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이의 제기
어둠속에서 쿠키를 받으며 지수가 등장하기 정확히 30초전.
‘오빠, 그 쿠키 저한테 던져요!’
‘꼭 그걸 해야겠냐?’
‘멋지게 등장하고 싶단 말이에요!’
입모양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손짓 발짓을 하는 지수를 보며 상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남아있는 쿠키를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기다리느라 지칠 뻔 했어요. 상혁오빠. 이제 그럼 제 차례인거죠?”
어둠속에서 상혁이 던진 쿠키를 물며 짜잔 하고 등장하는 지수의 모습은 지수가 원한대로 만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문제는 장르가 개그만화라는 거였지만.
지수는 20살이 넘어서도 원체 키도 작고 귀여운 얼굴상이라 위엄이 전혀 살지 않았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몇 안 되는 마스터 클래스 직원이었는데도.
그래도 지수 본인의 머릿속에는 방금 등장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자꾸만 입가가 씰룩씰룩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묘하게 귀여웠기에 상혁은 별다른 태클을 걸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
“자, 그럼 지수야, 싱글플레이 설정 쪽은 너랑 하린씨가 같이 해줘.”
“후후. 맡겨주시죠. 무려 ‘마스터 클래스’ 직원인 제가, 멋진 결과물을 뽑아 낼 테니까.”
지난번 ‘GOS’의 설정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지수를, 상혁은 파다완에서 마스터 클래스로 올려주었다.
사실 딱히 승급 시험 같은 게 아니라, 다른 마스터 클래스 직원 3명의 추천이 있으면 승급이 가능한 제도였기에, 지수의 마스터 승급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자신과 서연, 민준만 있어도 마스터 클래스 승급 조건이 되니까.
대신 그 부작용인지, 그 이후로 지수에게 ‘마스터 클래스인’ 이라는 수식어를 자주 붙이는 습관이 생기긴 했지만.
“그런데 상혁오빠. 싱글 플레이는 멀티플레이의 확장 같은 느낌으로 만드실 생각이에요?”
“흠···. 그건 일단 지수 네 판단에 맡길게. 스토리에 맞는 쪽으로 내가 시스템을 잡을 테니까, 편하게 작업해.”
“저는 지금의 멀티플레이 같은 느낌의 싱글이 괜찮을 것 같은데요. 뭔가 로망도 있고.”
“로망?”
상혁은 자신의 플레이 시나리오를 본 지수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설마 이 시나리오 그대로 멀티가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어? 그래서 그렇게 적은 거 아니에요?”
“아니, 플레이 시나리오는 구체적으로 보는 사람이 게임이 추구하는 로망을 이해할 수 있게 쓰는 게 목적이니까, 실제 게임 유저들은 저렇게 멋지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그럼 어떻게 움직이는데요?”
“일단 초반에 보스와 빠르게 만나는 바람에 공략 패턴이 꼬였지?”
“예.”
“그럼 바로 팀장이 이렇게 말하겠지. ‘님 들! 이번 판 말아먹었어요! 빠른 전멸 부탁요!’라고.”
상혁의 말을 들은 지수가, 뭔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와···. 로망 없어···.”
“그리고 멀티에서 자기 보상 포기하고 저렇게 만화처럼 희생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보통은 저 상황이면 ‘파장님 이거 중간보스 떠서 못 잡을 것 같아요! 리트라이 하죠.’라고 하겠지.”
“와···. 멋없어···.”
“뭐, 그래서 어느 정도 플레이 시나리오는 펌핑이 들어간 내용이 되는 거지. ‘유저들이 이렇게 할 것이다’ 보다는 기획자 입장에서 ‘유저들이 이렇게 할 정도로 몰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사항 같은 거지. 현실 유저들의 플레이를 그대로 적으면, 그만큼 추구하는 로망을 표현하기 어려워지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반면에 싱글플레이는 완전히 의도대로의 전달이 가능하니까, 거기 힘을 최대한 줘야겠네요. 싱글플레이에서 받은 감동이, 멀티플레이까지 이어지도록.”
“그 부분은 지수 너만 믿을게.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을 만들지는 생각해봤어?”
지수는 이미 상혁의 플레이 시나리오를 읽은 상태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싱글 플레이의 스토리 테마는 ‘전승’으로 하려고 생각중이에요.”
“전승이라···. 좀 더 설명해봐.”
“우선 모든 유저가 싱글플레이에서 겪는 시련은 같은 거잖아요? 게이트가 열리면서 쏟아져 나온 괴물들에게 습격당한 주인공이, 괴물의 피를 뒤집어쓰고 잠재력을 각성하는 거요.”
“그렇지.”
“그 이후에 유저의 선택에 따라 각 직업의 전문가를 만나 수련을 받는 거고요?”
“일단 지금은 그래.”
“그 설정이라면 역시 선대 스승들의 유지를 주인공이 받는 구조가 좋겠죠. 이 게임 멀티플레이에 NPC는 안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싱글플레이에서 자신을 가르쳤던 NPC가, 각자의 유지를 해당 직업을 마스터한 유저에게 전달하는 느낌으로 가는 거죠.”
“그래서 ‘전승’이라는 건가···.”
상혁이 미소 지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하린 씨는 어때요?”
“저는 상혁 씨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이 좋을 것 같아요!”
하린의 말을 들은 지수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프로젝트에 들어오고 나서, 지금까지 하린에게 제대로 된 피드백을 들은 기억이 없어서였다.
‘너무 상혁 오빠한테 다 맡기는 느낌인데···. 뭐···. 마스터급 직원이 아니니까···. 그건 어쩔 수 없나···?’
지수가 고민하는 사이, 상혁도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떤 사례를 보여줘야, 제대로 의미가 전달될까 싶어서.
“흠···. 어떤 예가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자료실 좀 다녀올게.”
작업실을 나선 상혁은 자료실로 향했다.
PTW의 ‘자료실’은 각종 게임과 애니메이션, 피규어부터 만화책에 소설, 컴퓨터 관련 전공서적들이 방대하게 들어가 있는 일종의 창고였다.
기본적으로 대여가 원칙이나 직원이 열람하는 중에 해당 자료가 마음에 들면 별도로 구매비도 지원해주고 있었다.
예를 들면 소설을 빌려 읽다가 마음에 들면, 회사에 신청하면 해당 소설 전권을 지원해주는 식으로.
딱히 미디어만 지원하는 게 아니라, 피규어나 프라모델도 자료로 신청 가능했기 때문에 자료실은 항상 사람으로 북적였다.
아예 본인이 사려던 물건도 먼저 회사 자료로 신청한 후에 실물을 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직원도 꽤 있었으니까.
PTW의 자료실은 직원들에게 일종의 콘텐츠판 ‘기미상궁’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자료실에서, 상혁은 ‘미출시 DVD’ 항목으로 이동했다.
거기엔 일본에서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들을 녹화한 자료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찾고 있는 자료가 비교적 최신 자료였기에 상혁이 원하던 자료를 찾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혁은 금세 자신이 원하는 자료의 DVD를 찾아내고는 하린이 있는 작업실로 되돌아왔다.
“이거, 한번 보면서 둘이 이야기 나눠보세요. 일단 8화까지는 무조건 보시고, 13화까지 보는 걸 추천 드리고, 재밌으면 끝까지 보시고요.”
“이게 뭐죠?”
“흠···. 킹 갓 엠퍼러 로봇 애니메이션?”
상혁의 말에 하린과 지수가 상혁이 가져온 DVD를 보았다.
거기엔 매직으로 된 굵은 글씨로 내용 구분을 위해 써 놓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천장돌파 그랜나간’
그렇게 두 사람에게 애니 감상을 지시하고 부실로 돌아온 상혁은 본사 건물 관련 사항을 포함한 몇 가지 결제를 처리한 뒤 다시 작업실로 되돌아왔다.
함께 애니메이션이나 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미 회귀 전에 몇 번이고 돌려 본 애니메이션이기도 했고, CEO로써 처리해야 하는 업무도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작업실에 돌아온 상혁은, 방금 그렌나간의 8화 감상을 끝내고 휴지를 붙잡은 채 울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흐어어엉···. 아니키이이이···.”
“어떻게 저런짓으으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혁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늦었으니까 두 사람 다 적당히 보다 퇴근해요.”
“네으으으으···.”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수의 손은 리모콘으로 다음 화를 재생하고 있었다.
***
그날 밤새서 한 번에 완결까지 애니메이션을 본 두 사람은 나란히 연차를 내고 하루를 쉬었다.
그리고는 상혁에게 싱글 플레이 스토리 라인을 기획하기 위한 시간을 요청했다.
좀 더 제대로 된 스토리를 잡아보고 싶다고.
상혁은 그런 순간이 좋았다.
작업자 스스로가, 결과물의 퀄리티를 올리기 위해서 시간을 요청하는 순간이.
단순히 마감을 맞추기 위해 허덕이는 것보다 결과물에 욕심을 내는 편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오곤 했으니까.
“좋아. 근데 콘테스트 마감을 고려하면 일주일 이상은 힘들어. 그 전에 확실히 싱글플레이 컨셉이 잡혀야하니까. 그리고 콘테스트 작업은 일과 시간이후에 하는 게 원칙인건 알지? 본인 맡은 업무는 다 하고 작업하던가, 아니면 다른 직원들처럼 휴가를 내고 작업을 하던가.”
“그거야 기본이죠! 믿으세요. 상혁 오빠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감동적인 물건을 가져올 테니까!”
“그래. 기대할게. GOS때보다 더 뽕 차는 멋진 걸 만들어줄 거라고.”
상혁이 웃으며 말하자 지수의 표정이 바뀌었다.
“뽕 차는 거요? GOS때처럼?”
“어. 그런 종류. 아니면 비슷한 느낌으로라도.”
“흠···. 이번엔 좀 다른 테마로 갈까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GOS때처럼 가는 게 좋을까요?”
지수가 묻자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지난번 GOS때 유저의 기대치가 크게 올랐으니까. 돈도 많이 벌었으니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겠지. 나는 우리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흠···. 그런가?”
“그런 거야.”
그때, 하린이 옆에서 끼어들며 말했다.
“상혁 씨가 말하는 건데 당연히 맞겠죠. 정말로 PTW팬들은 GOS때만큼의 무언가가 뻥 터지길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요. 저도 미친 듯이 기대하고 있어요. 이 멋진 게임이 출시되는 날, 유저들이 보여줄 반응을요!”
“하린 씨 말대로, 이제는 우리도 AAA게임을 만드는 게임사로써의 위용을 보여줘야지. 우리를 믿어주는 유저들의 기대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흠···. 오빠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도 최선을 다 해볼게요. 그때보다 더 멋진 게임이 나올 수 있게요!”
상혁 앞에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을 한 지수가 하린의 손을 잡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민준이 상혁에게 말을 걸었다.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즐거워 보인다?”
“어? 재밌지. 게임 개발이 그런 거잖아.”
“그 즐거운 걸 하는데 왜 나는 안 부르냐?”
민준의 말에 상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민준은 서연처럼 자신을 따라 팀에 가겠다고 이야기 한 적이 없었으니까.
“어? 뭐야. 너 설마 지금까지 내가 부르는 거 기다리려고 팀 가입 안한 거였어?”
그러자 이번엔 민준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상혁을 보며 말했다.
“야, 그럼 내가 왜 지금까지 팀 가입 안하고 기다렸겠냐? 내가 전에 말했잖아. 난 너랑 게임 만들고 싶어서 다시 이 업계에 온 거라고.”
“근데 우리 팀. 이미 프로그래머는 있는데?”
“뭐?!”
민준이 충격 받은 표정으로 상혁에게 물었다.
“누군데?”
“이범배 씨.”
“그게 누군데?”
“프로그래머 면접 때 너도 들어왔었잖아. 이범배 씨 몰라 이범배 씨?”
잠시 고민하던 민준은 범배의 이름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면접 때, 범배를 강력히 추천하며 상혁이 했던 말이 함께 떠올랐다.
“야, 혹시 너···. 전에 말한 그거 때문에 그 사람 뽑은 거야?”
1년차 프로그래머인 이범배가 지원했을 때, 상혁은 그의 이력서를 보자마자 문답무용으로 면접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민준에게 반드시 이범배를 뽑아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언젠가 저 사람이 메인으로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팬들을 모아놓고 ‘이범~~배!’ 연호를 시킬 수 있다고!”
“그게 뭔데 씹덕아!”
“어○져스 인피티니 워에서 블랙팬더가 와캈다 병사들하고 외치는 소리.”
그제야 민준의 머릿속에 이전에 봤었던 영화의 한 장면이 기억났다.
도시를 침공하는 괴물들의 무리를 보며,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외치던 소리.
“이범----배!”
“이범-배!”
“이범----배!”
“이범-배!”
“와캈다 포에버어어어!!”
그랬다.
이 미친 CEO는 단순히 이범배의 이름이 영화에서 외친 대사와 닮았다는 이유로 이범배를 채용한 것이었다.
“이 자식아! 직원을 그런 기준으로 뽑으면 어쩌라고오오오!!”
민준이 상혁의 어깨를 마구 흔들자 상혁이 항변했다.
“그래애도 일은 잘하아아니까 괜찮찮아아아아~~.”
애당초 아무리 이름이 마음에 든다 했더라도, 채용 사유가 장난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인성이 좋지 않았거나 기본 실력이 미달이라면 상혁은 이범배를 채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민준은 흔들고 있던 상혁의 어깨를 놓고는 상혁에게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뭐, 그럼 프로그래머 2명으로 가라.”
“본 개발도 아니고 이번엔 알파버전도 안만들 건데?”
“그럼 이범배 씨는 왜 필요한데?”
“초기 기획부터 참여해야 나중에 인터뷰할 때 내보내지. ‘여기 이범배 씨가 처음부터 개발에 참여한 핵심멤버입니다.’ 하고.”
“그거 참 X신 같은 생각이군.”
그렇게 말한 민준이 미소를 지었다.
“당장하자.”
그렇게 말하며, 민준이 몸을 돌렸다.
“어? 뭘 하려고?”
“팬들이 이범배 씨를 연호하게 만들고 싶다며. 그럼 그렇게 되게 해 줘야지.”
“어떻게?”
“어떻게 긴 어떻게야. 진짜로 핵심 멤버로 만들면 되지.”
그렇게 말하는 민준의 표정은, 어느새 장난기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가르칠 테니까, 나한테 보내. 아주 그냥 스파르타가 뭔지 보여줄 테니.”
그날, 상혁의 이야기를 들은 범배는 업계 최고 수준의 프로그래머라 불리는 민준이 자신을 가르쳐 준다고 제안을 했다는 사실에 거의 기절할 만큼 기뻐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상혁은, 민준의 손을 잡고 기뻐하는 범배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얘는 민준이 별명이 왜 다스베이더인지 아직 모르는구나.’라고.
***
그날부터 말 그대로 ‘지옥’을 보게 된 범배와는 다르게, 지난번 코믹콘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직원들은 잔뜩 의욕에 차서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꾸리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개의 팀이 생성되고 해체되기를 반복할 만큼.
이유도 다양했다.
팀원을 구하지 못해서, 혹은 다른 프로젝트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아무리 해골을 굴려 봐도 재미있는 게임으로 완성되지 않을 것 같아서.
상혁은 그것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애당초 게임 개발을 목표로 업계에 들어온 사람들이니, 자신이 생각하는 게임을 만든다는 것에 대한 열정이 있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러나 상혁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상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콘테스트에 대한 직원들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것이었다.
각 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시니어 직원들끼리, 서로의 팀에서 확보한 마스터급 직원의 수를 두고 ‘급’을 나눌 만큼.
모든 의도가 항상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건 아니다.
상혁의 의도대로 코믹콘 참가는 분명 모든 직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데 성공했지만, 그 불이 타오르는 방향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스터급 3명 포함된 팀에서 개발 팀원 모집합니다.]
[DP-045디자이너인 마스터 혁진씨가 있는 팀에서 개발 팀원 모집합니다.]
처음엔 장르나 게임 아이디어를 소개하는 형태였던 게시판의 인력 구인 페이지가, 어느새 점점 마스터급 직원들의 네임 벨류를 내세우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상혁은 본인 업무에 빠져 미쳐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곪기 시작한 콘테스트의 열기는 곧, 회사의 핵심이자 스타 개발자들의 모임이나 다름없는, PTW팀원들이 소속된 팀을 찾는 분위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만약 별 볼일 없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면, 설득을 해서라도 자신의 팀에 끌어들이겠다는 열망으로.
그리고 그 폭풍 속에서 가장 메인 타겟이 되는 대상은, 역시나 앞서 출시된 두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갓겜’으로 바꿔놓았던 PTW의 CEO, 상혁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갑자기 부실에 찾아온 직원들이 면담을 요청했을 때, 상혁은 콘테스트 기간 중에 계속 들어왔었던 멘토링 관련 면담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단체로 몰려온 직원들이 상혁에게 요구한 것은, 상혁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금의 콘테스트 방식은 불공평하니 재검토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흠···. 어떤 점이 불공평하다는 거죠?”
상혁이 묻자, 찾아온 무리중에 대표로 보이는 시니어 직원이 당당하게 답했다.
“대표님의 존재 자체가 좀 불공평하죠.”
“제 존재가?”
“대표님은 월드클래스 기획자시잖아요. 저희가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대표님이 참가한 팀에서 대표님이 손댄 아이디어가 우승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콘테스트 결과도 그랬으니까요.”
실제로 지난번 콘테스트에서 인기투표 1 2위를 차지하여 개발이 확정된 프로젝트 둘 다, 상혁이 중간에 도움을 주었던 프로젝트들이었다.
아직 원석 단계였던 아이디어를 수정해서 빛나는 아이디어로 바꿔주었던 것.
여기 모인 팀장들은, 상혁이 공평하게 모든 프로젝트를 봐주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상혁이 콘테스트에 관여를 하지 않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들의 의견은 받아들여 질 것이다.
지극히 합리적인 요구니까.
세상에 수많은 회사들이 수평적 조직문화를 자랑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지키는 회사는 많지 않다.
직급, 그리고 경험에 따른 차이는 싫어도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알고 있는 상혁은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그 말을 하는 대상이 어떤 파트에서 일하고 있건, 어떤 직급의 사람이건 합리적인 의견 제시는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지금의 요구는 지극히 합리적인 요구였다.
자신이 꿈꾸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취지인 이번 콘테스트에서, 상혁의 참가는 밸런스를 무너트리는 치트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의 그런 발상은, 듣고 있는 상혁을 황당하게 하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서연이, 상혁의 목소리를 듣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예전에 엘란테에서 표절 건으로 상혁을 엿 먹였을 때에도, 상혁이 지금 같은 목소리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혁은 이 시니어직원들이 가진 오해를 반드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자신이 콘테스트를 연 이유는, 지금 눈앞의 팀장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으니까.
살짝 치밀어 오를 것 같은 분노를 속으로 가라앉히며, 상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눈앞에 서 있는, 자신보고 콘테스트에서 빠져달라고 요청한 건방진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혹시 여러분, 콘테스트에서 1등 하려고 게임 만들고 계세요?”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목소리는, 한없이 상냥하면서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