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몬스터의 절규
“좋아요. 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개발 1팀에서 개발 중인 [이세계 의사 시뮬레이터] 역시 MYOM에 밀리지 않는 재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군요?”
“난 그게 PTW의 똑똑한 점이라고 보는데, 지금 공개한 3개의 게임이 서로의 영역을 전혀 침범하지 않아. 각자 전혀 다른 재미를 추구하는 작품들이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렇게 하면 팀 내에서 노하우를 쌓기 어려울 텐데, 왜 그렇게 하는 걸까요?”
“자신감이겠지.”
토미가 PTW의 개발자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기존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만들더라도, 자신들이 그 끝을 유저에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게임 제작사는 개발을 하며 얻어낸 노하우로 후속작이나 같은 장르의 다른 게임을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
전작을 만들며 쌓은 경험이, 후속작을 만들때의 리스크를 줄여주니까.
그렇기에 게임을 잘 만든다고 소문난 대부분의 회사들은 특정 장르의 ‘명가’란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RPG의 명가’ 바○오 웨어처럼.
이전에 ‘전쟁 크래프트’ ‘우주 크래프트’를 만들던 시절의 눈보라사도 ‘RTS명가’ 소리를 듣곤 했었다.
정작 가장 큰 성공을 안겨준 것은 그 RTS의 IP를 기반으로 한 MMORPG였지만.
그러나 ‘월드 오브 전쟁크래프트’의 성공도, 1994년부터 시작된 ‘전쟁 크래프트’의 IP가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회사가 가진 IP는 일종의 자산으로 작용하게 된다.
회사는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최소한의 리스크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려 하고.
그러나 PTW는 ‘2를 모르는 회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대놓고 후속작 대신 계속 새로운 신작을 내놓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속편이 나오는 순간 게임을 구매할 수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토미는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후속작’을 만들지 않는 회사이기 때문에, 오히려 ‘전작’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
누구도 시도해 본적 없기에 오히려 과감한 판단과 도전이 가능한 분야에서, PTW의 개발력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통 일반적으로 게임 개발할 땐 경험에 의거한 판단을 하게 되니까, 그래서 경력자가 존중받는 거고. 근데 PTW처럼 말도 안 되는 게임을 만들고 있으면 사실 경력자도 판단 부분에서는 뭔가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 어렵지. 자기도 비슷한 사례를 알아야 이야기를 할 텐데, 그게 없으니까. 오히려 그래서 경험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아이디어를 아이디어로 바라볼 수 있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토미의 의견에 다른 직원이 손을 들며 물었다.
“해괴한 게임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수평적 구조 생성에 도움이 된다고 하시는 건가요?”
“원래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게 쉬운 건 아닌데, 용케 그렇게 굴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니, 그렇게 굴러가게 만든 느낌이 강하다고 봐야겠지. 아무래도 이 독특한 사내 분위기의 정체는, CCO 이상혁이 만든 것일 테니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니, 여기 마스터급 직원들이 다른 직원한테 말하는 스타일 말이야. 좀 뭔가 다 비슷한 느낌이라는 생각 안 해봤나?”
“어? 그러고 보니···.”
짐작 가는 데가 있다는 투로 말하는 직원을 보며, 토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사람은 ‘고민’으로 문제의 해결법을 찾으려 하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해결법을 적용한 후에, 그것을 경험으로 삼는 거야.”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문제는 경험이 쌓이면 사람이 생각을 안 하게 된다는 거지. 자, 예를 들어볼게.”
손뼉을 살짝 치며, 토미는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내가 시도했다 엄청나게 엿먹은 것과 동일한 문제를, 회사 신입이 나에게 가져와서 물었어. 이거 해도 되냐고. 그럼 뭐라고 하겠어?”
“안 된다고 하겠죠. 예전에 했다가 이런 문제가 발생했으니, 그 방식엔 문제가 있다고요.”
“그래, 그게 보통이지. 근데 PTW에서는, 거기서 두 스텝을 더 밟아. 나도 네가 생각한 것과 같은 이유로 그것을 시도했지만, 이러이러한 이유로 실패했다. 하지만 너라면 성공할지도 모르니까, 그 문제에 대한 해결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답을 가져와라.”
“아, 맞아요! 마스터급 직원들은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던데?”
“그거지. 예전에 그 문제가 있었을 때 나는 해결 못했다. 하지만 너는 고민해봐라. 답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그 질문을 끝없이 계속 던짐으로써 누군가 답을 찾게 만드는 거.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토미가 직원들을 바라보며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토미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자신이 질문을 던진 대상이 PTW직원들이라면, 마치 연못에 물고기 먹이를 던진 것처럼 미친 듯이 개개인의 의견이 쏟아져 나왔을 테니까.
1주간의 관찰을 통해 그가 본 PTW의 사내 문화 중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회사의 끝내주는 복지도, 연금 보장을 통해서 노후 걱정없이 개발에만 집중하는 개발자의 모습도 아니었다.
개발 중 발생하는 수많은 이슈에 대해, 신입부터 마스터까지 모든 개발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문화.
토미는 그것이 가장 부러웠다.
“지금 전 세계의 메이저 개발사 중에서, PTW가 ‘개발 집단’이라는 조직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기존 회사들이 숙련된 일부의 천재들의 비전을 구현하는 회사라면, PTW는 아예 괴물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괴물 뇌를 이룬 군체 회사라는 거지.”
그제야 나머지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미가 말한 그 ‘군체’라는 느낌은, 회사 안에서 작업하는 방식을 조금만 보아도 바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어느 직원도 자신의 일에 대해 남에게 도움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직원도 자신이 알고 있는 바보 같은 생각을 내뱉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를 보면서, 토미가 부러워 한 것은, 전 직원이 마치 하나의 뇌처럼 문제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PTW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집단 지성 문화’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뉴런과 시냅스로 이어진 뇌세포처럼, 중간 중간에 있는 마스터급 직원을 중심으로 전체 개발자들이 일사 분란하게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진짜로 잘 구성된 회사야. 질투심이 날 정도로. 솔직히 직원 중 일부는 눈보라 사로 빼가고 싶을 정도더라고.”
“아, 저도 사실 사석에서 넌지시 이야기 해봤는데 한명도 안 넘어오더군요.”
“그렇지. 안 그래도 즐겁게 개발하고 있는데 아무리 세계 최고의 개발사에서 부른다 하더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리스크를 감수하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예.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습니다.”
“뭐, 그렇게 되겠지.”
‘직원 한두 명이라도 끌어 올 수 있으면 앞으로 눈보라 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토미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가 한국에 와서 본 PTW의 직원들은 마스터부터 신입까지,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을 것 같은 단단한 개발력을 갖춘 직원들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애당초 그런 자신감이 없었으면 이번 교류 자체를 거부했을 테니까.”
토미는 서로의 회사에 핵심 개발 인력들을 교환하여 배울만한 부분을 배워보자는 제안을 받아들인 배경에, ‘자신의 직원들은 눈보라 사의 입사 제안정도에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CEO의 자신감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한 토미는 순간 등골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PTW의 직원을 탐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PTW의 직원들 역시 탐낼만한 직원들이 눈보라 사에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1주간 PTW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배운다는 각오로 이번 연수를 마무리 해 주세요.”
급하게 회의를 마친 토미는 휴대폰으로 마이클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자신이 아끼는 다른 직원들이, PTW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잘 관리해달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러나 토미의 그런 염려를 들은 마이클의 반응은, 걱정을 담아 지구 반대편에 급하게 국제 전화를 걸은 토미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회사를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겠지만, 여기 파견 온 PTW직원들은 전혀 그런 낌새도 풍기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게.
오히려 세계 최고의 MMORPG인 월드오브 전쟁크래프트의 개발에 조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엄청나게 열심히 업무에 참여 중이니까.-
“그래도 ‘그’ 이상혁이 순순히 받아들인 제휴입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게 틀림없으니 조심하는 게···.”
-사람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야. 토미. 그도 본질은 개발자니까. 아마 그가 고등학생 때 자신의 회사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게임회사에 입사하고 싶어 했다면 상혁은 우리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CEO인 마이클의 눈보라 사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났고, 눈보라라는 회사는 그런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한 회사였다.
그렇기에 마이클은 토미의 경고를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어찌됐건 이번 교류로 인해 파견된 PTW의 직원들은, 마치 기름에 빠진 불꽃처럼 회사 전체의 분위기를 활기차게 바꿔놓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그쪽 상황이 어떤지 이야기 좀 해주게. 난 그게 더 궁금한데. 떠도는 이야기대로 엄청난 회사던가? 자네가 볼 때 PTW는 어떤 느낌이었지?-
마이클의 질문에 토미는 자신이 보고 겪은 것에 대해 가감 없이 전달했다.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와, 어쩌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이벤트가 될지도 모르는 MYOM의 월드 이벤트에 대해서.
그리고 수화기를 통해 토미의 이야기를 듣던 마이클은, 토미가 하는 설명이 개발자로서의 분석이 아닌, 게이머로서의 흥분이 가득 담긴 이야기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PTW의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토미의 목소리에는, 마치 인생 게임을 발견한 게이머의 목소리처럼 흥분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좋아. 여기 파견 온 직원들도 범상치는 않던데, 그 회사는 전 직원이 그런 분위기인가보군. 그런데 토미. 하나만 더 묻겠네.-
“여러 개 물으셔도 됩니다.”
-그건 돌아와서 하면 되는 거고. 여긴 지금 새벽이라고. 난 자다 깨서 전화를 받는 중이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시차를 생각 못했네요.”
-회사가 걱정되어 그렇게 한 거니 그건 신경 쓰지 않아. 그것보다 내 질문에 답해 줬으면 하는데.-
“예. 말씀하시죠.”
-만약 자네가 CEO고, 수십 수백억을 투자해서라도 PTW의 직원 중에 한명을 반드시 데려오겠다고 생각한다면, 누굴 데려올 것 같나?-
마이클의 질문은 토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설마 자신을 포함한 20명의 직원들을 PTW에 파견한 이유가, 가장 핵심이 되는 직원을 빼돌리기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수십억을 줘도 불가능···.”
-그건 내가 판단하는 거고, 자네는 질문에 답하면 돼. 어떤 조건을 걸어서라도 한명을 데려온다면, 누굴 데려오겠나?-
토미는 고민했다.
최근 어린 천재 기획자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서지수?
아니면 역시 PTW의 핵심이자 ‘게이머를 위해 하늘이 내려준 보물’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CCO 이상혁?
그 천재 집단을 고등학생 때부터 발굴하여 현재의 PTW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준 진정한 뒷배로 평가받고 있는 CEO 김현주?
그 외에도 인물은 많았다.
최소한 PTW에서 ‘마스터 급’으로 평가받는 직원들은, 어느 한명 다른 회사에 가더라도 중역 이상을 차지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정말로.
단 한명을 데려올 수 있다고 한다면, 토미는 회사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영입하고 싶은 단 한명의 이름을 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의외로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크게 회자되지 않는 이름이었다.
-김민준. 저라면 CTO 김민준을 뽑겠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그대로 표현한 듯한 PTW의 게임들. 그 뒤에는 이상혁이라는 빛 뒤에 숨어있는 또 한명의 핵심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토미는 잘 알고 있었다.
-의외의 이름이네. PTW의 CTO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이미 고등학생 시절에 MS에서 온라인 시스템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이름값에 비해서, 사실 그가 없으면 PTW라는 회사의 존재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기술자 타입이라 그런지 앞에 나서지 않아서 잘 모를 뿐이죠. PTW가 게이머의 욕망을 현실로 구현해주는 괴물이라면, 김민준이란 프로그래머는 그 괴물이 현실에서 걸어 다닐 수 있게 하는 심장입니다. 아마 그가 없으면, PTW는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의 50%도 구현하지 못하겠죠.”
현재 게임업계에서 유명한 PTW의 직원들을 꼽자면, 크게 3명을 꼽을 수 있었다.
창립 맴버들의 고등학생 선생으로 존재 자체도 알려져 있지 않다가 얼마 전 CEO자리를 꿰차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김현주.
그리고 MYOM의 리드 기획자로 어린 나이에 엄청난 게임을 완성해낸 귀여운 천재, 서지수.
그리고 고등학생 때부터 열혈 팬층을 형성할 정도로 기발한 게임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현재의 PTW를 만들었다고 알려진 CCO, 이상혁.
보통의 일반 게이머들에게 PTW의 얼굴이 누군지 묻는다면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저 3사람 중 1명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토미가 보기에 PTW에서 가장 괴물인 개발자는, 외부 노출을 꺼리면서 온갖 기술적 난관을 모조리 해결하고 있는 천재 프로그래머, 김민준이었다.
그리고 그런 토미의 말을 들은 마이클은, 진지한 목소리로 토미에게 답했다.
-알았네. 자네 의견은 잘 알았으니 난 이만 쉬러가지.-
“새벽에 죄송합니다. 좋은 밤 되십쇼.”
-그러긴 글렀어. 라이벌이라 부를 수 있는 회사에 괴물이 하나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커피한잔 먹고 대응책을 고민해봐야지.-
그렇게 말한 마이클이 전화를 끊자, 토미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마이클이 눈보라 사에 김민준을 데려올 수 있다면···.”
기획자를 가장 괴롭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기술적 한계였다.
그리고 그가 본 김민준은, 거의 오파츠 수준의 코드를 짜면서 그 기술적 한계를 부수는 해머였고.
그리고 그 시각.
토미가 해머라 평가한 민준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사무실 바닥에 굴러다니면서 절규하고 있었다.
“되는데 이유를 모르겠어어어어!!!!”
라는, 토미가 들으면 경악할 만한 절규를 지르면서.
그렇게 민준이 굴러다니고 있는 책상 위의 모니터에는, 자신이 구축한 MYOM의 코드가 띄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