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63화 (963/963)

963화. 하늘을 뒤덮는 불꽃 (3)

가만히 기천웅을 바라보던 황제가 툭 던지듯 말했다.

“설명해 보거라.”

첫 대면부터 지금까지, 황제는 일국의 주인으로서 절대 권력자가 신민을 대하듯 말했다.

놀랍게도 기천웅은 황제의 그러한 언사에도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특별하다면 특별한 일이었다.

화르륵.

기천웅이 들고 있던 술잔에서 다시 푸른 불길이 일렁였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술잔 자체도 보통 자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술은 없었지만, 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기물(奇物).’

곡경은 한눈에 그 술잔이 천하에서 찾아보기 힘든 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디 광세혈교는 세 개의 귀족 가문이 떠받치고 있었다. 광혈과 신화, 사음이 그것이다. 혈신을 모시는 우리는 각기 마가(魔家)라 불렸지”

“…….”

“사정이야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결국 우리 세 귀족가는 제각기 종교를 세워 갈라졌다. 고대의 혈신을 상징하는 세 가지 특성을 각 가문이 나눠 받은 셈이지.”

“그것이 무엇인가.”

“파괴, 정화, 확장.”

“……?”

“광혈은 파괴를 뜻한다. 분노한 혈신의 형상 그 자체야. 지금이야 다 삭아 버려 펼치기도 힘든 경전으로만 남았지만, 그 경전에서 묘사되는 혈신의 분노는 거꾸로 도는 피로 세상을 붉게 만드는 것이다. 오른손에는 핏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창을 들었지.”

“…….”

“신화는 정화를 뜻한다. 쏟아 낸 분노로 세상을 파괴한 혈신의 왼손에는…….”

기천웅이 술잔을 들었다.

“바로 이 성배(聖杯)가 들려 있다. 성배에서 나오는 푸른 불꽃으로 세상을 불태워 잡스러운 피를 모조리 증발시키지. 그것이 바로 정화, 신화마가를 대표하는 능력이다.”

“그럼 확장은?”

“사음(邪淫).”

“…….”

“확장은 곧 자신의 피를 이은 분신들을 온 천하에 뿌려 새로운 세상의 주인을 만들겠다는 의미다. 오직 혈신의 피를 이은 자들만이 깨끗한 세상에서 살 수 있어. 하여 사음마가, 아니 사음교는 한 번씩 커다란 축제를 통해 난교(亂交)를 장려하지.”

“짐승이 따로 없군.”

“초창기에는 그렇지 않았어. 확장은 사음마가의 상징이었을 뿐, 어디까지나 진혈(眞血)은 혈교의 적통에게 있다. 오히려 후대에 퍼트릴 확장 신화(神話)를 위해 누구보다도 엄격한 생활을 강요받았던 곳이 사음마가였지.”

기천웅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이 있을까 싶지만.”

황제가 물었다.

“해서, 그대가 중원으로 오려는 것과 혈교의 역사가 무슨 연관이 있느냐?”

“광혈과 사음은 모르겠지만, 신화는 철저히 힘을 숭상한다. 나이의 많고 적음, 신분의 높고 낮음도 필요 없지. 오직 강자만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본교다. 기씨 핏줄을 제외하고 말이야.”

“…….”

“더 강한 힘, 더 강력한 권력을 위해 불타오르던 본교는 어느 순간 선을 넘어 버렸다.”

“선?”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천륜도 거스르지.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자식이 부모의 심장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 말이 어떤 비유를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기천웅의 설명이 이어졌다.

“불은 하나로 합쳐져 더 커다란 불이 될 뿐이야. 우리의 무공도 같다. 연원이 같은 우리의 무공은 상대를 잡아먹으면 잡아먹을수록 더 강력한 내공과 뛰어난 화력 조절 능력을 얻는다.”

“……잡아먹는다는 뜻이?”

“생명력을 빨아먹는 것이다.”

곡경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흡공(死吸功)?”

기천웅이 묘한 눈으로 곡경을 바라보았다.

“사흡공을 어찌 아시는가?”

곡경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허락한 것이다.

곡경은 모종의 단체가 중원 무림의 여러 후계자에게 사흡공을 풀었다는 걸 알려 주었다.

그중에는 당가의 소가주가 있었고 묵룡부의 대공자였던 엽성이 있었다.

기천웅이 피식 웃었다.

“본교의 고수들은 그따위 잡스러운 무공 없이도 두 개의 목숨을 달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야. 애초에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굴러가지도 않지. 사흡공을 중원에 푼 것은 우리가 아닐 것이다.”

“사음교로 추측하고 있소.”

“사음교라면 그럴 만하지. 우리 세 귀족 가문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간의 수명을 뛰어넘으려 애써 왔다.”

“수명?”

“광혈은 이혼대법, 초혼대법에 능하다. 타인의 몸에 자신의 혼을 옮기거나 타인의 혼을 불러내 장악하는 형식으로 또 한 번의 인생을 갈구하지.”

“…….”

“신화는 화정을 형성했다. 완성된 화정을 안고 살면 천명(天命)보다도 더 오래 살 수 있다. 물론 상식을 초월할 정도는 아니지만, 남들보다 더 늦게 늙지. 화정 자체의 요상 능력으로 목이 달아나는 수준의 치명상이 아니면 극단적인 회복력을 얻을 수도 있다.”

“기괴하군. 하면 사음은?”

“사음은 실패했다. 물론 서로에게 숨기는 것들이 많으니 진정 실패했는가는 알 수 없어. 어쩌면 지금은 나름의 수법을 완성했는지도 모르지.”

“…….”

“그대 말마따나 중원에 사흡공을 퍼트렸다면 사음에서 유도했을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흡성대법과 채음보양, 혹은 채양보음의 술수를 연구하곤 했으니까.”

“사흡공은 서장에서 발원했다고 들었소만.”

“거기까지는 나도 알지 못해.”

황제가 중간에서 끼어들었다.

“흥미가 돋는군. 그대가 왜 중원으로 오려는가는 잠시 배제해 두고 삼교에 대해 듣고 싶구나.”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미 삼교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주지 않았느냐, 즉 자신이 중원으로 들어갈 자세를 보여 준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충분하지 않느니라. 그대가 말한 것들은 전부 흥미롭지만, 삼교의 약점이나 현 상황 같은 중요한 부문이 없어.”

“애석하군.”

“궁금하구나. 수명을 늘리고 싶어 하는 것이야 모든 사람의 바람이지만, 그대들은 선을 넘은 느낌이야.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신이 되기 위해.”

“신?”

기천웅이 눈을 감았다.

“무공이 뛰어나다거나 모르는 게 없을 정도의 석학이 되면 신이라 불릴 수 있나?”

“…….”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은 신과 거리가 멀어. 그러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없는 영역에 올라가면 진정 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지.”

“그것이 수명인가?”

“그렇다.”

“왜 그렇게 신에 집착하는 것이냐?”

“오랜 세대를 거치며 이유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식의 자식이 선대의 염원을 물려받아 수명을 뛰어넘으려 하였지. 나도 그랬어.”

“그런가.”

“다만 유추하기로는 정통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혈교는 분해되었고, 세 개의 귀족 가문이 제각기 정통 혈교의 전신이라고 밀어붙이고 있어. 진정 신의 전신이라면 그에 걸맞은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겠지.”

“그렇다면.”

이제는 진정 들을 때가 되었다.

황제가 지긋이 기천웅을 주시했다.

“그대는 신이 되길 포기하고 중원으로 와 인간으로서 죽겠다는 것이냐?”

“…….”

“왜 중원에 정착하겠다는 것이지?”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잠시 말이 없는 그. 애초에 중원으로 들어가겠다고 천명한 순간부터 그 이유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짧은 침묵 끝에 기천웅이 입을 열었다.

“나는 죽어 가고 있다.”

“……?!”

“죽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일생의 숙명을 해결하고 싶다. 내 마지막 불꽃을 이곳에서 태우고 싶어.”

뜬금없이 내뱉은 말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죽어 가고 있다고?”

“그렇다.”

황제가 곡경을 힐끔거렸다.

곡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의 무공 경지는 너무나도 드높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진실로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것 같은데.”

“반박귀진이라…… 반쯤은 그렇지.”

“그처럼 위대한 경지에 오른 이가 어찌 쉽게 죽음을 입에 담소? 단순히 수명 때문은 아닌 것 같소만.”

“아니, 수명이 맞아.”

곡경은 일순 기천웅의 하얀 목에서 푸르스름한 핏줄들이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환상일까? 아니면 뭔가의 징조일까?

기도가 흔들리진 않았지만,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고수인지라 미세한 내공 변화까지는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황제가 물었다.

“일생의 숙명이 무엇이냐?”

“사음교의 멸망.”

“……!!”

천하의 황제조차도 그 발언에는 놀라고야 말았다.

곡경 역시, 그리고 성벽 위에서 귀를 열고 있던 무수히 많은 무장과 병사들 또한 기천웅의 발언에 깜짝 놀랐다.

“사음교의 멸망?”

“그렇다.”

“……이해할 수가 없군. 오랜 세월 힘을 합친 경쟁자이자 우군이었던 조직을 어째서?”

기천웅이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말없이 생각에 잠긴 그였다. 막상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가만히 기천웅을 보던 곡경이 물었다.

“신화교의 수작질로 중원이 병을 앓았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대가 사음교를 멸망시키고 싶다는 말 한마디로 이쪽에 붙는다는 것이…….”

“내가 아니네.”

“무슨 말이오?”

기천웅이 다시 눈을 떴다.

순간 곡경은 흠칫했다.

이국적인 푸른 눈. 불꽃을 다루는 화신(火神) 일족의 수장에게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바다와도 같은 푸른색 눈동자가 그렇게 슬퍼 보일 수 없었다.

“십오 년간의 폐관 수련 이후 세상에 나온 지 오늘로 이 년이 채 되지 않았군.”

“……?!”

“그간 나를 대신해 나의 아들이 본교를 이끌고 있었지.”

곡경이 입을 쩍 벌렸다.

황제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천웅이 웃으며 물었다.

“황제는 알고 있었나?”

“어느 정도 유추는 하고 있었느니라. 그대의 아들이 대리하고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그대가 조직에 제대로 관여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짐작했지.”

“어떻게?”

“그간 너희 신화교가 진행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느닷없는 교주의 황궁 진격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 그럴 거였으면 진즉 병력을 끌고 와서 공격을 펼치지 않았겠나.”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고작이 아니라 그게 가장 결정적이었느니라. 수장의 성격이나 사상에 따라 조직의 색도 변하는 법. 하물며 얼마 전, 어전 청동화로에서 청록색 불이 일더니 괴상한 거인이 나타나더군.”

“화화술이군.”

“어떤 술법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잡스럽고 치졸하게 느껴졌느니라. 적어도 그 기술만큼은 대단했지만, 의아했다. 신화교주가 직접 황궁을 치러 오겠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찌하여 굳이 이따위 술법으로 나와 대화를 시도하려 하는가?”

“…….”

“아귀가 맞는 게 하나도 없었지. 하여 앞서 그대에게 우헌 태감의 일을 물어본 것이다.”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그것은 감이다. 황제의 육감은 실로 비범한 데가 있었군.”

“육감이든 뭐든 지금 이 시점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난적 중 하나인 신화교주라는 작자가 진심으로 중원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는 것이지.”

“……그렇지.”

기천웅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받아 주겠나?”

“그대가 황궁으로 들어와 날뛰기 시작하면 우리가 입을 피해는 천문학적이야. 그리 쉽게 들여보내 줄 수는 없느니라.”

“또 무엇을 증명하면 되는가?”

“사음교에 관한 얘기.”

“…….”

“그리고 그 얘기는.”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전에서 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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