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프로젝트 너드(Nerd)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라도 완성이 불가능하면 그건 망상일 뿐이니까.
상혁은 바로 그 점을 지적했고 팀원들은 다들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상혁의 말에 동의했다.
“맞는 말이긴 한 거같은데 지금 그 이야기랑 엘란테 합병이랑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
성연이 말하자 상혁이 답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에요. 완성 가능 여부를 가늠하게 하는 건 개발팀의 역량이죠. 그리고 그 팀이란 건,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요.”
“그래서?”
“그러니까 아이디어란 건 팀 규모의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4명가지고 교향곡을 연주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의 멤버로는 네가 원하는 차기작의 스케일을 맞추기 힘들 것 같다. 그러니까 외부의 힘을 빌리는걸 고려해보자. 이거지?”
“뭐 근원적인 부분만 말하자면 그런 뜻이죠. 이 인원으로 뭘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추가 인력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순수하게 뭘 만들면 재미있을까만 생각할 수 있게요.”
상혁이 하려는 건, ‘개발’과 ‘제작’의 영역을 분리하려는 것이었다.
마치 자동차를 만드는 것처럼, 설계를 하는 인력과 실제 제작을 하는 인원을 분리하는 것.
실제 자동차 업계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바로 컨셉트 카가 그것이다.
생산성이나 안전성은 무시한 채로 순수하게 개발자의 창의성을 살려 개발자가 추구하는 아이디어나 비전을 선보이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선보인 컨셉트카는 양산과정을 거치면서 디자인이 수정되고 기능이 변경되며 최종적인 자동차가 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모델이고, 실제 적용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것을 잘 아는 상혁은 좀 더 현실 적인 방식으로의 접근을 생각하고 있었다.
“뭐, 거창하게 말하고 있지만 심플하게 이야기하자면, 노가다가 필요한 부분을 외주로 주자는 이야기에요. 전부 팀 내에서 해결하느라 고생하지 말고. 영화에서도 특수효과는 전문 회사에 맡기잖아요?”
상혁이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다들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개념이면···.”
“어차피 게임 개발이란 것 자체가 100% 다 즐겁고 반짝이는 작업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2천개의 3D 모델링이 필요한 게임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걸 팀원을 뽑아서 해결하려고 하면 팀이 엄청나게 헤비해지겠죠. 아니면 개발 기간이 엄청나게 길어지던가.
“근데 그럼 그냥 외주를 주면 되잖아.”
현주가 손을 들며 이야기하자 상혁이 말했다.
“선생님. 외주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엄청나게 힘들어요.”
“왜?”
“내 게임이 아니라 남의 게임이니까요.”
그건 외주작업만 하다 과로사한 상혁이 가장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개발팀에서 탄탄한 기초 플레이를 완성해서 확장팀에 넘기면 확장팀에서 게임의 완성까지 스케일을 키우는 거. 그게 제가 생각하는 저희 팀의 이상적인 형태입니다.”
사실상 상혁의 말은 초기 개발팀이 알파 버전 정도만 만들고 게임 완성에서는 손을 떼겠다는 개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상혁은, 지금 시점에서 팀원들이 너무 이 사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게임에 한계를 두지 말자’ 라는 것만 팀원들이 알아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상혁은 적당히 지금의 논란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뭐, 어디까지나 제 말은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이에요. 당장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 지금 제일 중요한건 차기작을 뭘 만들지를 결정하는 거겠죠?”
상혁의 입에서 ‘차기작’이라는 말이 나오자 팀원들의 눈이 반짝였다.
마리의 눈물의 최종 작업 이후로 벌써 두 달가까이 흘렀지만 그동안 개발보다는 개발 외적인 일에 너무 휩쓸렸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개발 손댄지 너무 오래됐어요. 이제 슬슬 다음 작품에 대해서 회의해볼까 하는데, 다들 어떠세요?”
상혁이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연이 손을 들었다.
“저는 찬성이요!”
나머지 멤버들도 찬성하자, 상혁이 화이트보드에 적은 글자를 지우며 말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차기작 회의를 시작해보죠. PTW의 신작으로, 어떤 게임이 적합할지를요.”
자신들의 게임을 표절해서 돈 벌려던 업체 사장한테 사과받는 거?
물론 즐겁다.
오프라인 행사에서 1만 카피씩 팔면서 커뮤니티에서 게이머의 주목을 받는 거?
그것도 물론 즐겁다.
통장에 몇 억씩 꽂혀 있는 상태에서 팀원들과 함께 쇼핑하는 것도 엄청나게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상혁은, 개인적으로 게임을 만드는 과정이 가장 재미있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백지 상태에서 조금씩 아이디어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
그 과정이 기획자로써의 상혁의 감정을 가장 격하게 만드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
사실 동인팀을 운영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의외로 민주적인 팀 운영이 어렵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아이디어가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묻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 개발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방해가 되는 부분을 쳐내고 필요한 부분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그 반복되는 과정에서, 불만이 쌓이고 팀에서 자신이 소외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함께 만드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만드는 게임이 자신의 게임이 아니라 팀장이나 다른 사람들이 개발하는 게임처럼 느껴지는 것.
그것이 동인팀에서 팀원의 의욕을 저해하는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서, 동인팀의 기획자들은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게 되는데 주로 쓰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로테이션 개발.
‘이번에 내가 만들자는 대로 만들면 다음엔 니가 만들자는 대로 만들자.’
좋은 방법은 아니다.
사실 미래에 대한 보장 자체가 동인팀의 핵심이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 하다가는 팀원 수대로 게임 종류가 갈릴 수 있다.
둘째는 말발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상대의 아이디어를 온갖 전문 용어를 갖다 붙이면서 안 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게 수십 번 반복되면 상대가 아예 아이디어를 안내게 되는데 그럼 기획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이것도 표면적으로는 설득이 된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납득 못하고 꿍한 상태로 개발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 가장 좋은 방법은?
애초에 취향이나 방향성이 비슷한 팀원들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 팀의 경우, 기획에서 완성까지 팀원들끼리 시너지를 일으키며 좋은 흐름으로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런 팀원들을 모으는 게 엄청나게 힘들다는 것이지만.
그런 문제 앞에서, 상혁은 운이 매우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팀원들과의 신뢰관계가 구축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었기에 팀원들은 차기작 제작 회의에서 상혁이 다음에 어떤 게임을 만들자고 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회의에 들어갔다.
분명 엄청난 아이디어를 들고 와서 마리의 눈물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를 개발하자고 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상혁은, 그런 팀원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이번에도 한눈에 보기에 괴팍한 기획을 들고 나왔다.
“저는 차기작을 D&D소재로 잡고 게임을 만들어봤으면 합니다.”
“D&D? ‘발더스의 문’ 같은거 말이야?”
“뭐 그렇죠.”
“너답지 않은데? 그런 게임은 지금도 많이 나오고 있잖아.”
실제로도 시장에는 ‘발더스의 문’의 성공 이후에 '아이스 데일'이나 ‘플레인스 토먼트’등 포스트 ‘발더스의 문’를 표방하는 수많은 게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게임들이 준수한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 타이밍에 유행하는 장르에 편승하자는 상혁의 제안은 팀원들에게는 상혁 스럽지 않은 제안으로 들리고 있었다.
“물론 그냥 요즘 나오는 아이소매트릭 계열 RPG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좀더 D&D의 본질적인 부분을 다뤄보자는 이야기죠.”
“좀 추상적인 거 같은데, 구체적으로 설명해줄래?”
“좋아요. 기본적으로 지금 제가 구상중인 기획은 게임 파트를 두 개로 나누는 거예요. D&D파티를 모집하고 친밀도를 올리거나 스토리 소재를 모으는 학교 파트, 그리고 그렇게 모은 멤버들로 D&D를 즐기는 RPG 파트.”
상혁은 회귀 전에 즐겨하던 게임 중 하나인 ‘페르소나 시리즈’를 참고하여 시스템을 기획했다.
기본적으로 일상파트와 RPG파트를 구분하여 플레이를 진행하는 페르소나 시리즈처럼, 플레이어 본인이 던전 마스터가 되어 같이 게임을 할 파티 멤버를 선정하고 RPG파트를 진행한다는 아이디어로.
그 말은, 기본적으로 이 게임이 4차원의 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이 상혁이 잘 짜놓은 시스템과 합쳐져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매주 어떤 멤버를 게임에 끌어 들이냐에 따라서 스토리 전개가 변화한다는 거지?”
“그렇지. ‘발더스의 문’를 보면 멤버간 사이가 안 좋은 파티를 짰을 때 서로 말다툼하거나 심하면 서로 공격하기도 하잖아? 그래서 파티 구성할 때 신경을 많이 써야하고. 그 파티 구성 부분을 메인으로 잡고 게임을 진행하게 하는 거지.”
“RPG파트는 ‘발더스의 문’랑 똑같이 잡고?”
“비쥬얼 적으로는 너무 양키틱하니까 조금 일본풍으로 이쁘게 다듬어야겠지?”
“흠···.”
민준이 생각에 잠긴 사이, 상혁은 부연 설명을 이어나갔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D&D가 너무 하고 싶던 소년이, 학교에서 친구들을 모아서 게임을 하는 것. 그걸 그대로 게임으로 옮겨보자는 거니까.”
처음 D&D를 접하는 유저가 연기를 하면서 보이는 어색한 태도, 익숙하지 않은 룰에 적응하는 과정, 그리고 플레이어가 준비한 스토리를 즐기면서 조금씩 D&D의 재미에 빠지는 모습을 플레이어가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이번에 상혁이 기획한 게임의 핵심이었다.
“아르바이트나 부비로 주사위도 바꾸고, 피규어도 업그레이드 하면 실제 게임 안에서 몬스터 비쥬얼도 향상되는 식으로 유저한테 목적의식을 주는 식으로 만들고 싶은데, 다들 어때?”
상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기획은 지난번보다 더 마이너한 기획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D&D가 탄생한 서구권에서조차 D&D는 조금 하드코어한 너드Nerd(오타쿠)문화에 속하고 있었고, 실제 플레이어들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상혁은 그런 플레이어들에게 좋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게임을 통해서, 친구를 모으고 자신이 만든 스토리를 플레이 시키고, 때로는 자신도 파티에 참가하여 함께 게임을 즐기면서 ‘어쩌면 즐거웠을 수도 있는’ 학교생활을 대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상혁이 추구하는 ‘10년, 20년이 지나도 한번쯤 꺼내어 다시 플레이 하고 싶은 게임’에 딱 맞는 게임이었다.
“흠···.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또 무지막지하게 특이한 기획을 가져왔네···.”
고민을 마친 민준이 이야기하자, 다른 팀원들도 조금씩 우려의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마이너 한 소재 아닐까요?”
“한국 유저의 태반은 D&D에 관심도 안 보일텐데···.”
“저는 이게 재미 있을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팀원들에게, 상혁이 단호하게 말하자, 성연이 입을 열었다.
“이게 재미 없을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소재가 좀 마이너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지.”
“마이너하면 어때서요?”
“판매량에 악영향이···.”
“판매량 생각해서 수만 명이 ‘그럭저럭 괜찮은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게임을 만드는 회사는 세상에 넘치잖아요?”
“그럼 이건 다르다는 거야?”
“다르죠. 이건 취향만 맞는 사람이면 이게 자신의 인생게임이 될 만한 게임이니까요.”
“아···.”
성연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상혁이 어떤 식의 게임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생 게임.
수많은 게임을 플레이한 유저라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자신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을 때 정말로 즐거운 추억을 주었던 그런 게임.
상혁은 수십만이 즐기는 국민게임보다 적은사람이 좋아하더라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그 게이머에게만큼은 가장 즐거웠던 추억을 줄 수 있는 그런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 기획도, 분명 누군가에게 그런 게임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고.
그러자 상혁의 진지한 눈을 본 성연이 웃으며 머리 뒤에 손을 얹고 말했다.
“뭐, 좋아. 난 찬성. 기획자가 저리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분명 재미있겠지.”
“전 D&D가 뭔지 잘 몰라서 좀 애매하긴 한데 학교에서 친구를 모은다는 부분은 좀 재미있을 거 같아요.”
“민준이 너는 어때?”
의외로 이 상황에서 반대표를 던진 것은, 상혁과 가장 오래 함께 한 민준이었다.
“뭐, 나야 너를 100%신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획은 너무 리스크가 크다.”
“그럼 반대?”
“아니, 일단 유일무이한 게임이 될 거 같긴 하니까 그 부분은 좀 당긴다. 근데 어떤 형태로 완성될지 짐작도 안가.”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건데?”
“뭐 항상 우리가 하던 대로 해야지.”
그렇게 말한 민준이 자세를 고쳐 잡고는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우선 알파부터 만들어서 플레이 해보고 결정하자. 그게 우리 스타일이니까.”
‘만들어서 해보고 결정하자’ 는 민준의 말에 막연하게 상혁을 믿으니까 해보자고 하던 팀원들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막연하게 상혁을 따르는 분위기에서 일단 상혁의 의도를 100%살릴 수 있도록 알파 버전을 완성하자는 분위기로.
그리고 판단은 그 이후에.
그리고 민준이 조성한 그 분위기는, 상혁이 내심 바라던 분위기였다.
“좋아. 맞는 말이야. 막상 구체화 했을 때 재미없을 수도 있고, 취향에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
“저도 민준오빠 말에 찬성이요.”
“나도.”
“잘 모르지만 난 그냥 보고 있을게.”
다들 동의하자 상혁은 마커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보드에 프로젝트 명을 적으며 힘차게 외쳤다.
“그럼 당장 시작하자. 전 세계의 D&D 너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프로젝트를.”
그렇게 말하며 보드에서 비켜선 상혁의 뒤에는, ‘Project Nerd’ 라고 적힌 화이트보드가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