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New home
새 게임에 대한 상혁의 아이디어는 굉장히 심플했다.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자세를 취하며 주문을 외치면, 화면 안의 캐릭터가 플레이어를 따라하며 마법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화면 건너편의 상대와 대전을 하는 중2병 배틀을 게임으로 구현하는 것이 상혁의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 며칠간 지수와 함께 놀던 ‘그 놀이’를 그대로 게임으로 바꾼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동작을 취하면 그대로 게임 캐릭터가 움직이고 주문이 나간다고?”
“응.”
“그···. 그게 가능한가?”
기본적으로 지수가 아는 모든 게임은 키보드나 마우스같은 입력장치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상혁이 말한 것은 그런 것이 없었기에 지수는 플레이어의 동작을 어떻게 게임이 인식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
그래서 상혁은 지수에게 먼저 모션 인식 기술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진행했고, 대충 이해한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에 손을 괴었다.
‘음···. 중학생이 고민하는 표정은 꽤 귀엽구나···.’
상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가능하기만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래?”
“마법으로 상대와 싸우는 거잖아! 그것도 내가 만든 마법으로! 엄청 멋질 거 같은데?!”
타겟 유저인 지수가 동의한 상태에서 상혁에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좋아 그럼 구체적인 기획을 잡아보자.”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은, 상혁이 ‘중2병 배틀러’라고 임시로 이름붙인 게임의 기획에 들어갔다.
지금의 아이디어를 다듬어, 완성된 형태의 기획을 만들기 위해서···.
***
그렇게 시작된 중2병 배틀러의 기획은 굉장히 심플한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상혁이 아이디어를 게임 기획으로 다듬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독 작업에서 협업으로 스탠스를 바꾸는 과정에서, 손봐야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획서를 작업하는 부분에서 지수는 굉장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혁은 우선 그 부분부터 처리해야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획자의 툴은 MS에서 만든 오피스다.
그리고 그 툴은 기본적으로 키는 순간 사용자에게 아무것도 없는 백지를 제공한다.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온전히 사용자의 몫이다.
상혁처럼 수도 없이 기획서를 작성한 경험자조차도 완전히 처음 작업하는 문서를 작업할 때는 기본적으로 문서의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고려하게 되는데, 지수처럼 아예 기획의 ‘기’자도 모르는 초보라면 그것은 더욱 큰 벽으로 다가오게 된다.
물론 상혁은 지수가 완전히 게임 기획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흔히 게임회사에서 불친절한 사수들이 하는 것처럼 기존 기획서를 던져주고 ‘알아서 하고, 못하면 알아서해’ 라는 식으로 작업을 시키지는 않았다.
대신 상혁은 기획서가 갖춰야하는 기본적인 구성을 하나하나 짚어주면서 지수가 기획작업에 익숙할 수 있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상혁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기획적인 형태로’ 표현하는데 지수가 애를 먹자, 상혁은 아예 작업 방식을 180도 전환했다.
“내가 양식을 만들어주면 넌 빈칸만 채워.”
“빈칸을?”
“별거 없어. 그냥 캐릭터별로 그 캐릭터의 속성은 어떤 거고 기술은 어떤 건지, 그리고 기술별로 동작이나 연출이 어떻게 되는 건지 적으면 돼.”
“동작은 글로 적기는 힘들 거 같은데···.”
“흠···.”
잠시 고민하던 상혁은 서연을 불러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서연의 자리 옆에서 지수가 ‘히요오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동작을 취하자 서연이 각 동작을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모션을 스케치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 외에도 지수가 가져오는 문제는 산더미 같이 많았다.
“야, 지수야.”
“응? 이 몸이 쓴 기획서에 문제라도?”
“여기 스킬에 써놓은 ‘아마테라스의 흑염’의 설명을 보렴.”
“아마테라스의 흑염은 태양신의 능력으로 모든 화염 저항을 뚫고 한 번에 적을 재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다.”
“다 외우고 있네? 흠···그럼 여기 ‘아이기스의 천순(하늘방패)’ 설명은?”
“이지스의 천순은 천둥신 제우스의 방패로 적이 시전하는 모든 공격을 반감하고 온갖 화염에 대한 공격을 무시하지.”
“그럼 아마테라스의 흑염을 아이기스의 천순으로 막으면 어떻게 돼?”
“아···.”
그러자 상혁은 양손으로 지수의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지수에게 소리쳤다.
“이자식아아아아~~그럴 때는 어느 게 우선인지 정해놓으라고! 버그 생긴단 말이다!”
“으아아아!! 잘못했어요!!”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설정으로 잡혀있는 스킬들의 상하관계를 정리하기도 하며, 상혁은 한 스탭 한 스탭씩 ‘중2병 배틀러’의 기획을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상혁이 너덜너덜한 지수의 노트를 게임 기획이라는 새로운 무대로 하나하나 옮기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해를 넘겨 2002년이 되었다.
2002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월드컵이 있던 해로 기억되는 연도를 맞이하면서, 상혁은 기획 외에도 다른 업무를 처리해야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남겨진 부실의 처리 문제였다.
공간 자체야 학교의 것이니 학교에서 처리해도 되는 문제지만, 문제는 거기 있는 기자재였다.
의자 하나에 100만원이 넘어가는 물건도 있었고, 커피 머신도 중고로 사긴 했지만 신품 가격이 천만원 가까이 하는 물건이었기에 부실에 있는 기자재의 가격을 다 합치면 거의 억대에 가까운 상태.
상혁은 학교에 남을 서연을 위해 기자재를 남기고 가려했지만, 서연은 그런 상혁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어차피 오빠들 없으면 저는 여기 안와요.”
“그래도 쉬는 공간으로라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일하려면 이제 천하대까지 가야하잖아요. 거기도 부실 있다면서요? 거기에 갖다 놓으면 되죠.”
결국 상혁은 이삿짐 센터를 불러 안에 있는 기자재를 모두 천하대로 옮겼다.
그렇게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무대를 옮긴 PTW의 팀원들은 짐을 옮기는 날에 새 부실에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는데, 미리 공간 확인을 위해 찾아갔었던 상혁을 제외하고는 다들 첫 방문이었기에 팀원들은 모두 약간씩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현주를 제외 하면.
그녀는 3년 동안 정말 정이 많이 든 제자들이 학교를 떠난 다는 사실에 유일하게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상혁이 그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팀의 일원으로 합류하려면 얼마든지 합류해도 좋다고 이야기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교사였기에 상혁의 제안은 바로 거부되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라면서.
반대로 그녀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것보다 이별을 더 아쉬워하는 것은 상혁이었다.
조금 속물적인 느낌일지는 몰라도 그녀가 이탈하면 아예 팀에서 경리를 새로 뽑아야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사실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는 대부분의 세금문제는 전문 회계사에게 맡기고 있었지만 마리의 눈물을 출시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서류 작업을 했던 것은 상혁이 아니라 현주였다.
동인 게임 팀 시절에 마리의 눈물을 제작해 줄 CD 제작 업체를 섭외해준 것도 그녀였고 박스와 매뉴얼을 제작하는 인쇄소도 그녀가 발품을 팔아가며 소개해준 것이었다.
그 외에도 팀에 항상 커피 원두가 떨어지지 않게 미리 주문을 넣고, 때가 되면 간식을 차려놓고 팀원들을 부르거나, 부실 안에 있던 식물이 시들지 않도록 물을 주고 관리해주던 것도 언제나 현주의 몫이었다.
현주 입장에서는 귀엽고 어린 제자들이 자신의 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느낌이었겠지만, 상혁은 그런 식으로 팀내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의 존재가 개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혁은 그것을 위해서 그녀가 자비로 경리 업무나 회사 경영관련 서적을 뒤적이며 공부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돈이나 승진을 위해서 그런 것을 한 것이 아니라, 상혁들이 게임을 만드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본인이 원해서 팀을 관리해 온 것이기 때문에.
“다 왔다.”
상혁이 상념에 잠긴 사이, 현주가 도착을 알리자 팀원들이 하나둘씩 차에서 내렸다.
“오, 여기가 천하대···. 성같아서 멋지다!”
가장 어린 지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귀엽게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건물을 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고성같은 느낌의 본관과는 별개로, 상혁이 입주하게 된 게임 제작과 부실은 유리로 된 신축 건물에 있었는데, 그 안에는 로봇 학부나 컴퓨터 공학과 같은 IT 관련 학부들이 함께 입주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굳이 대학 진학에 관심이 없는 상혁을 스카웃까지 하며 데려온 총장은 해당 건물에서 가장 좋은 부실을 상혁에게 제공했다.
“오, 느낌 있는데?”
입구로 들어가자 마치 회사 로비처럼 꾸며진 입구에 커다란 PTW라는 글자가 팀원들을 반겼다.
그리고 상혁이 학교의 지원과는 별도로 준비한 다양한 새 기자재들도 팀원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이게 회의용 모니터야? 엄청 큰데?”
“회의실도 여러 개 있네요?”
“방이 많아서 이제 개별 사무실 써도 되겠다.”
“좋다아아아~~~.”
다들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상혁이 내부를 돌며 한사람씩 자리를 안내했다.
개발 편의를 위해 옹기종기 뭉쳐있던 이전의 책상 배치와는 다르게, 넓은 공간으로 옮기면서 상혁이 잡은 새 배치는 기본적으로 4개의 세션이 중앙을 둘러싸게 배치한 것이었다.
각각 기획/프로그래밍/그래픽/음악으로 분류된 세션은 넓은 여유 공간으로 팀원이 추가로 들어오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배치 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혹시 방문해서 작업해야할 외주 작업자를 위한 작업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들 감탄하며 새 공간을 둘러보는 가운데, 오직 상혁만이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빠는 아직 마음에 안 들어요? 전 예전 부실보다 훨씬 좋은 거같은데.”
서연이 묻자 상혁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솔직히 지금 있는 돈이면 아예 건물을 새로 지어도 되는데···.”
“에이, 그건 대학교 졸업하시고 나서 해도 늦지 않잖아요. 그리고 저는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래?”
“네. 오빠가 팀원들을 생각해서 배치를 정한게 눈에 보여서요.”
실제로 부실은 상혁이 인테리어부터 꼼꼼하게 참여했기에 각 파트별로 기본적인 편의성이 갖추어져 있었다.
패션잡지등의 아트 자료를 참고할 일이 많은 서연을 위해서 그래픽 파트쪽에 책장을 여러 개 배치한 점이라던가, 음악 파트 뒤편의 회의실 하나를 스튜디오 수준으로 개조해서 온갖 음향 장비를 갖춰 놓게 한 점이라던가.
전반적으로 ‘아, 이곳에서 일하면 재미있겠다.’ 라는 느낌이 드는 배치였기에 서연은 지금의 부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자 상혁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는 서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뭐, 그렇게 생각해주니까 고맙다.”
“전 움막에서 일하더라도 오빠들이랑 일할 수 있으면 상관없어요.”
“그건 더 고맙네.”
상혁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상혁이 자기 자리로 찜해놓은 자리에 앉아 의자를 슥슥 돌리고 있는 지수를 향해 걸어갔다.
양손에 주먹으로 만든 감자를 쥔 채로.
***
이미 짐을 다 옮겼기에 상혁 일행의 졸업식은 생각보다 싱겁게 지나갔다.
학교에서 학교의 명예를 빛낸다는 이유로 감사패를 받는 등의 소소한 이벤트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3년간 그들이 보여준 족적에 비하면 그건 정말로 조용한 졸업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졸업식이 지나고 며칠이 지난 지금, 현주는 교무실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주선생, 왜 또 멍하니 있어?”
동료 선생님이 말을 걸자 현주는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손에 쥔 잔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이제는 싸늘히 식어버린 검은 커피가 아무 향도 내지 않은채 조용히 담겨 있었다.
“그렇게 얼빠지게 있으면 되겠어? 할 일도 많은데. 아끼던 제자들이 졸업해서 허전한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얼이 빠져있으면 선생질하기 힘들어?”
자신도 안다.
처음 상혁이 있는 부실을 찾아갈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선생에게 있어 제자는 스쳐가는 구름 같은 존재다.
언제나 그들은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야하고,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여한다.
그리고 새 구름을 맞아 다시 그들을 품어야 하고.
“쓰다···.”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현주가 중얼거렸다.
상혁이 교무실에 기증한 커피 머신으로, 똑같은 원두에, 똑같은 제조법을 썼는데도 이상하게 상혁이 내린 커피는 항상 그녀가 내린 커피보다 맛이 있었다.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마법.
그녀에게 있어서 최근의 3년은 마치 마법과도 같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밖에 안된 어린 제자들이 계약을 위해 일본에 가야한다고 여권을 준비하겠다고 하질 않나, 그 이후엔 라스베가스에 가서 이벤트를 한다고 하질 않나, 그러더니 기어이 미국에서 나온 최신형 게임기의 런칭 타이틀까지 만들어버렸다.
웬만한 게임회사에서도 소화하기 힘든 일정을 소화해가면서.
무언가를 정말로 즐기며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특유의 에너지를 풍긴다.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그 에너지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말 안 들려? 수업 시작한지가 언젠데 왜 수업에 안 들어가냐고!”
“저, 안되겠어요.”
현주는 갑자기 일어나서 교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수업이 있는 교실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그러자 방금 전까지 현주를 향해 소리 지르던 교사가 현주를 향해 외쳤다.
“이선생! 지금 어디가!”
“저 선생 때려칩니다! 찾지 마세요!”
“뭐!? 미쳤어?!”
“미쳤어요! 미쳤으니까 저는 미친놈들 찾으러 갑니다아아아!!”
그렇게 외치며, 현주는 힘차게 운동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를 향해 달렸다.
자신이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니, 자신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 소중한 제자들에게 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