!”

“폐하의 어명을 거부할 셈인가.”

금헌태가 놀라서 곡경을 올려다보았다.

곡경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장이 보는 앞이다. 감히 황제 폐하의 위엄에 손상을 가하지 말도록.”

“곡 호위!”

“폐하의 곁에는 내가 있을 것이다.”

황궁 수비대의 좌장으로서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명을 받듭니다.”

황제가 그리하겠다고 하면, 그리해야만 한다.

물론 어명이 무시되는 순간들도 있다. 지금이 그러하다.

하지만 황제의 눈을 본 금헌태는, 감히 절대 안 된다는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사라락.

부서진 성문 안쪽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좌우로 길을 텄다.

황제의 용상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크고 화려한 의자가 청년의 십 장 앞에 놓였다.

황제는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의자에 편안하게 앉았다. 그리고 곡경은 황제의 바로 뒤에 시립했다.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배포가 대단하구나.”

“일국의 주인 자리를 해 먹으려면 이 정도 배포는 기본 소양이니라.”

“죽을 자리도 못 보고 눕는 머저리가 되어도 말인가?”

“죽을 자리로 짐을 불렀느냐?”

웃으며 황제를 보던 청년이 문득 곡경을 바라보았다.

곡경은 뒷짐을 진 채 투명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표정의 변화도 없다. 그러나 온몸에 충만하게 깃든 사기는 언제, 어떤 순간이라도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청년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대단한 무사로고. 본교의 부교주보다는 못하지만, 호교신장과는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을 것이야. 과연 황궁에도 사람이 있었구나.”

청년 입장에서는 칭찬이었지만, 곡경 입장에서는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래도 곡경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마음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청년이 다시 황제를 보며 말했다.

“저만한 무사를 황궁에서 길렀을 리는 없고. 강호의 무사였나?”

황제의 눈이 깊어졌다.

신화교주 정도가 되면 중원 상황에 상당히 빠삭해야만 했다.

게다가 곡경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라면, 상대의 기운을 읽고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한데도 상대는 곡경의 정체조차 모르고 있었다.

황제가 물었다.

“새삼 확인할 것도 없지만, 그대가 신화교주 맞느냐?”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천웅(起天雄)이라 하네. 당대 신화교를 다스리는 사람이 나일세.”

“성은 유(劉), 휘는 흠(欽).”

“유흠.”

“당대 제국의 천자가 바로 짐이다.”

허리를 펴 위풍당당한 자세를 갖추거나 목소리를 깔지 않아도.

눈앞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희대의 괴수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일국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황제의 존재감은 기천웅 못지않았다.

기천웅의 얼굴에 기어이 감탄이 어렸다.

“대단하다.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범부의 몸뚱이거늘, 이 위압은 무엇인가.”

“…….”

“시대의 패자는 타고나는 법이라고 하였지. 드넓은 대륙의 주인을 자처할 만한 패기로다. 내 어디에서도 그대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어.”

새외삼교.

그중 일각을 담당하는 신화교주의 입에서 흔치 않은 칭찬이 나온다.

무공만으로 천하 정점에 오를 만한 일대 거인의 눈에도 황제의 자태는 확실히 남달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너무 조심성이 없는 것 아닌가?”

그때였다.

쿵! 쿵! 쿵! 쿵!

성벽 중앙, 거대한 돌벽이 뒤로 빠지며 그 앞으로 시커먼 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가 무려 오십이었다. 오십 문의 화포가 백 장 밖으로 물러난 신화교의 병력을 겨눈 것이다.

“내, 어릴 적부터 여러 분야에 흥미가 많아 탈선하기 전까지 이곳저곳에 손을 대었지. 그중 행정이 첫째요, 군사 분야가 둘째였느니라.”

“…….”

“저 화포들은 짐과 희대의 명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신형 화포이니라. 불과 석 달 전에 완성했지.”

“화포라…… 살벌하게 나오는군.”

“기존 화포의 네 배에 달하는 위력에 연발까지도 가능한 마물이니라. 너희와 같은 고수가 가까이 있다면 모르되,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언감생심 누가 있어 막을 수 있겠느냐?”

기천웅이 조소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화력(火力)으로는 당대 천하는 물론 고금을 뒤져도 본교에 비견될 만한 조직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저것들은 써 보지도 못할 것이다.”

“왜? 한번 해보고 싶더냐?”

“…….”

“그런 같잖은 도발이나 하려고 짐을 불렀다면, 이는 실로 불쾌한 일이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그릇이었다면 친히 걸어서 오지도 않았을 것을.”

기천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황제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들겼다.

“이 시간 이후, 짐과 마주할 만한 격을 한 번이라도 상실한다면 먼 길을 온 고생은 피 값으로 쳐줄 것이니, 쓸데없는 헛소리로 스스로의 품격을 어지럽히지 말지어다.”

“…….”

“말하라. 어찌 짐을 직접 보자고 하였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지.”

기천웅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를 시험하고자 하는, 어느 정도 장난기가 섞인 표정이 아니었다.

황제의 위압감과 드높은 품격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한 그였다. 기천웅의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내 직접 보고 확인을 해야 본교가 중원으로 진출해도 괜찮을지 응수타진을 해 볼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황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중원으로 진출을 한다고?”

“그렇다네.”

기천웅이 손에 든 잔을 천천히 비운 후 말했다.

“황제인 그대가 우리를 인정해 준다면 중원 진출이 한결 쉬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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