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해외 영업
흔히들 나이 들면 시간이 빨리간다고 이야기한다.
어릴 때는 하루하루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은데, 나이가 들어 직장인이 되고 30대를 넘어 40대가 되면 하루가 정말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이 쏜살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게 정말인지 확인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나이가 들면 도파민 분비량이 떨어지면서 뇌가 기억에 덜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을 뇌가 기억에서 지우면서 별일도 없었는데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상혁의 몸은 쌩쌩한 10대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상혁은 항상 시간이 너무 빨리간다고 생각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만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하루의 1/3의 시간을 수업시간에 할당해야하는 고등학생인 만큼, 그 날아가는 시간만큼 여가 시간을 활용해서 작업을 해야했기에 상혁이 느끼는 부담감은 더 커지고 있었다.
물론 15년차 경력이 있는 기획자로써 상혁의 기획서 쓰는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고 상혁은 실제로 거의 기계처럼 기획서를 뽑아내 팀원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상혁과 같이 작업하는 팀원들의 작업속도도 장난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게임 개발에서 기획은 일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맡는다.
모든 작업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무엇을 어떻게 작업할지에 대한 세세한 지시서를 작성하고, 작업자에게 전달하며, 작업 결과물을 확인하고, 문제를 찾아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야는 그래픽, 프로그래밍, 음악, 팀 운영 등 게임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걸쳐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머지 작업자들은 자신의 일만 하면 되지만 기획은 모든 일에 연관되어있기 때문에 항상 시간이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혁은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대부분의 데미지가 회복되는 괴물같은 고등학생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신작 개발이 시작된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항상 눈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살았다.
“작업 다 끝났어요오오···. 어? 오빠, 자요?”
“어? 아냐? 안자는데?”
“코 고시던데요? 너무 피곤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어제 작업하느라 좀 늦게 자서 그런가봐.”
“몇 시에 주무셨는데요?”
“새벽 6시.”
“오빠, 6시면 새벽이 아니라 아침이라고 하는거에요.”
“그럼 아침 6시.”
“에휴···. 그러지 말고 쇼파에서 눈 좀 붙이시면 어때요?”
“수업시간에 앉아서 자서 괜찮아.”
당연하게도 수업에 재대로 집중하는게 가능할 리 없었기에, 상혁은 아예 부족한 잠을 수업시간에 때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대부분의 선생들이 상혁을 깨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건데, 그건 현주의 힘이 컸다.
“세상에 자기 할 일을 자기가 직접 만들어서 하는 고등학생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리고 그걸로 몇 억씩 벌어대는 애들은 얼마나 되고요? 쟤네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애들이니까 하고싶은 걸 하게 놔두는 게 어떨까요?”
애당초 수업에 열심히 집중해서 일류대학에 가서 대기업에 간다 하더라도 지금 상혁이 버는 페이스로 벌기는 힘들었다.
그것을 알기에 선생들은 마치 운동부 애들이 수업시간에 졸아도 터치하지 않는 것처럼 게임부 인원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외 처리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없었다면, 상혁은 진즉에 뻗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불편한 의자에서 선생님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청하는 쪽잠이 몸에 좋을 리가 없었고, 상혁의 피로는 피크에 달해 있었다.
“후···. 난 괜찮으니까 커피나 좀 줄래?”
“어떻게 해드려요?”
“아이스 에스프레소. 6샷 진하게.”
물을 아예 안탄 상태로 에스프레소 6샷에 얼음만 넣어서 먹는 게 요즘 상혁의 메인 음료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나마 반쯤 잠들어있던 상혁의 머리를 억지로 깨울만한 카페인을 가지고 있었다.
“후···. 알았어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연이 커피를 가져다주자 상혁은 피곤한 미소를 흘리며 서연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쓴맛이 진하게 나는 커피를 목에 털어 넣었다.
“후···. 좀 살 것 같네.”
“너 그러다 또 과로사 한다?”
민준이 자신도 모르게 말하자 서연이 궁금한 듯 물었다.
“또? 왜 또에요?”
“어? 아냐, 말이 잘못 나온 거야.”
민준이 급하게 얼버무리자 서연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의심을 풀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연이 사라지자 상혁에게 다가온 민준이 상혁을 보며 말했다.
“괜찮냐?”
“원래 기획자는 이 시기가 제일 바쁜 거 알잖아. 너희들 작업 좀 돌아가고 나면 나아질 거야.”
“아니, 너 너무 하이페이스로 일하는 거 같아서 그래. 우리가 예전처럼 뭐 마감을 쪼는 상사가 있냐? 아니면 퍼블리셔에서 언제까지 출시 안하면 돈 안준다고 협박을 하냐? 굳이 그렇게 페이스 올려서 개발할 이유는 없지 않아?”
민준의 말을 들은 상혁은 그대로 굳어 버려 민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 시발 생각해보니 그렇네?’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다.
매번 이런 페이스로 15년간 일을 하다 보니 아예 작업 자체를 이런 식으로 밖에 진행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회귀전의 상황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린 상혁은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쇼파로 가서 누웠다.
“그럼 쪼아대는 퍼블리셔가 없는 개발자인 이 몸은 지금부터 좀 잔다.”
“집에 가서 자라.”
“여기가 더 편해.”
“에이씨 니가 그러고 있는 거 보면 나도 자고 싶으니까 그렇지.”
“그럼 니가 집에 가서 자던가.”
“나도 여기가 편해.”
“으으···. 안 되겠다···. 선생님··· 침대 좀 주문해주세요···”
“너희 지금 얘기하는 거 40대 아저씨들같아···.”
현주가 황당하다는 투로 말하자 상혁이 눈을 감은채로 투덜거렸다.
“집에 가서 자고 싶어도 조금 있다 지훈 씨 만나기로 했단 말이에요.”
“아, 그 퍼블리셔분?”
“네.”
“결국 지훈 씨랑 하기로 한거야?”
“그렇게 될 거 같아요.”
결국 상혁은 큰빛 소프트의 유찬이 제안한 23억을 거절하고 지훈의 손을 들었다.
지훈의 말대로 해외 판매에서의 수익을 감안하면 유찬이 제안한 금액보다 더 벌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에서였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오늘 일본의 게임기 메이커 SANY와의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마리의 눈물’의 일본어판 발매에 대한 계약을 진행하기 위해서.
이런 면에서 상혁은 고등학생인게 조금 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원래 직장인이었다면 당연하게 이쪽에서 대기업인 일본 쪽에 방문해야할 것을 이쪽이 고등학생이라 해외 여행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한국으로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식 미팅자리이기 때문에 원래대로면 복장도 갖춰 입어야했지만 고등학생이라는 방패가 달린 지금은 그냥 교복으로 다 때울 수 있었다.
거기에 학교에 남아서 매일같이 밤늦게 작업해도 집에서는 야간 자율 학습 하는 줄 알고 대견해한다.
게다가 기획서 작업을 하고 있으면 매일 뭔가 열심히 쓰는 자신을 보며 부모님이 과일을 깎아서 방에 가져다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뒷면에는 그렇게 매일 밤을 새서 공부하는데 성적이 안나오는 안타까운 자식의 머리를 걱정하는 부모님의 눈물이 있었지만, 상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때 되면 그때까지 번 돈으로 아파트라도 한 채 사 드리려고 생각 중이었기 때문에.
“오빠? 오빠? 이제 슬슬 일어나셔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잠이 들었는지, 상혁은 무거운 피로감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지훈 씨한테 전화 왔는데 조금 있으면 도착한데요. 지금 가서 세수라고 좀 하고 잠 좀 깨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좀 일찍 깨워주지.”
“깨웠어요. 오빠가 안 일어난 거지.”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현기증을 느끼고는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수척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화장실에 가서는 찬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고 찬물이 얼굴에 닿으니 아까 먹은 카페인이 비로소 동작하는 느낌이었다.
미리 가져간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은 상혁이 부실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사람을 보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금세 표정을 바꾸며 미소로 SANY 담당자로 보이는 여성에게 인사를 건넸다.
“担当者が来るとは聞きましたが女性の方だとは聞いてませんでした。(담당자분이 올거라고는 들었지만 여성분이라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유창하게 말하는 상혁의 일본어에 민준을 제외한 팀원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상혁은 그 시선들을 싹 무시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このチームでチーム長役を担当しているの李祥弈です。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팀장인 이상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이번엔 상대 여성이 미소를 짓더니 한국어로 답해서 상혁을 놀라게 했다.
“저 한국어 할 줄 알아서 파견된 인력입니다. 편하게 한국어로 말씀하셔도 되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부족한 일본어 실력이 털릴까봐 걱정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잘하시던데요?”
“애니 보고 배운 일본어라 좀만 이야기를 더 했으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여고생 말투가 나왔을 겁니다.”
“여고생 말투라면?”
“마지 야박근혜?(マジやばくね?)”
상혁의 너스레를 들은 여성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푸흡, 그건 여고생 말투라기보다는 좀 불량한 말투긴 하지만···. 지훈 씨에게 들은 대로 재미있는 분이네요.”
“이쁜 분이 말씀하시니까 다 칭찬으로 들리네요. 우선 앉으시죠.”
상혁이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자 그녀는 접대용 쇼파에 앉더니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상혁에게 건넸다.
“SANY Interactive Entertainment Inc에서 영업을 맡고 있는 나츠 유미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국어가 유창하신데 한국인이신가요?”
“아버지가 한국인이세요.”
“아···. 그래서 한국어를 그렇게 잘하시는군요.”
그 이후로 어떻게 지훈과 알게 된 사이인지, ‘마리의 눈물’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상혁은, 나츠에게 의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리의 눈물의 일본어판이 돌아다니고 있다고요?”
“예. 꽤 퍼져있어요.”
“발매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어찌 구해서 하는 유저들이 생기면서 입소문으로 퍼진 것 같아요. 물론 PC 한정이긴 하지만요.”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닌게, 애당초 코믹을 메인으로 판매를 해왔었고, 그쪽에서 활동하는 서브컬쳐 사람들의 일부는 일본 쪽 동인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 중 한명이 친구에게 추천하기 위해서 직접 번역을 해서 넘긴 게 퍼졌다고 하는데, 상혁이 애당초 번역을 고려해서 게임 내 모든 스크립트를 텍스트 파일로 따로 첨부해 놓았기에 번역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흠···. 뭐, 일본 게임이 한국에서 불법 번역되서 돌아다닐 때 일본 개발자 기분이 이런 기분인가 보네요.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우선 저희도 정식 일본어 버전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불법 버전을 받아서 플레이를 했었습니다. 그 부분은 사과드릴게요.”
“뭐, 정식 발매가 된게 아니니 하고 싶으면 그 방법밖에 없었겠죠. 이해합니다.”
“대신 그 덕에 좋은 게임을 발굴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인연이 이어져서 오늘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거 고요.”
“살다보니 불법복제에 감사하게 될 날도 오네요.”
상혁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츠에게 물었다.
“그래서, SANY측에서 저희한테 미팅을 제안하신 구체적인 이유가 뭐죠? 마리의 눈물의 PS1 발매 때문만은 아니실거 같은데.”
팀원들도, 이 자리를 마련한 지훈도 당연하게 SANY측의 의도는 ‘마리의 눈물’의 PS판 발매가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혁은 생각이 달랐는데, 이미 끝물이 가까워지고 있는 PS1의 게임 발매를 위해서 본사에서 직원이 찾아올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타임라인상으로 상혁이 기억하고 있는 SANY의 행보를 기억해보면···
“지훈 씨가 말한대로 재미있는 분이기도 하지만 대단한 분이기도 하네요. 상황 추정만으로 제가 온 목적을 예측하신건가요?”
그녀는 순순히 다른 의도가 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상혁이 예상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저는 지금 이 팀에 SANY의 서드 파티 참가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그녀가 굳이 옆 나라인 한국에 와서 고등학생 개발팀을 찾아온 이유.
그것은 1999년 9월에 발표해 2000년 3월에 발매예정인 PS2의 서드 파티 개발팀에 상혁이 있는 ‘PTW’를 영입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