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에
BTS라던가 킹덤 같은 한류 열풍덕분에 한국에 대한 국제 인지도가 높았던 2020년대와는 다르게, 2000년의 한국은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기에 크리스는 자신이 한국에 오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도 게임 관련 업무로 오게 되리라고는···.
그러나 한국행을 위해 준비하던 자료 조사에서, 크리스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상외로 시장이 좀 되네?’
전체 판매량의 30%이상을 한국에서 팔아치우고 있는 ‘우주 크래프트’를 제외 하더라도, 전국에 깔리기 시작한 초고속 인터넷이나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는 PC방 등, 인구 4천7백만의 나라인데도 인프라가 미국 본토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2000년 봄에 발매한 ‘쉼즈’가 좋은 인기를 얻으면서 매출이 잘 나오고 있었기에, 크리스는 한국 시장이 앞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위한 심호흡을 하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가 잘못 생각한 부분은, 그 높은 매출 포텐셜이 죄다 온라인과 모바일로 옮겨갈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르는 입장에서, 한국은 아직 비즈니스적인 기회가 가득한 잠룡으로 보였고 그 안에 있는 PTW는 잠룡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용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인상에는, 실리콘 밸리에서도 흔히 보기 쉽지 않았던 자유로운 개발 환경도 꽤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진짜 화려하네···.”
투박한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학교 오직 이곳만 이세계라도 들어온 것처럼 다르게 느껴지는 화려한 공간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물론 그것은 강렬한 대비 효과를 위해 외장에는 일부러 하나도 손을 대지 않은 상혁의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초반엔 그로 인해 여러 문제들도 발생했는데, 그중 하나는 커피 관련 문제였다.
커피를 좋아하는 상혁이 주변에 커피숍이 없어 초고가의 커피머신을 부실에 들여놓자, 선생님들이 커피를 마시러 밥먹듯이 들락날락 거린 것.
결국 상혁은 같은 종류의 커피머신을 한 대 더 사서 교무실에 기증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 이후로도 도난 방지를 위해 교실 창문을 방탄유리로 교체한다던가, 문의 잠금장치를 교체하고 CCTV를 다는 등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현재 게임부는 학교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장소가 되어있었다.
이제는 ‘안에 황금 동상이 있다더라’ 같은 헛소문까지 퍼지고 있는 상태였지만 상혁은 어차피 관계자 외 출입금지 상태만 유지된다면 다른 부분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상혁은 크리스가 충분히 부실 안을 두리번거리도록 어느 정도 시간을 둔 뒤, 그를 접대용 쇼파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직접 탄 커피를 대접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PTW팀장 이상혁입니다.”
“마이크론 소프트 X-BOX 영업팀 팀장 크리스 레오필드입니다.”
“멀리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여행은 편안하셨나요?”
“예. 한국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의외로 발전한 모습이라 놀랐습니다.”
“잘됐네요.”
상혁과 대화하며 커피를 한입 마신 크리스는 커피 맛에 또한번 놀라야했다.
“커피가 굉장히 맛있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아니,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어요. 신기할 정도로요. 어떻게 하신 거죠?”
“별거 없어요. 적당한 원두 찾아서 10초 단위로 로스팅 시간 맞추고, 분쇄도 셋팅찾고, 기계 셋팅 바꿔가면서 제일 맛있는 셋팅을 찾는거죠.”
바리스타도 아닌 상혁이 계산으로 정확한 맛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단순 무식하게 실험 량을 늘려 찾아낸 최적의 맛이었다.
잠시 커피의 맛을 음미하던 크리스는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상혁을 보며 말했다.
“맛있는 커피에 편한 의자, 좋은 향기가 풍기는 공간. 굉장히 개발의욕이 샘솟는 공간인 것 같습니다.”
“뭐, 개발 과정에서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발악이죠.”
“그래서 그런지 굉장한 물건을 만드셨더군요.”
“나이츠 어셈블(knight’s assemble) 말씀하시는건가요?”
초창기 프로젝트 너드(project nerd)라고 명명했던 게임은 컨셉 개편을 거쳐 나이츠 어셈블이라는 게임 이름을 부여받았다.
주인공이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친구들을 모아 싸워나간다는 컨셉에 맞는 제목으로 바꾼 것이었다.
물론 그 제목의 결정 과정에는 2020년대 마블영화 팬이었던 상혁의 강력한 사심이 들어가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현재 게임의 제목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름이었다.
“예. 오기 전에 배포된 체험판을 플레이 해 보았지만 전에 없이 신선한 게임이더군요. D&D판권으로 나오는 게임이 쏟아지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요.”
99년 말에 나온 ‘플레인 스케이프:토먼트’를 비롯하여 ‘발더스의 문 2’와 ‘아이스 윈드 데일’까지 2000년도는 D&D룰을 차용한 아이소매트릭 계열 게임들이 연달아 히트하던 상황이었다.
물론 게임 업계에서 한 가지 장르가 뜨고 나면 우후죽순처럼 비슷한 내용의 게임들이 출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나이츠 어셈블처럼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컨셉을 구축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개인적으로 그 부분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단순히 D&D를 컴퓨터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게임을 권하고 함께 모여 플레이를 하는 과정 그 자체를 게임으로 만든다는 컨셉이 굉장히 강렬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현지에서도 기존 D&D팬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더군요. 체험판인데도 말이죠.”
“뭐, 정확하게 그런 유저들이 기뻐할만한 게임을 노리고 만든 거니까요. 실제로 그게 맞아 떨어진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겠지만···.”
“아뇨, 저는 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전에 나왔던 게임들도 그 정도로 성공하긴 어려웠겠죠.”
놀랍게도 크리스는 익스트림 발리볼을 포함한 PTW의 모든 게임을 플레이 한 상태였다.
그리고 크리스는 그 게임들을 하면서 한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매번 다른 특정 타겟을 만족시키기 위해 개발된 게임.’
‘익스트림 발리볼’의 경우 친구들이 모여 가볍게 할 수 있는 스포츠 대전게임에 초점을 맞추어 개발된 게임이었고, 마리의 눈물은 ‘공주 키우기2’를 재미있게 플레이했던 유저들을 타겟으로 개발된 게임이었다.
그리고 나이츠 어셈블은 D&D를 해본 경험이 있는 유저들에게 최대한의 즐거움을 주도록 설계된 게임이었고.
마치 전혀 다른 3개의 개발팀이 만든 게임처럼 각 게임이 전혀 닮지 않다는 게 크리스가 파악한 PTW게임의 특징이었다.
“보통은 한 게임이 성공하면 후속작을 개발하거나 아니면 비슷한 종류의 다른 게임을 개발하는데 여러분은 매번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게임을 만드시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라···.”
잠시 생각하던 상혁이 말했다.
“We do what we must because we can.(우린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죠.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순간 그 대사가 ‘포탈1’의 엔딩곡 ‘still alive’의 가사라는 것을 알아챈 민준이 자기 자리에서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었지만 상혁은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냥 그때그때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게임 중에 괜찮아 보이는 걸 만들 뿐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굴지의 대기업에서 저희같은 동인팀엔 무슨 일로 오신건가요? 단지 부실 구경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X-BOX 관련 제안인가요?”
“하하, 뭐, 그렇죠. 예상하시고 있는게 맞습니다.”
그렇게 말한 크리스가 가방에서 카달로그를 꺼내 상혁에게 내밀었다.
거기엔 현재 공개된 X-BOX의 개발킷에 대한 상세한 사양과 함께 개발 방식에 대한 소개 등이 적혀 있었다.
물론 이미 X-BOX가 어떤 기기인지 잘 알고 있던 상혁은 눈으로 카달로그를 훑은뒤 민준에게 건네주고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자 크리스가 바로 상혁에게 자신이 가져온 제안에 대해 꺼내놓았다.
“저희는 여러분에게 X-BOX에서의 독점계약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독점계약이라···. 퍼스트나 세컨드 파티 제안이 아니라요?”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일단 여러분이 그런 형태의 계약이 가능한 법인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어서요.”
솔직히 PTW가 법인 사업체였다면 크리스는 바로 인수 계약을 제시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놀라운 재능을 가진 개발자들은 법적으로 미성년자였고, 그렇기에 크리스는 인수 대신 지원을 하는 쪽으로 계약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여러 가지 제안을 생각해뒀는데 이곳에 와보니 대부분의 제안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군요. 혹시 SANY측과 미리 계약된게 있나요?”
상혁은 안 그래도 어제 나츠에게 받았던 연락을 떠올렸다.
당장 내일 오겠다면서 급하게 연락을 했던 그녀의 전화를 떠올리며, 상혁은 아직 계약된 바가 없다고 이야기 해주었고, 그 말을 들은 크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MS 측에서 제공할 수 있는 메리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게임사에서 콘솔 게임기로 게임을 출시하기 위해서는, 해당 콘솔 게임을 개발한 개발사에 로열티를 지불해야한다.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가 MS가 돈이 많으니 X-BOX는 무한정 퍼줄거라는 인식인데, 실제로는 그정도 수준으로 퍼주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어찌됐건 손해를 보고 팔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비즈니스는 철저히 계산속에서 돌아가는 법이다.
이전에 큰빛 소프트의 유찬이 퍼블리싱 제의를 할 때 불렀던 23억조차도, 그 이상의 수익을 올릴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부를 수 있었던 것이지 절대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처럼.
결국, 게임 라이센싱 영업이란 일종의 눈치 싸움이다.
그 이면을 자세히 보면 ‘니가 벌 돈 중에 나한테 주기로 했던 돈을 얼마 깎아주마’ 같은 개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걸 먼저 지불하면 투자금이요, 나중에 덜 받기로 하면 로얄티 할인이 될 뿐, 사실 본질적으로는 예상 매출에서 기대되는 로얄티 수익을 가지고 하는 협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그 대기업 MS에서 영업팀 팀장까지 꿰찰 정도의 특유의 달변으로 상혁을 능숙하게 요리해나갔다.
그러나 상혁의 앞에서 열정적으로 X-BOX를 어필하는 크리스가 꿈에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미 상혁이 X-BOX독점으로 게임 출시를 결정했다는 사실이었다.
어찌되었건 ‘나이츠 어셈블’의 핵심 기능중 하나가 온라인 멀티플레이였고 당시 콘솔 게임기 중에 완벽하게 온라인 멀티를 지원하는 기기는 X-BOX밖에 없었다.
물론 PS2도 멀티를 지원하게 되긴 하지만 그것은 2년후 쯤 네트워크 어댑터장비가 출시된 이후의 이야기였고, 출시 시점에서 이미 네트워크 장비 기능을 모두 갖추고 출시되는 콘솔은 그시점에서는 X-BOX가 유일했다.
그리고 온라인 멀티플레이를 메인 컨텐츠 중 하나로 잡고 있는 상혁이 이를 간과했을 리가 없었다.
단지 더 좋은 조건을 따내기 위해서 고민하는 척을 하고 있었을 뿐.
한쪽에서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거는 조건이 매우 좋은 조건임을 어필하려고 하고, 한쪽은 이미 마음이 정해져있음에도 그것을 숨기고 고민에 빠진 척을 한다.
그런 상황에서 두 사람이 펼치는 고도의 심리전을 보는 팀원들은 속으로 상혁의 연기에 혀를 내두르며 협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제안하는 조건은 저희가 서드파티에 제안하는 조건 중에서 가장 좋은 조건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더 조건을 올렸다가는 스티브가 제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고요.”
“그건 수익예상이 불확실한 경우에 한정되는 거고요, 여기를 보세요. 저희가 지금 무료로 배포중인 체험판의 PCCU(최고 동시 접속자수 : Peak Concurrent Connect User), ACCU(평균 동시 접속자 수 : Average Concurrent Connect User), UV(일 방문자 수: Unique Visitors) 숫자를 보시면 정식 발매 이후에 판매될 최소 예상 수량이 얼마인지는 예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상혁과 대화중인 크리스는 속으로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단순한 게임을 잘 만드는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상혁과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전문가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 분야에서는 자신이 전문가고, 상대는 고등학생이다.
대화의 고삐를 놓지 않으려는 듯, 크리스는 강하게 상혁을 푸쉬했다.
“그러나 그 유저 전체가 PC 유저이지 않습니까? 그 유저 중 얼마나 저희 게임기를 구매할지는 미지수지요.”
역시 쉽게 물러나지 않는 상대를 보며, 상혁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순간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기에 적절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저희 조건에 맞춰주신다면···.”
크리스는 입이 마르는지 컵을 들며 약간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PC판의 발매를 X-BOX발매 이후 시점으로 미루겠습니다.”
푸-웁!
“쿨럭, 그, 그게 가능합니까?”
“어차피 게임기 쪽 판매량은 PC판 판매량에 영향을 크게 안 미칠테니까요.”
상혁의 말을 들은 크리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 저 제안이 사실이라면 아예 예상해왔던 시나리오를 완전히 새로 써야할 수준이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