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217화 (218/485)

217. 무대 뒷편의 사람들

“쇼 케이스?”

2차 NE컨벤션이 열리기 3달 전.

상혁이 자신을 찾아온 지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쇼 케이스요. 이번에도 진행하실 거죠? 직원들 전부 기대 중인데···.”

“흠···. 그래?”

“그렇죠. PTW의 게임 공개하면 쇼 케이스. 쇼 케이스 하면 PTW아니겠어요? 오빠 별명이 게임 업계의 스티븐 짭스란 소리도 못 들어보셨나요?”

“딱히 지금까지 그런 의도로 쇼 케이스를 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상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힘겹게 만든 게임을 공개하기에 최적화된 방법으로 공개방식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공개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그런 선택을 한 것뿐이었고.

그런 상혁의 대답에 지수는 놀란표정을 지으며 상혁에게 물었다.

“그래요? 전 오빠가 심하게 스타병이라도 걸려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 이쉑. 말을 해도 스타병이 뭐냐 스타병이. 무대체질 같은 표현도 있는데.”

상혁이 투덜대자 지수가 귀여운 표정으로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상혁은 한숨을 쉬며 지수에게 이번 행사에서 쇼 케이스를 진행하려 하지 않는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지수야. 이번에 공개되는 게임들은 대부분 디테일이 강조된 게임들이지? EOD같은 경우는 NPC가 보여주는 다양한 반응의 바리에이션이라던가, 실제로 폭탄을 해체할 때의 긴장감이라던가, 눈앞에 있는 시민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그냥 여기가 위험하니 근처에 오지 말라고 가족에게 연락하려는 건지, 아니면 아군이 해체하고 있는 폭탄을 기폭 하려고 하는 건지 판단하는 그런 디테일이 중요한 게임이잖아? 그리고 나머지 두 작품의 핵심 기능인 커뮤니케이션 엔진은, 실제로 만져보고 대화하면서 감탄사가 나오는 시스템이고.”

“그렇죠.”

“그럼 체험만 가지고 더 압도적인 재미와 놀라움을 전달할 수 있는데 굳이 쇼 케이스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 시간에 좀 더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흠···. 하지만 매번 ‘우와아앗!’ 하게 만드는 공개 시연이 있었으니까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것 같아요.”

지수가 양손을 들며 ‘우와아앗’이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상혁은 그 동작을 따라 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애당초 게임 플레이를 하는 시점에서 ‘우와아앗!’이 20번은 나올만한 게임들인데 굳이 쇼 케이스를 진행할 필요는 없지.”

“흠···. 그치만···.”

자신의 설득에도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 지수를 보면서, 상혁은 진심으로 지수가 쇼 케이스의 부재를 아쉬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쇼 케이스, 했으면 좋겠어?”

“네.”

“딱히 필요가 없어도?”

“하지만 관객들이 발표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개발한 것을 보면서 저렇게 기뻐해 주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때가 제일 뿌듯해요. 그리고 아마 개발팀의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요.”

“하지만 쇼 케이스로 주목받는 건 개발자들이 아니라 진행자잖아. 보통은 내가 될 거고.”

“흠. 수백 명의 개발자가 동시에 쇼 케이스에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죠. 대리만족이라도 하는 수밖에.”

“흠···.”

지수의 말에 상혁은 턱에 손가락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개발자라···.’

상혁은, 일단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쇼 케이스를 진행하려면 이미 체험을 중심으로 설계한 이벤트를 재구성해야 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공개하려 하는 게임들이, 특정 정보에 감탄하는 것 보다는 게임을 하면서 자연스레 게임의 ‘디테일’에 감탄하는 게임들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일단 생각해 볼게.”

그렇게 대화를 마친 상혁은 어느새 시간이 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시계를 보아서가 아니라, 최근 개발과 이벤트 준비를 병행하면서 오는 피로 때문에, 대충 마지막으로 잠을 잔 지 꽤 오래되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 것이었다.

‘오늘은 들어가서 자야겠다.’

집에 가기 위해 지갑을 챙기면서, 상혁은 조용히 부실을 나섰다.

그리고 사방에 불이 들어와 있는 PTW건물의 복도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어때요?!”

“오, 끝내줘! 와, 더 넣을 대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시츄에이션도 나올 수 있구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현재 가장 오래도록 철야 릴레이를 하고 있는 스크립트 팀이 있는 곳이었다.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스크립트 팀이 있는 작업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 명도 퇴근 안 했네.’

이미 시간은 날을 넘긴 지 오래였지만, 다들 눈에 눈그늘을 가득 띄운 상태로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퀭한 얼굴과 부스스한 머리를 한, 전형적인 크런치 모드(발매를 위해 개발 일정을 하드하게 밀어붙이는 상태)의 개발자의 모습이었지만, 그런 그들의 눈빛은 어느 한 명 빠짐없이 열정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 상혁 씨 오셨어요?”

“예. 늦었는데 다들 퇴근 안 하세요?”

“작업이 많아서요. 누구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작업자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농담입니다. 다들 즐겁게 일하고 있으니까요.”

“힘들지 않으세요?”

“저희가 대사 하나하나 넣을수록 AI가 사람에 가까워지는 거잖아요. 그리고 저희 작업이 부족하면, 유저가 게임을 하면서 어느 순간 환상이 깨지는 거고요. 적어도 PTW의 개발자라면, 누구든 유저의 꿈을 깨는 그런 멋없는 짓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 물론 저희 야근 수당이 센 것도 있지만.”

“하지만 표정은 야근 수당 안 드려도 죽어라 하실 것 같은 표정인데요?”

“그야 그러면 회사에 섭섭하긴 하겠지만 그거랑 별개로 다들 게임이 좋아서 업계에 들어온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 PTW는, 적어도 개발자들이 들인 노력을 절대 외면하는 회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칭찬 감사합니다.”

미소를 지으며, 상혁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게임을 사랑하는 유저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그 누구보다 게임을 사랑하는 상혁의 눈에 한없이 뭉클해지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게임이 좋다.

게임 개발이 좋다.

우리가 만든 게임이 좋다.

그리고 그 게임을 사랑해주는 유저들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게임이나 영화 같은 서브컬쳐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박봉이나 혹사에도 불구하고 업계에 악착같이 붙어있으려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냥 그게 좋으니까.

사람들이 좋아 해주는 결과물 일부나마, 자신이 한 몫을 더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한없는 기쁨을 주는 것이리라.

그런 마음이 영화판이 소품 담당에게 무거운 소품 가방을 들고 현장을 뛰어다닐 힘을 주고, 음향 담당이 팔이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무거운 마이크가 달린 장대를 들고 있게 만드는 힘을 주는 것이다.

마치 빛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그 앞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는 주연 배우들이 다 받아가겠지.’

순간, 상혁의 머릿속에 다음 행사의 쇼케이스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게임회사도 시도 하지 않았던, 독특한 쇼 케이스에 대한 아이디어가.

그리고 바로 다음 날부터, 상혁은 어디선가 구해온 가정용 캠코더를 들고 사무실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

“이건···.”

“뭐죠? 뭘 소개하는 걸까요?”

“확실한 건 4번째 게임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거네요.”

안내 방송을 듣고 방문한 4번째 에리어는, 찾아온 이들을 당황하게 하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마치 벽지처럼 수많은 텍스트가 가득 적혀 있는 벽을 배경으로, 대형 TV화면들이 마치 액자처럼 죽 늘어선 모습은, 게임쇼의 이벤트 존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미술관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나눠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의 구조물들.

그곳에 다가간 리차드와 허먼은, PTW가 4번째 존의 ‘쇼 케이스’대신 배치한 것이 무엇인지를, 마침내 알아볼 수 있었다.

“개발 비하인드?”

한눈에 보기에도 피곤해 보이는 개발자들.

그리고 그들이 작업하는 모습들이 마치 홈 비디오를 연상하게 하는 영상으로 벽에 걸린 TV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수만 개의 스크립트 라인을 연속으로 작업하고 피곤해서 책상에서 잠든 모습.

열정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며 회의하는 모습.

캐릭터의 머리 위에 달린 액세서리의 색상과 디자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

한 프로그래머가 ‘이런 버그는 1분 만에 수정할 수 있다.’라고 말해서 개발팀이 그를 둘러싼 채 타임어택을 하는 모습.

애당초 목적을 말하고 촬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업자 대부분은 상혁이 촬영을 하고 있어도 딱히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다.

원래 자신들의 CCO가 특이한 짓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뭔가 있겠거니 하고 넘어갔지만 설마 상혁이 개발과정을 촬영한 영상을 이런 식으로 전시할 줄은 몰랐던 개발자들은, 영상 안에서 평소의 자신들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면 속의 개발자들은, 딱히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말버릇 같은 느낌으로 하나의 문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걸 유저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유저들이 더 좋아하겠죠?”

“그건 진짜로 유저들을 미치게 할 것 같은데요?”

방송을 듣고 4번째 세션에 입장한 2만명의 관객들은, 그렇게 벽을 따라 이동하면서 자신들이 방금 체험했던 그 멋진 게임들을, 어떤 개발자들이 무슨 마음으로 만든 것인지를 홀린 것 같은 발걸음으로 지켜보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향한 그 방향엔, PTW의 개발자들이 미소를 지으며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상황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준이 옆에 있는 상혁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4번째 에리어는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굳이 ‘우리가 이렇게 만드는데 고생했다’라고 어필할 필요는 없지 않아?”

그러자 상혁은, 고개를 저으며 민준에게 답했다.

“의미가 좀 다르지. 이 세션은 우리가 이렇게 고생했다를 어필하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니야. ‘당신들이 한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 이런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같은 거 아니야? 메이킹 필름 같은 거잖아.”

“완전히 다르지. 공개하는 타이밍이 다르잖아.”

상혁이 말했다.

“예를 들어 어떤 영화가 나왔을 때 메이킹 필름은 그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들이 좀 더 그 영화에 빠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잖아. 아, 내가 봤던 그 장면이 저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거구나. 아, 저 장면이 CG가 아니었구나! 그런 느낌으로 보는 거고.”

“발매 전에 공개하는 건?”

“기대감을 부추기지. 영상이든 쇼케이스든 게임회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정보는 굉장히 제한적인 법이니까. 짧은 테스트 시간으로는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게임들이 어떤 포텐셜을 품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어려울 거고. 하지만 저렇게 개발과정을 전부 까버리면 보는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거야. 어? 뭐야. 이런 것도 만들고 있네? 내가 본 부분은 진짜로 일부분이구나! 와! 이 개발자들이 정말로 목숨 걸고 만들고 있구나! 이 게임은 진짜로 대단하게 나올 것 같은걸?”

상혁의 어색한 연기를 들으며, 민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상혁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실 그게 목적 전부는 아니잖아? 기대감은 다른 방식으로 조성해도 되는 거고.”

“그렇지. 사실, 말하고 싶었어.”

“뭘?”

“당신들이 만들고 있는 게임 뒤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상혁은 생각했다.

어째서 세상에 이름난 유명한 디렉터가, 회사를 나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게임이, 형편없는 ‘똥겜’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인지.

그것은 아마도, 게임이란 물건 자체가 한두 사람의 손만으로는 만들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획-그래픽-프로그래밍-사운드···.

게임은 온갖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능력과 애정을 부어 만든 결과물의 합이다.

그런데도 개발자 대부분은 스텝 롤에 이름 한 줄만을 남긴 채 묵묵히 자신이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

스포트라이트는 남의 몫이고.

만약 당신이 개발과정에서 아무리 값진 아이디어를 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아이디어가 그 게임을 하는 게이머 모두를 감동하게 하는 아이디어였다 하더라도, 게이머는 항상 쇼 케이스에 등장한 개발자만을 기억한다.

상혁은 그런 업계의 트랜드를 깨고 싶었다.

순서의 반전.

개발과정을 발매 전에 공개하는, 잘못하면 유저들에게 ‘생색을 내려 한다’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심어줄 수도 있을 과감한 결정을 통해서.

그리고 그런 상혁의 결정을 뒷받침하는 것은, 오직 게임 하나만을 위하여 영혼을 불사르며 노력해온 직원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적어도 여기 있는 직원 어느 한 명도, 게이머 앞에서 부끄러운 결과물을 만든 직원은 없으니까.’

핵심부터 말단 직원까지, 기획에서 QA에 걸쳐 개발에 참여한 직원 중 자원하는 모든 이가 이번 쇼케이스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 직원들은, 지금 자신이 노력한 과정이 담겨있는 영상의 옆에 서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게임을 관람객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었다.

“저희 게임 멋지죠?”

“다들 똑같이 말씀하시네요. 엄청나게 즐거운 표정으로.  그래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진짜로 대단한 게임을 만드셨으니까.”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로. 가능하다면 오늘 돌아가는 길에 손에 쥐여 드리고 싶을 정도로 멋진 게임이니까요.”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혹시 체험판 디스크라도 한 장 얻을 수 없을까요?”

허먼의 너스레에 서 있던 직원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안 되는 건 아시죠?”

“그냥 한번 찔러 봤습니다. 그래도 질문은 마음껏 해도 되는 거죠?”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4번 에리어에 한해서, 이상혁 CCO님이 자신이 담당한 게임에 대한 모든 정보를 마음껏 공개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으니까, 원하시는 질문이 있으면 마음껏 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된다고 합니까?!”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지시였기에 허먼의 옆에 서 있던 리차드가 되묻자, 직원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부심을 느껴도 좋은 결과물을 만들었으니, 마음껏 자랑하라고 하던데요?”

리차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개발사에서 유저와 소통을 시도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수백 명의 개발자 전체가 유저와 개별적으로 만나는 이벤트는 전례가 없었기에.

그의 시선에 보이는 관객들은 당황하면서도 즐거운 기분으로 개발자들과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개발자들은 그들보다 더 환한 미소로 유저들을 맞이하며 진심으로 기쁜 모습으로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PTW의 쇼 케이스가 보여주었던 화려함도, 임펙트도 없는 모습이었지만, 거기엔 대신 ‘감동’이 있었다.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회사에 대해 궁금한 점이라던가, 개발 도중의 에피소드라던가, 뒤쪽에 비치는 영상 속의 상황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유저들이 있었다.

일부 개발자가 즉석에서 수첩을 꺼내 개선 사항에 대한 아이디어를 받아 적게 만들 정도로 기발한 제안을 던지는 유저도 있었다.

관객 중 한명이 던진 ‘혹시 이런 것도 가능하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 자리에서 수첩을 꺼내 적으며 현재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좋은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만들어 적용할 수 있도록 애써보겠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보던 나머지 관객들은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미친 듯이 손을 들며 자신이 게임에 원하는 것들에 대해 마구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관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주고 있는 개발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 관객들의 모습을 옆에서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리차드는 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혁이 관객들이 느끼길 원했던 바로 그 생각을.

‘아, 우리가 사랑하는 게임을 이 사람들이 만든 거구나.’

이렇게 게임을 사랑하고, 이렇게 유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게임이, 재미가 없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 모인 개발자들은 정말로 실력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여기 모인 2만 명의 관객들도, 개발자와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리차드와 같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게 되었다.

대화하면 할수록, 질문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오늘 체험했던 게임에 대한 기대감이 풍선 부풀 듯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진짜로, 이런 형태는 상상도 못 했는데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허먼이 묻자 리차드가 답했다.

“그러게요. 쇼 케이스와는 다르지만, 이건 이거대로 좋은 기사가 되겠네요.”

“정말이지.”

관객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허먼은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유저들에게 자신들을 사랑해 달라고 칼 들고 협박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리차드는 대답 대신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허먼에게 물었다.

“그런데, 벽에 있는 텍스트는 뭘까요?”

“장식 아닙니까? 벽지같은.”

“PTW에서요?”

“어?”

세트하나, 조명하나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것이 PTW의 ‘섬세함’이었기에, 단순히 의미 없는 장식을 위해 텍스트로 가득 찬 벽지를 사용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리차드의 뇌리를 스쳤다.

그래서 리차드는, 허먼을 두고 조용히 사람들을 피해 벽으로 다가가 거기 새겨진 텍스트를 읽었다.

그리고 경악에 찬 목소리로 허먼에게 외쳤다.

“허먼 씨!”

“예?”

“이거! 이거!?”

헐레벌떡 다가온 허먼은 리차드와 마찬가지로 벽에 새겨진 텍스트를 읽었고, 그와 똑같은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린 채 벽을 바라보았다.

“이거···..”

“게임에 들어간 텍스트 맞겠죠? 내용 자체가 게임 플레이하면서 대화하는 내용 같은데?”

“에이, 설마 이 넓은 이벤트 장소 전체의 벽지가 전부 그 내용이겠어요?”

“······.”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PTW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아는 PTW라는 회사는, 그 정도로 미친 회사였으니까.

결국, 두 사람은 그 이후로 남은 시간 내내 4번 에리어를 쏘다니며 사방에 있는 텍스트를 확인하고 다녔다.

그리고 격하게 숨을 고르며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자신들이 확인한 정보를 서로 교환했다.

“적어도 제가 본 것 중에는 중복된 대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도요. 그리고 다른 게임의 대사도 없었어요.”

“미친 거 아닙니까? 이벤트 전시장 넓이를 고려하면 이 벽을 전부 텍스트로 채우려면 대사가 수천만 개는 필요할 겁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허먼 씨. 저희가 플레이했던 수준의 AI를 구현하려면 필요한 대사 숫자도 그 정도 아닐까요?”

다행히도, 지금은 간단히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오늘 이 시간에 한해서, 게임에 관한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대답해주는 ‘개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으니까.

허먼과 리차드는 일제히 오늘 만났던 개발자 중 스크립터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던 개발자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직원에게 자신들이 보았던 게 사실인지를 물었다.

“저 벽에 있는 텍스트, 그게 전부 오늘 3번 에리어에서 공개된 게임에 들어가는 AI의 대사 스크립트가 맞습니까?”

그러자 개발자가 환한 미소로 그들의 질문에 답했다.

“오, 드디어 그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시는군요?!”

이어지는 그의 답변은, 리차드와 허먼의 심장을 미친 듯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맞습니다. 지금 이벤트 존 벽에 있는 텍스트는 전부 저희가 작업하여 3번째 공개 게임의 AI에 집어넣은 텍스트 스크립트를 적어놓은 것입니다.”

“저, 저게 전부?! 총 몇 개정도 되는 겁니까?”

“현재 버전에서 1452만 4233개.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완성 버전은 2천만 개가 넘겠죠.”

“대, 대사만···. 2천만?”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관객들도 경악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스크립트팀 소속 개발자가 씨익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미치도록 재미있겠죠?”

관객들은 격하게 머리를 흔들며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행사 종료 시간이 되어 퇴장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허먼과 리차드는 그래도 뭔가의 쇼 케이스가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행사에서 상혁은 자신을 비롯한 지수, 서연, 민준 같은 게임 업계에서 이미 유명한 개발자들의 존재는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자신들이 등장한 순간, 행사의 이목이 전부 자신들에게 쏠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상혁에게 이번 행사는 철저하게 개발자와 유저들의 축제여야 했다.

고생한 개발자들이 유저들의 감사와 축복을 받으며 기쁨을 느끼고, 유저들은 개발자들의 노력을 보면서 자신들이 할 게임에 대해 기대감을 부풀리는 행사.

그것이 상혁이 생각하는 이번 2차 NE컨벤션의 테마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나쁘지 않았다.

“즐거움으로 꽉찬 행사였네요.”

“3차도 기대된다. 진짜로. 다음에 표를 못 구하면 울어버릴지도?”

“좋은 게임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엄청 기대됩니다! 끝까지 잘 만들어주세요!”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며 회장 밖을 향하는 관객들의 마음속은, 알 수 없는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행사장에 입장하고 나서부터 행사가 종료되는 시간까지, 어느 것 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없었기에.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들에게 NE컨벤션은 디즈니랜드보다 즐거운 기분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하아, 역시 최고였어.”

호텔 방으로 돌아온 리차드는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노트북으로 옮겼다.

지금도 자신의 기사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유저들에게, 오늘 겪은 행사의 모든 것을 적은 기사를 쓰기 위해서.

하지만 지금은 잠시 행사의 여운을 느끼고 싶은 기분이었기에, 리차드는 행사에서 찍은 사진을 열어 조금 전까지 자신이 겪었던 꿈같은 추억을 회상했다.

즐거움에 미칠 것 같은 관객들의 표정, 사진으로 봐도 디테일이 느껴지는 세트들의 모습.

기사를 쓰기 위해 감정을 되살린 리차드는 기사 작성 프로그램을 열어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역시 제목은 이거지.”

[PTW. 화려함을 버리고 꿈을 선사하다.]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 꿈의 내용을 일기장에 적는 소년의 기분으로, 리차드는 즐겁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자신의 기사를 기다리고 있을, 오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게이머들’을 위하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