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NE 콘벤션
세계의 수많은 게임 회사 중에서도 자체 컨벤션을 개최하는 업체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콘솔 패키지 게임 개발사가 아닌 온라인 개발사가 진행하는 행사들이었다.
2007년부터 열리기 시작한 ‘든파 패스티벌’도 그렇고, 독립 컨벤션 중에 가장 유명한 행사인 ‘눈보라컨’ 역시 2005년에 ‘월드 오브 전쟁크래프트’의 첫 번째 확장팩 ‘잘타는 성전’의 첫 번째 신규 종족을 발표하는 장소였으니까.
다른 회사들도 중소형 규모의 행사를 주최하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이벤트 성격향이 강한 행사이지 행사 자체만 가지고 홍보를 목적으로 자사의 신작이나 확장팩 정보를 최초로 공개하는 회사는 극히 적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비록 몇 가지 온라인 게임을 서비스 하고 있긴 하지만 메인을 패키지 게임으로, 그것도 시리즈가 아닌 매번 새로운 게임을 발표하는 PTW에서 팬들을 위한 독립행사를 주최한다는 소식은 게임 업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최소 2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행사를 벌여놓고, 그곳에서 신작을 개최하면서 ‘자사의 게임’만을 소개하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로 개발사의 자신감을 표출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뭐, 1회긴 하지만 MS쪽의 마케팅 지원도 있었고, GW쪽의 언플도 있었으니까 실패하지는 않겠지. 실제로 티켓도 전부 팔았으니까.”
“적자는 엄청나게 보게 생겼지만요.”
이번 PTW의 자체 행사인 NE의 티켓 가격은 2만 5천원.
거의 염가형 패키지 게임을 한 개 살 수 있는 가격이었지만 상혁이 구성한 사은품을 생각하면 절대 낮은 가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전문 제작사에 의뢰해서 만든 캔버스 가방에 가득 담긴 사은품만 해도 원가로 그 정도 가격이었으니까.
거기에 실제 행사장 대여비와 부스 제작비, 그리고 행사 진행을 위해 고용한 수많은 도우미들의 인건비를 감안하면 입장객 한 명당 무려 수십만 원이 넘는 손해를 PTW가 감수해야했다.
티켓 판매 수량이 2만장이고 3일 동안 하는 행사니 총합해서 지출된 비용만 수백억을 가볍게 넘어가는 지출.
그리고 그 비용의 태반이 3일 쓰고 철거할 부스 인테리어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주가 비용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상혁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렇게 답했다.
“돈 벌어서 어따 써요? 이런데 써야지.”
상혁의 그런 대답을 듣고, 현주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제자는 현주가 들었던 경영인 수업에서, 교수나 동기들이 하는 ‘기업의 목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혁이나 민준에게 있어, ‘돈’이란 것은 단순하게 ‘게임을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게 하는 힘.’에 불과 했다.
그것이 PTW가 지향하는 단 하나의 기준이고, 모든 것의 기준이다.
업계 최초로 이직 자에게도 보장되는 근속 연금?
그것 역시 복지를 위해서 만든 제도가 아니다.
각종 보너스가 넘치는 PTW의 복지 제도 안에서도, 스스로에게 안주하지 말고 어떻게든 마스터 등급이 될 때까지 정진하라는 의미의 동기부여용 복지이지.
한명의 직원이 마스터 등급이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는 동안 성장한 그 직원의 능력은 못해도 회사가 지불해야할 연금 이상의 가치를 가질 것이라고, 상혁은 믿고 있었다.
뭣보다 회사를 위해서 최선을 다 한 직원들에게는 응당한 보상이 따라야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먹고 살만하다고 매일 출근해서 기계처럼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갈고 닦아서 그것이 어느 분야든 ‘마스터’소리를 들을 정도의 실력을 갖춰보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런 회사의 진심이 잘 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단 3일의 행사를 준비하기위해 투자한 한 달의 기간 동안, 직원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최고의 행사를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었으니까.
거의 테마파크 수준으로 준비된 부스를 둘러보면서, 상혁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게임의 홍보 효과라던가 인지도 상승 같은 부차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 행사장을 찾은 팬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좋은 축제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수많은 스텝들이 분장을 한 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행사장은, 적어도 PTW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아볼만한 즐길 거리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단순히 자사 게임의 차기작 홍보를 위해 준비한 공간이 아니라, 와서 즐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 만든 공간이었으니.
상혁은 자신들이 준비한 이 행사를 팬들이 즐겁게 만끽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팬들을 보면서, 직원들도 기쁘게 행사를 즐길 것이고.
기획부터 준비까지 반년 이상 들인 이 거대한 축제는, 개발자와 유저들이 모여 이루는 거대한 놀이의 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장소 임대료나 부수적인 비용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부스 설치비용만 300억이 넘게 투입된 초유의 독립 컨벤션이, 오직 그 행사를 위해 전 세계에서 방문한 열성적인 팬들과 함께 드디어 그 막을 열게 되었다.
***
“Shit, 사람 미어터지는 거 보게.”
“에드, 애가 듣고 있어요.”
2007년 코믹콘에서 PTW의 팬 행사를 진행한 장본인이자, 현재는 직장을 관두고 게임 리뷰어로 활동 중인 에드워드 허먼이 사람들을 보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개장 전부터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그런 그의 가슴에 벅찬 감동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게 전부 PTW팬이라니.”
사실 입장권 숫자만 더 많았으면 이것보다 더 올수도 있었겠지만, PTW에서 판매량을 엄격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행사장에는 정확히 2만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엔 표를 구하지 못해 몇 배의 가격을 지불하고 암표를 구한 사람도, 예약 첫날 미친 듯이 F5를 눌러 예약에 성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자신을 포함한 수백 명은, 정말 운이 좋게도 PTW에서 직접 초대한 초대장을 받은 ‘럭키 가이’일테고.
[2007 코믹콘에서의 팬 행사 참가에 감사드리며, PTW에서 열리는 첫 자체 컨벤션의 초대장을 선물해드립니다. 거주지가 행사지인 샌프란시스코와 다른 분들은 연락주시면 비행기표와 호텔비용도 PTW측에서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부디 저희 행사에 참가하시어 즐거운 자리를 빛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신이 주최했던 행사에 참가했던 PTW의 팬들이나, 그 해 PTW관련 팬 부스를 운영했던 팬들의 대부분이 PTW에서 보낸 메일을 받았다.
그것도 비행기에 호텔비까지 지원하겠다는 제안으로.
당연히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PTW의 초청에 응했고, 허먼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명이었다.
게다가 혹시나 해서 보낸 ‘가족도 데려가고 싶은데요.’ 라는 허먼의 메일에 PTW가 가족 몫의 티켓까지 보내준 것이 허먼을 더욱 기쁘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PTW는 팬한테 감사할 줄 아는 제작사라고.”
“여보, 그 얘기 1번만 더하면 100번이에요.”
“아 씨, 회사가 자꾸 감동받게 하잖아.”
그때,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은 허먼의 딸이 조막만한 손으로 아빠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빠, 여기가 디즈니랜드야?”
“오, 애니. 미안하지만 여긴 디즈니랜드가 아니란다.”
허먼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이제 막 입장이 시작된 행사장 입구를 보며 딸에게 말했다.
“하지만 디즈니랜드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야.”
***
“이번 신작은 판타지인가?”
딸을 안고 입구로 들어간 허먼을 맞이한 것은, 마치 르네상스 페어를 연상하게 하는 중세 판타지 풍의 각종 부스들이었다.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는 온갖 먹을거리부터 형형색색의 나무와 유리로 된 공예품을 개성 있는 복장을 입은 스탭들이 팔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게임의 홍보라기보다는, 마치 이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같았다.
“오, 귀여운 아이네요. 복장이 특이한데, 어느 지방에서 오셨죠? 오늘 축제는 바깥손님들이 특히 많이 오는 느낌인데.”
모든 스텝들이 관람객을 ‘바깥손님’이나 ‘이방인’ ‘외지인’ ‘손님’등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마치 본인들이 다른 세계의 주민인 것처럼.
물론 그것도 즐거운 체험이었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PTW의 신작이 무엇인가’가 가장 알고 싶은 정보였으므로 스탭들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텝들은 ‘신작? PTW? 다른 나라의 이야기인가요? 게임이라면 우리나라의 전통 카드게임인 가우딤을 말씀하시는 건가?’라는 등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이게 영어인지 프랑스어인지 라틴어 인지 모를 정도로, 온갖 고유명사가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가운데 허먼은 가까스로 이 세션의 메인이벤트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스텝들이 마치 게임 NPC라도 되는 것처럼 ‘검투 대회는 꼭 보셔야 해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딸에게 귀여운 고깔모자를 씌우고 얼굴만 한 막대사탕을 쥐어준 채, 양손에 먹을 것을 가득 들고 부스 안을 돌아다니던 허먼은 입장을 기다리는 기다란 줄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가서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이미 공개 행사가 시작되었는지 날카로운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와 탄식이 교차하고 있었다.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거죠?”
“글쎄요. 검투사 게임이라도 만든 건가? 정확한 건 알 수 없죠. 세계 최고의 돌아이들이 하는 행사니까.”
“그렇군요. 전 에드워드 허먼입니다. 이쪽은 제 딸 애니, 옆에 있는 미인은 제 아내 클레어입니다.”
“리차드입니다. 게임 기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 저랑 비슷하시네요. 전 게임 전문 리뷰어를 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같은 줄에 서게 된 허먼과 리차드가 사이좋게 인사를 나누곤, 서로 부스에서 얻은 정보를 종합하여 신작이 무엇인지 추론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PTW팬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기에, 두사람이 친해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잠시 후 목소리를 높이며 신작을 가지고 내기를 거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분명 마리의 눈물 2가 맞을 겁니다! 1편 나오고 지금 눈물로 2편을 기다리는 팬들을 위한 작품이 분명합니다!”
허먼의 말에 리차드가 응수했다.
“마상 창 시합을 소재로 한 게임이 분명하다니까요?! 중세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는 RPG일겁니다!”
“말발굽 소리가 안 들리지 않습니까! 젠장, 기자님이 게임 전문가라면 전 PTW전문가라고요!”
“그럼 마상 창 시합은 아니더라도 무조건 검투사와 관련된 무언가 일겁니다! 100달러 걸죠!”
“좋습니다! 저도 걸죠!”
허먼이 내기를 받는 순간, 리차드는 뭔가 쌔한 느낌이 등골을 가르는 것을 느꼈다.
뭔가의 실수를 했다는 느낌.
PTW와 연관된 기사를 쓰면서, 단 한번도 PTW의 기괴한 행보를 자신이 맞춘 적이 없다는 경험에서 나온 위기신호였다.
‘아냐, 그래도 무조건 맞아.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나오면 바로 물어봐야지.’
순간, 두꺼운 나무로 된 벽 너머에서 엄청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뭔가의 사고라도 터진 것처럼.
그리고 한참동안 웅성대는 소리가 나더니, 무거운 나무로 된 입구가 ‘끼이익’하는 육중한 소음을 내며 열리는 것이 보였다.
‘뭐지? 뭘 한 거지?’
그러나 허먼이나 리차드가 기대한 것처럼, 안에서 참가자가 우르르 몰려나오는 일은 없었다.
단지 중세시대 귀족의 종자처럼 보이는 옷을 입은 작은 소년이, 줄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을 뿐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세오빌 왕국의 가장 위대한 전사들이 싸우는 혈투를 지켜보실 행운의 관람객을 모집합니다! 앞쪽에 계신 손님부터 천천히 질서 있게 입장 부탁드립니다!”
앞서 들어갔던 거의 천명에 육박하는 관객이 한명도 나오지 않고 사라진 것을 보면서, 허먼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말했다.
“입구랑 출구가 다른 시설인가? 아까 비명은 뭐지?”
그러나 그것을 알 수 있는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불길한 느낌으로, 수없이 많은 발자국이 찍혀있는 모래바닥에 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붉은 핏자국만이, 이 장소에서 뭔가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일단 즐깁시다. 저도 르네상스 페어는 몇 번 가봤지만, 이정도로 리얼하게 꾸민 세트는 처음이에요.”
리차드의 말에 허먼이 정신을 차렸다.
그의 말대로, 행사장 입구를 넘어선 이후로 완전히 중세시대 주민이 된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고 있는 세트였으니까.
집중하지 않으면 손해일 것이다.
“입장료가 전혀 비싼 게 아니네요. 진짜 돈 엄청 썼겠어요.”
“어휴, GOS공개하던 E3때도 장난 아니었습니다. 완전 사람을 압도하는 수준이었죠.”
“거길 가셨어요?!”
허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자, 리차드가 웃으며 말했다.
“기자로 참가했었습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기자였으면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이번 행사는 일반 관객도 참가 가능하게 바꿨잖습니까. 못해도 수백억은 들었을 것 같은 세트까지 준비해서. 아, 시작한 것 같습니다.”
리차드가 자세를 고쳐 잡자 아까 입구에서 관객을 통제하던 소년이 촐랑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외쳤다.
“오늘 이렇게 왕국 축제에 오신 방문객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을 위해 최고의 검투사들이 자신의 기량을 증명하기 위해 대기 하고 있습니다! 새 시대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나팔 소리와 함께 한쪽에서 쇠사슬로 매인 육중한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세시대 영화에서 성문이 열릴 때 나오는, 그 특유의 ‘티티티티티틱’하는 금속음과 함께.
-쿵-쿵-쿵-
한 번도 본적 없는 외형과 음색을 가진 악기들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운데, 육중한 북소리에 맞춰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문 안에서 걸어 나왔다.
남자가 걸을 때마다 들리는 북소리가, 마치 남자의 발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리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무적의 챔피언! 전장의 신의 사생아! 할로우 공국이 낳은 최강의 전사! 막시밀리안 크로커스으으으!!!”
쇼다.
어디까지나 쇼일 뿐이다.
그러나 성연이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음악과, 업계 최고의 실력을 가진 SFX전문가 클라라 케이시가 직접 만든 환경음.
그리고 진짜 나무를 깎아 만든 세트에서 풍겨 나오는 나무 냄새와 전문 조향사를 시켜 재현한 고대 콜로세움의 땀 냄새가 입장한 관객에게 마치 이것이 진짜인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체인이 달린 거대한 모닝스타를 들고 천천히 걸어오는 거구를 보며, 무대 중앙에 있는 소년이 흠칫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둘 다 행사를 위해 고용한 스텝임에도, 마치 정말로 겁먹어서 물러나는 듯한 실감나는 연기였다.
“그, 그에 맞서는 상대는! 세오빌 왕국이 자랑하는 전장의 장미! 시대가 인정하는 역사상 최강의 여기사! 신속의 검희(劍姬)! 플로라 마르티네즈으으!!!”
순간 엄청난 환호성이 관중석에서 터져 나왔다.
신속의 검희, 플로라 마르티네즈는 PTW의 첫 번째 상업 게임인 ‘마리의 눈물’에서 가장 강한 전투형 측근 캐릭터로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한번 영입하면 목이 칼이 들어와도 배신하지 않는 여기사로, 게임에서도 영입 1순위를 다투는 그녀의 등장이 팬들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달궈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우면서 멋진 갑옷 차림은, 굳이 마리의 눈물을 해보지 않은 유저들에게도 멋지게 보이기 충분했기에, 콜로세움은 어느새 잔뜩 흥분한 관객들의 함성으로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옆에서 딸이 귀를 막고 있는 것도 모른채 리차드를 잡고 흔들어대고 있는 허먼이었다.
“봐요! 내가 마리의 눈물 속편이라고 했죠?! 으하하하하!! 애니야! 나중에 아까 네가 갖고 싶다고 했던 공주 드레스를 사주마! 내기 우승 상금으로!”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 않을까요?”
“리차드 씨, 신속의 검희는 마리의 눈물의 간판 캐릭터라고요! 아까 묘하게 좌판 모양이 눈에 익다 했다니까? 이건 무조건 속편이라고요!”
잔뜩 흥분한 허먼의 말에도 불구하고 리차드는 침착하게 세트 곳곳의 사진을 찍었다.
‘다윗과 골리앗 같네.’
굳이 마리의 눈물을 해보지 않은 유저라도 바로 알 수 있도록, 간단한 비쥬얼 적 대비를 둠으로써, 상혁은 두 결투자 사이에 간단한 선악의 이미지를 잡을 수 있었다.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기사와, 우락부락한 전사의 싸움.
굳이 배경이나 이야기에 대해 몰라도,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전형적인 선악(善惡)의 이미지를 통해 관객이 응원할 대상과 비난할 대상을 나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혁의 의도대로, 두 사람이 펼치는 검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아슬아슬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앗!!!”
스치기만 해도 두개골이 부서질 것 같은 육중한 모닝스타가 금발 여기사의 머리 위를 스치자, 객석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무술 전문가이자 전문 스턴트 맨 출신인 플로라는 진짜로 절묘한 밸런스로 아슬아슬하게 남자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을 가했다.
짜고 치는 것을 알고 보아도 재미있는 프로레슬링처럼, 두 무술 전문가의 화려한 싸움은 관객의 시야를 사로잡고 있었고, 리차드는 그 모습을 보며 정신없이 카메라의 촬영 버튼을 눌렀다.
‘슬슬 아까 들렸던 비명소리의 정체가 나올 때가 됐는데···.’
이것이 짜여진 연기라면, 아마도 정해진 프로토콜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본 관객들의 비명이, 아까 밖에서 들었던 소음의 정체일 것이고.
그게 아니라 정말 사고에 의한 것이라면, 바로 관객을 입장시키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저 화려한 전투로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늘 이벤트를 위해서 거의 반년동안 합을 맞췄던 두 전문가의 싸움은, 이제 거의 하나의 ‘춤’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리차드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투기장 중앙의 싸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슬슬 때인가.’
모닝스타의 회전 방향을 반대로 바꾸며, 남자가 눈빛을 보내자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전장치가 있긴 했지만, 실수하면 부상을 감수해야할 수 있기 때문에.
일종의 트릭이지만, 남자가 휘두르는 모닝스타는 한쪽 면만이 금속으로, 나머지는 고무로 되어 있었다.
일부러 바닥을 내리 찍을 때는 금속인 부분이 밑으로 가게 해서 땅이 퍽퍽 파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상대에게 휘두를 때는 고무인 부분이 앞으로 가게 휘둘러 혹시 모를 부상의 위협을 막는다.
그리고 이 클라이막스 씬에서, 눈앞에 있는 아가씨는 모닝스타의 고무로 만든 부분을 맞고 멀리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실수로 방향이 반대가 되기라도 하면, 몸에 그대로 구멍이 날수도 있기에, 남자는 반년동안 해당 장비의 숙달을 위해 온몸을 바쳐 연습에 전념했다.
그리고 아까 전, 천명에 가까운 관객들을 상대로 한 시연에서, 두 사람의 합은 마침내 관객에게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보고 있던 관객들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리얼한 연기였기 때문에.
‘간다!’
일부러 모닝스타의 회전 반경을 크게 하여, 남자가 느릿하게 모닝스타를 돌리자 캐서린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몸에 고무가 닿는 순간에 맞춰, 팔에 낀 건틀렛에 장착된 버튼을 누르며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꺄아아아악!!!!”
마치 맞아서 날아간 것처럼, 바닥에서 몇 바퀴를 구르는 그녀의 옆구리에서 붉은색 액체가 피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 자리에서 경악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관객들을 보고는 슬쩍 미소 지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그녀의 웃음은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당연히 아픔은 없다.
자신과 충돌한 모닝스타는 겉이 고무지만 안은 스폰지로 되어있는데다, 바닥에 깔린 흙도 관객이 있는 입구만 모래로 되어있지 경기장에 깔려있는 건 부드러운 인조 모래였으니까.
‘푹신하네. 그리고 재밌어.’
미리 약속했던 대로, 마치 진짜 사고가 난 것처럼 모닝스타를 내팽개치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근육질 남성을 보며,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음번 시연 때도 관객이 낚이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