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사죄의 성의
“이 광경을 지지난달에도 본 거같은데.”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널 부러진 팀원들을 보며, 민준이 툭하고 감상의 말을 던지자, 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준의 말에 동의했다.
“근데 지난번보다 심하다.”
겨우 2천카피 팔고 파김치가 된 지난번 행사를 생각해보면, 10배나 팔릴 때까지 버틴 팀원들은 정말 오기로 버텼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즐거운 일에는 들어간 체력만큼 보람도 함께 돌아오는 법이다.
상혁은 두 달 동안 힘들게 접은 게임 패키지와 맞바꾼 산더미같은 현금 더미를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쥬얼을 좀 더 준비할걸.”
“그랬다가는 정품이 좀 남았을 걸?”
“그런가?”
박스 패키지 500개, 쥬얼 시디 1500개를 팔았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상혁은 이번엔 정품을 1만개, 쥬얼을 5천개정도만 준비했기에 쥬얼은 순식간에 완판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고민하다 정품 패키지를 사가게 되었고 그것이 정품 패키지 1만개 판매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저 산더미 같이 쌓인 현금 더미였다.
4억 4천만 원.
그것이 이번 행사에서 벌어들인 총 매출이었다.
그리고 그 현금 다발 한가운데서 웃으면서 100만원씩 돈을 묶고 있는 현주의 모습이 보였다.
책상 좌우에 돈더미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지폐 개수기로 돈을 세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여자 스크루지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상혁과 민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과 다르게, 그 모습을 옆에서 부러움 섞인 시선으로 보고 있던 한 남자가 다가왔다.
“엄청나게 성공하셨네요. 이번 이벤트는 완패입니다.”
“뭐 처음부터 그쪽 이기려고 계획한 거니까 그쪽보다 더 팔면 저희 승리죠.”
상혁은 순순히 승리를 인정했다.
상대가 노골적으로 이쪽을 누르려고 한 행동을 알기 때문에, 이쪽에서도 정당한 대응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런 상혁의 태도를 본 진만은 쓴 웃음을 지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우선 자리를 좀 옮기실까요? 아, 물론 더 데려오실 분이 있으면 데려오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서도 기획팀장이 미팅에 참여할 거라서요.”
상혁은 민준을 슥 바라보자,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거기서 상혁이 뭐라 할지 궁금한 마음은 있었지만, 지금은 아까 행사의 여파로 허리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었다.
“나 말고 성연 씨를 데려가. 이번 일에 관련 있는 당사자기도 하니까.”
“성연 씨를?”
잠시 고민하던 상혁은 부스 뒤쪽에서 박스에 현금을 넣고 있던 성연을 불렀다.
콧노래를 부르며 박스에 돈을 넣던 성연은 상혁이 갑자기 뒤에서 자신을 부르자 깜짤 놀라 뒤를 돌아보며 급하게 말했다.
“나 한 푼도 안 챙겼어!”
“누가 뭐래요? 엘란테 소프트랑 미팅있으니까 잠깐 와달라는 건데.”
“어···그래?”
“그리고 솔직히 한두뭉치 챙기셔도 뭐라 할 사람 없어요. 오늘 안 그래도 일당으로 200만원씩은 다 돌리려고 했는데.”
“헐···.”
“일단 형은 저랑 가셔야하니까 오늘 연주 참가자들 일당은 현주 선생님이 챙겨주세요. 빵빵하게 챙겨주셔도 되요.”
“응. 그럴게. 이정도면 나도 걔네한테 면이 좀 서겠다. 부탁하느라 엄청 힘들었는데.”
“그냥 연주도 좀 그런데 동인 행사에서 코스프레까지 하고 연주해달라고 부탁한 거니까 그 부분도 감안해서 넉넉하게 챙겨주셔도 되요.”
“응. 그럴게.”
“선생님도 연주 참가하셨으니까 알아서 챙기시고 얼마 내셨는지만 적어서 주시면 되요.”
“응. 근데 어디 간다고?”
“엘란테 소프트에서 찾아왔어요.”
“뭐!? 너희 게임 베꼈다는 그 회사?
거기서 왜 널 찾는데?”
“뭐. 이번 일을 정리해야하니까요. 성연 씨도 따라가니까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부스 정리 부탁해요.
전 늦을 거 같으면 택시타고 집에 갈게요.”
“응. 그래. 오늘 수고 했어~”
“선생님도요.”
그렇게 말한 상혁은 90도로 인사를 하며 선생님께 인사한 뒤 성연을 데리고 진만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진만을 따라 진만이 준비한 차에 타고 엘란테 소프트 건물로 이동했다.
***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진만은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떨어지지 않던 입을 힘겹게 열었다.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무엇이 죄송하다는 거죠?”
이럴 때는 반드시 상대 입에서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발언이 나오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상혁이 추궁하듯 묻자, 진만은 한숨을 쉬며 모든 것을 인정했다.
“제가 ‘Play to Win’이 개발 중인 게임의 컨셉을 베껴서 루나시아 스토리를 수정한 것에 대해서입니다.”
“그게 끝인가요?”
“퍼블리셔를 통해서 매장에 그쪽 게임을 들여놓지 말라고 이야기 한 것도요.”
“그리고?”
앞의 두 가지는 어차피 빼도 박도 못한 증거가 있는 것들이었기에 순순히 인정했지만 회사를 굴리며 잔뼈가 굵은 진만은 그 외의 것은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찌보면 해석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사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백번 사죄해야 마땅하지만 그것 말고 또 있나요?”
“이번 코믹월드에서 저희 견제하려고 일부러 기업형 부스로 참가해서 규모로 누르려고 하신 거요.”
‘알고 있었구나.’
그러나 여기서 그 사실을 인정하면 죄가 더 커지기에 진만은 애써 그 의도를 포장하여 숨겼다.
“그건 오해십니다. 저희도 원래 오프라인 행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번에 단순하게 제대로 참가해보고자 준비를 좀 많이 한 것뿐입니다.”
“세상엔 정황증거라는 말이 있죠. 앞에서 인정하신 것을 고려해보면 마지막 것도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죄송합니다.”
“시끄럽고 운전이나 하세요. 차 안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까. 아, 그리고 나중에 딴소리 하실 생각은 안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쪽은 이미 그쪽에서 저희 게임을 표절해해서 게임 디자인을 변경했다는 증거를 전부 가지고 있으니까.”
상혁의 말에 진만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운전을 하며 필사적으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행사장인 여의도에서 구로까지는 차로 30분이 약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그렇기에 세 사람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구로에 있는 엘란테 소프트의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혁이 도착해서 본 그 모습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아픈 향수를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그래. 이게 이 시절 구로 모습이지.’
아직 인터넷의 급격한 발달과 함께 ‘디지털’ 산업이 발전하기 전.
2004년에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역 이름이 바뀌기 전 구로 디지털 단지역의 이름은 구로 공단 역이었고 그 이름에 걸맞게 그곳은 IT의 메카라기 보다는 여러 공장이 모여 있는 산업단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싼 입주비와 서울 시내의 편리한 접근성을 이유로 몇몇 회사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곳은 아직 ‘공단’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냄새나 풍경도 2020년에 상혁이 일하던 고층빌딩이 즐비한 IT 산업단지같은 느낌이 아니라, 공장과 빌딩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컴퓨터를 치우고 재봉틀을 넣으면 딱 의류공장같이 변할 것 같은 분위기의 낡은 사무실.
상혁은 그 안에서 한국 게임 시장의 암흑기를 거쳐 나온 진만의 고뇌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무실이 초라하죠?”
“뭘요. 저희 사무실은 학교 부실인데요.”
“하하 그건 그거대로 고등학생 스러워서 좋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진만은 믹스커피종이컵에 타서 상혁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진만을 정면으로 보며 똑바로 말했다.
“전 오렌지 쥬스 아니면 안마십니다.”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성연은 마시려던 커피를 입에서 뿜을 뻔 했다.
자신이 아는 상혁은 믹스커피던 원두커피던 카페인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면 아무거나 마시는 카페인 중독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성연의 경악을 뒤로한 채, 상혁이 태연하게 진만을 바라보자 진만은 식은땀을 흘리며 준표를 보고 말했다.
“가서 오렌지 쥬스 좀 사오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겨우 고등학생에게 설설 기는 사장의 모습이 떨떠름했던 준표는 불만이 조금 섞인 표정으로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상혁은 그런 준표의 표정을 보고는 뒤통수에 펀치 한방을 더 먹여주었다.
“과즙 100% 아니면 안 먹습니다.”
“으득. 잠깐 기다리시면 금방 구해오겠습니다.”
사실 상혁은 성연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냥 싸구려 믹스커피도 잘 마신다.
단지 이것은 기싸움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행하는 일종의 쇼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렇게 기선을 제압했다고 생각한 상혁은, 준표가 나가자마자 앞에 놓인 믹스커피를 들더니 후루룩 거리며 입에 털어놓았다.
그러자 진만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는 상혁을 보며 말했다.
“오렌지 쥬스 아니면 안 드시는게···?”
“그냥 땡깡 한 번 부려본 겁니다. 제가 고등학생이라고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요.”
“저희는 전혀 그럴 의도가···.”
“그럼 이 우중충한 사무실에 끌고 와서 굳이 자기 필드에서 회의를 진행하려고 한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단순한 이야기라면 카페에서 해도 되었을 텐데요?”
“그···그건···.”
“아니면 영세한 회사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린 이렇게 불쌍하게 게임 만드는 개발자들이니 한번만 봐주세요’ 라고 하고 싶으신 건가요?”
상혁의 거침없는 언사에 당황한 성연은 자신이 속한 팀의 팀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상혁의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개발 과정에서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눈으로 보기에는 약간 키가 작은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인데, 지금 상혁의 눈빛이나 표정은 마치 업계에서 십수년 이상 일한 것 같은 노련한 기획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연과 마찬가지로 상혁을 보며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던 진만은 결국 이번 싸움에서는 마무리까지 완전히 패배를 인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패배라면 어떤? 뭘 어떻게 보상하지?’
문제는 그것이다.
애당초 상혁이 태클을 걸지 않은 것처럼, ‘루나시아 스토리’와 ‘마리의 눈물’은 컨셉의 기본 아이디만 같다 뿐이지 전혀 다른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완성도와 재미 측면에서 ‘마리의 눈물’이 압도적으로 위라는 것만 빼면.
그렇게 생각하자 진만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어차피 그 부분을 제외하면 영업을 방해한 부분만 보상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피해는 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애당초 오늘 행사에서도 비록 상혁에게는 완패했지만 최초 오프라인 행사 치고는 만족할 정도로 게임을 많이 팔 수 있었으니까.
매출도, 평가도.
이전에 발매한 게임보다 모든 지표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자신이 얼마 전부터 숙원 사업으로 밀어붙이던 MMO개발의 꿈을 꿀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솔직히 베껴온 컨셉의 힘이 컸다고 진만은 생각하고 있었다.
평범한 SRPG 게임을 해보고 싶은 게임으로 바꿔 놓은 게 바로 그 컨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진만은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앞의 고등학생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자신이 생각하던 보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저희 쪽에서 우연히 그쪽의 개발 중인 게임을 보게 되어 컨셉을 참고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인정하겠습니다.”
“깔끔해서 좋네요.”
“그리고 게임 퍼블리셔에 부탁을 해서 판매를 하지 못하게 압박을 넣은 부분도 인정하겠습니다.”
“그래서, 보상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 쪽에서 말씀드리죠.”
그때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옆에 서있던 유찬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상혁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는 유찬은 행사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이 미안했던지 꽤나 저자세로 상혁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 제대로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표절한 동인개발자가 게임을 출시한다고 생각해서 매장 쪽에 압력을 넣은 건 저희 쪽이니까요. 물론 진만 사장님께 저희 쪽을 속인 것에 대한 책임은 지게 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저희 퍼블리셔에서 그쪽에 보상을 드리고 싶네요.”
“그쪽에서 제안할 보상은 저희 쪽 게임을 퍼블리싱 해주겠다는 이야기겠네요?”
상혁이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전에 바로 선수를 치자, 유찬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샐러리맨 생각이야 뻔하죠.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겠다. 쟤네 게임은 시장성이 있으니까 보상을 핑계로 유통 계약을 따내면 대박이겠지?’ 라고 생각한 거 아니에요?”
존중을 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상혁을 어디까지나 고등학생으로 보고 있던 유찬은 자신의 생각을 바로 수정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녀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업계 상리에 밝은 괴물같은 놈이라고.
“그럼 말을 바꾸죠. 보상이 아니라 제안입니다. 저희 쪽이랑 계약하시면 전국 매장에 ‘마리의 눈물’을 쫙 깔아드리죠.”
“그건 다른 퍼블리셔도 할 수 있는 일일 텐데요?”
“티비 광고도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사죄의 의미로 비용은 저희가 내고요.”
“선심 쓰는 듯이 이야기 하지 말아주세요. 원래 마케팅 비용은 퍼블리셔가 내는 게 맞는 거니까.”
“역시 보통이 아니시군요. 맞아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보니까 그쪽은 제대로 된 유통 채널이 확보가 안 된 모양인데, 전국 매장에 그쪽 게임이 깔린다면 판매량은 오늘 판 매출이 우스울 정도로 높을 겁니다. 더 이상 박스를 접을 필요도, 굳이 팀원들이 파김치가 되어가면서 게임을 팔기 위해 소리치고 다닐 필요도 없는 거죠. 그냥 앉아서 돈만 정산 받으시면 되는 거예요. 그건 메리트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것을 제안하는 것이 관대한 처사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게임이라고 하지만 고등학생들이 만든 동인 게임을 유통하겠다고 나서는 대형 퍼블리셔는, 그것도 저처럼 티비 광고같은 대형 마케팅까지 제안하는 퍼블리셔는 없을 테니까요.”
유찬의 말을 들은 상혁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유찬의 말대로 지금까지 자신들이 하고 있는 판매방식은 너무 원시적이기는 했다.
게임을 개발하고 있어야할 팀원들이 게임을 팔려고 발품을 뛰고 있는 지금 상황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관계에서의 퍼블리셔가 제안할만한 사항이지, 죄를 지은 쪽에서 선심 쓰듯 제시할만한 조건은 아니었다.
그런 상혁을 보며 유찬은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빌고 있을 뿐이었다.
‘제발, 낚여라. 라고.’
그러나 상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유찬의 기대를 산산조각내는 말이었다.
“싫습니다.”
“예?”
“제가 퍼블리셔를 못 구해서 팀원들이 박스를 접는 한이 있어도 당신이랑은 안한다고요. 뭐요? 전국에 게임을 깔아줘? x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누군 능력이 없어서 퍼블리셔 안구한줄 아십니까? 제가 고등학생이라 호구처럼 보여요?”
“아뇨, 그건···.”
“대가리 좀 그만 굴려요. 세일즈맨 아저씨. 지금 중요한건, 그쪽에서 확실하게 저희한테 사과를 하는 겁니다. 비즈니스가 이뤄진다면 그 이후에 가능한 거고요. 계약조건으로 사과를 퉁치겠다, 그딴 개 같은 소리를 할 거면 지금 당장 나가시던가요.”
상혁의 서슬 퍼런 말에 유찬이 입을 다물자, 진만이 급하게 끼어들어 상혁을 말렸다.
“허허, 유찬씨도 단지 PTW의 게임이 너무 뛰어나니까 욕심이 나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일 겁니다. 부디 화를 풀고 너그러이 용서 부탁드립니다.”
“화 안 났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옆에서 있는 성연이 보기에 상혁은 확실히 화가 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쪽에서 생각하는 보상안이나 말씀해보시죠.”
상혁이 말하자 진만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상혁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희가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전국 신문1면과 게임 잡지에 표절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문을 게재해주세요.”
“예?!”
금전적인 보상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던 진만이 놀라며 소리치자 상혁이 덤덤한 투로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표절을 했으며, 어떤 부분을 베꼈고, 어떤 식으로 저희 게임의 발매를 방해했는지 적어서 올리라고요.”
“그···그건···.”
차라리 금전적으로 보상을 하는 편이 나은 조건이었다.
그것은 잘못하면 회사 이미지를 무덤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손해 비용을 보전해드리는 걸로 합의하는 건···”
“X이나 까 잡수세요. 저희는 잘못하면 팀 운영 자체가 엎어질 뻔 했다고요.”
“그래도 너무 잔인한 처사십니다···솔직히 다른 게임 베끼는 업체가 저희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게 당당하다고요?”
“그건 아니지만···.”
“양심이 있으면 하다못해 저희 게임 발매 되고 나서 참고했다고 하던가, 남 만들고 있는데 먼저 출시하려고 수 써놓고, 퍼블리셔 이용해서 유통 방해하고, 돈 써서 이벤트 묻어버리려고 하셨으면 댓가를 치르셔야죠.”
“한번만 봐주십시오!”
결국 진만은 상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릎을 꿇은 채로 애당초 베끼자고 밀어붙인 게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고, 직원들은 그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 때문에 회사에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자신을 비난해달라고 비는 진만을 보며, 상혁은 착잡한 기분에 빠졌다.
사실 협박을 하면서도 상혁은 법정으로 이 일을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법원에 가면 예상 손해액을 따져 보상액이 선정되는데, 그 기준이 애매해 큰 금액도 예상하기 어려울뿐더러, 결국 그건 상대방이 돈으로 퉁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상혁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었지.’
상혁은 코믹 행사장에서 민준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조금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진만을 향해 말했다.
“좋아요. 그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면, 조금 조정을 하죠.”
“조정이요?”
“일단 그쪽에서 표절사실을 인정하는 광고를 실어야 하는 건 양보 못합니다. 그건 무조건 해주셔 야해요.”
“그럼 어느 부분을···.”
“저희 쪽 유통을 방해하기 위해 했던 치졸한 범죄행위에 대한 내용은 빼드리죠.”
진만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당시 한국 게임업계에서는 표절에 대해서는 나름 관대했으니, 범죄가 될 수 있는 부분을 빼주겠다는 상혁의 제안은 무척 메리트가 있는 제안이었다.
게다가 법적 당사자인 상혁이 소송을 할 생각이 없다면 단순히 해프닝으로 묻어버릴 수 있는 이야기 이기도 했다.
물론 회사 이미지에 타격이야 가겠지만, 잘못한 게 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고.
“그, 그 정도라면···.”
“대신 저희쪽에서 양보를 하는 것이니 나중에 저희쪽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면 됩니다.”
“부탁이요?”
“저희가 필요할 때 이쪽 회사 인력을 빌리는 조건으로 양보하도록 하죠. 그게 프로그래머든, 그래픽이든, 기획 인력이든, 저희가 원하는 기간 동안 원하는 숫자의 인력을 외주로 쓸 수 있는 조건으로.”
그 정도면 진만이 듣기에도 합리적인 조건이었기에 진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혁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그 조건이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일은 제가 백번 사죄드리겠습니다!”
“사죄는 언론 광고에 하세요. 물론 광고비는 그쪽에서 다 지불하는 걸로 하고요.”
그렇게 말한 상혁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만에게서 몸을 돌려 유찬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제 네 차례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오해로 행사장에서 무례를 범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좋습니다. 그쪽은 어차피 ‘일개 직원’일 뿐이니 그냥 좋게 넘어가드리죠.”
상혁이 선심쓰듯 말하자 유찬의 표정이 급히 밝아졌다.
그리고는 바로 상혁에게 아까 던졌던 제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럼 표절 건은 이걸로 마무리가 된 것이니 퍼블리싱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이 사태가 났는데 아직도 제가 그쪽이랑 계약을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게 역으로 굉장하신 분이란 생각이드네요.”
“비즈니스에서 중요한건 감정보다 실리죠. 아까 잔머리를 굴린건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퍼블리셔가 없으신 것도 사실이잖아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어떻겠어요?”
유찬은 조건 여부에 따라 이 자리에서 ‘마리의 눈물’의 퍼블리싱 권한을 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찬이 모르고 있던 사실은, 그렇게 이야기했던 모든 문제에 대해 상혁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상혁이 이미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했다는 사실도.
“유찬 씨 말이 맞네요. 저희는 퍼블리셔가 필요해요.”
“그렇죠? 그럼 저희랑 계약을···.”
“그 퍼블리셔가 그쪽이라고는 이야기 안했는데요?”
“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직원 한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지금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라 바쁘다고 해.”
“아뇨, 사장님이 아니라 여기 이상혁 군이 있을 거라고···.”
“뭐?”
“어휴, 사무실이 엄청 침침하네요. 앉아 있기만해도 기분이 다운될 것 같아.”
그때 직원 뒤에 서있던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유찬은 그 남자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지훈!?”
유찬을 경악하게 만든 남자.
그의 정체는 유찬이 다니는 퍼블리싱 업체 큰 빛 소프트의 경쟁사 ‘Y.J GLOBAL'의 담당자, 오지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