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플랫폼의 본분
“솔직히 말해서, 섭섭합니다.”
보고를 받자마자 바로 현주에게 연락하고 한국으로 날아온 크리스는, PTW 임원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상혁은 그가 어째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MS 입장에서는, PTW와 SANY의 합작 소식이 너무나도 뜬금없는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었기에.
거기에 양사 간에 지금까지 별다른 트러블이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이 크리스의 억울한 심경을 더하고 있었다.
“SANY와의 협력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같은 조건에 더 좋은 보상을 저희 MS에서 제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듣자 하니 대부분의 개발은 PTW에서 진행하고, 광학 장비 부분에 대한 기술지원을 SANY α카메라 개발팀에서 지원했다고 들었는데, 문제가 안 된다면 해당 정보의 진위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크리스의 질문에 상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입니다. 원래 개발하던 버전은 장시간 이용 시 시신경 손상 문제가 있어 그 부분에 대한 개선을 SANY의 협력으로 해결했습니다.”
“물론 현재 MS에는 광학 장비 전문 팀이 없지만, 만약 말씀만 하셨더라면 인수전을 해서라도 지원했을 겁니다.
그게 닉콘이든, 올렘푸스든, 캐넌이든 라잉카든, 필요한 기술은 저희가 전부 사 와서 지원했을 거란 말입니다.
적어도 협력사 관계라면 저희한테 먼저 언질이라도 해서 기회를 주시는 게 순리 아닐까요?”
그런 크리스의 비난에도, 상혁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에게 답했다.
“크리스 씨.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오해요?”
“우선, MS가 저희의 협력사인 것은 맞습니다.”
“그렇죠. 만일 SANY와 협업을 진행하기 전에 코넥트 발매를 위해 MS에서 희생한 것을 고려해주셨으면 이토록 서운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SANY도 저희의 협력사입니다.
크리스 씨. 저희는 ‘게임’회사에요. 게임 주변기기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요.
그리고 저희는 게임을 양대 플랫폼 모두에 출시하고 있죠.”
“그야 그게 본질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뭐라 더 말을 하려던 크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콘솔 게임회사에서 어느 콘솔 플랫폼 업체와 손을 잡을지는, 전적으로 게임회사의 선택에 달린 것이었기 때문에.
물론 그런 관계 속에서 플랫폼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콘솔 제조사에서는 퍼스트 파티부터 서드파티까지 다양한 레벨로 개발사를 구분하여 지원 수위를 결정하고, 그 지원을 받기 위해 제작사들이 자신들의 콘솔에 스스로를 묶게 만든다.
그러나 PTW는, 이 특이한 회사만큼은 지금까지 어느 콘솔에도 종속되지 않으려는 특이한 행보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원을 받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수조 원을 넘는 지원이 자신들에게 쏟아질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PTW는, 단 한 번도 비즈니스 관계에서 상대에게 일방적인 손해 관계를 강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계약 시점에서는 MS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되었던 ‘코넥트’마저도.
“저희는 X-BOX에 심지어 코넥트 독점 게임을 발매할 때도 딱히 특별한 대우 없이 다른 게임사와 같은 라이선스비를 MS에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넥트에 들어간 개발비도 받지 않았죠.
물론 초기에야 단가를 낮추느라 MS에서 손해를 많이 보긴 했지만, 그것도 산업용 코넥트를 비싼 값에 팔아서 진즉에 보충하지 않았나요?
지금 팔리는 게임용 코넥트도 부품 가격이 싸지면서 흑자로 돌아선 지 오래고요.
크리스 씨. 제가 묻겠습니다. 지금 빚을 받아야 하는 쪽은 MS입니까? 아니면 PTW입니까?”
상혁의 날카로운 질문에 크리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포기하듯 털어놓았다.
“PTW입니다.”
“그럼 일방적으로 베푸는 쪽에서 그 호의의 방향을 돌렸다고 베풂을 받는 쪽에서 섭섭하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요?”
“···안 됩니다.”
“그런 거죠.”
“하지만 저희가 무조건 저희와 독점 계약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먼저 이야기해주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는 아니지 않습니까?
코넥트의 양산과 보급에 있어서 MS는 정말로 손해를 감수하면서 충실하게···.”
크리스의 말을 상혁이 끊었다.
“충실하게라···.”
그리고는 크리스를 보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상혁의 눈빛을 보며, 크리스는 깨달았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사이, 코넥트 양산과 보급을 담당하는 MS내부의 판매 부서에서, 코넥트 판매에 무언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크리스는 모르고 있던 사실이지만, 사실 상혁은 지금까지 코넥트의 산업용 제품 판매 비율과 개인용 제품 판매 비율을 매년 체크하고 있었다.
그 덕에 MS가 더 높은 이윤을 얻어내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고.
상혁이 지적하는 부분은, 바로 그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7세대 콘솔 때 발매된 코넥트는 지금쯤 8세대 콘솔 유저들에게 충분한 양이 보급되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저희는 딱히 8세대 콘솔이 보급될 때 신형 코넥트를 발표하지 않았죠.
애당초 코넥트 자체가 8세대 콘솔까지 커버할 수 있는 포텐셜을 지닐 수 있도록 설계된 물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유저들은 코넥트를 구하기 위해서 되팔이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유저들은 5배나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산업용 코넥트를 구매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게 정말로 저희가 원하는 그림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일부러 개인용 코넥트의 보급량을 조절해서, 비싼 산업용 코넥트를 구매하게 만드는 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확신은 할 수 없죠. 하지만 MS에서 산업용 코넥트의 양산에 비중을 두어서 생산했다는 증거는 판매 통계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저희는 그러라고 MS에 기술이전을 해드린 게 아니고요. 이번에 새로 만든 VR기기는 내부에 전용 OS가 들어가죠.
그건 최적화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애당초 게임용 기기를 산업용으로 돌려서 쓰지 못하게 하려는 용도도 있습니다. 양쪽 OS를 다르게 만들어서 개인용 코넥트로는 산업용 어플리케이션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려는 거죠.
저희가 이런 판단을 내리게 만들기 전에, MS에서 알아서 개인용 코넥트의 보급에 힘써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저희 쪽의 보급 정책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있다면 우선 저에게 연락을 주셨다면 제가 해결을 위해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 이렇게 방심하고 있다 두들겨 맞는 게 아니라요.”
“딱히 PTW VR을 SANY에서 생산한다고 해서 MS에서 코넥트 판매가 중단되는 건 아닙니다. 두 장비 모두 장단점이 있는 기기고요.”
“하지만 코넥트가 폭탄이라면 신형 VR기기는 핵폭탄이지 않습니까? 신형기기가 발매되는 순간, 사람들은 미친 듯이 PS진영으로 옮겨 갈 겁니다.”
“그러라고 하는 겁니다.”
“예?”
“그게 저희의 의도라고요. 크리스 씨.”
상혁이 말했다.
“저희가 SANY에 제안을 넣었을 때, 저희는 MS에서 코넥트를 공급하면서 얻은 이윤과 마음에 들지 않는 점에 대해서 어필했습니다.
그리고 SANY에서는, 이번 PTW VR의 생산에 있어서 저희에게 확실하게 그 부분을 못 박아주었죠.
산업용이 이윤이 되는 건 맞지만, 그래도 개인용 VR기기의 생산을 최우선순위로 놓고 양산을 하겠다고요.”
“저희도 같은 조건으로 양산할 수 있었을 겁니다.”
“경쟁사인 SANY의 존재가 없었어도 그런 조건을 저희가 받을 수 있었을까요?”
또다시, 상혁의 말을 들은 크리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경쟁사의 존재.
그것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코넥트란 기기의 발매조차도 MS에서 손해를 감수하며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이었기에.
상혁은 그런 크리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애당초 저희가 바라는 것은 MS와 손잡고 SANY를 침몰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코넥트도 SANY에서 거부하지 않았다면 양쪽에 동시 발매시킬 생각이었고요.
하지만 PS2가 괴물 같은 흥행을 끌어낸 기계였기에, 저희가 MS에 힘을 실어주는 선택을 했던 거죠. 그러나 8세대까지 이어지면서 현재는 MS가 괴물이 되어버렸네요.
저희가 PTW VR을 SANY의 PS4전용으로 발매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중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요? 현재도 수많은 유저들이 양사의 독점 타이틀 때문에 게임기를 고를 때마다 고민하고 있는데요?
넌텐도는 차지하더라도, 차라리 SANY와 MS중에 한 기업만 남아서 그런 고민거리를 없애줄 수 있다면, 그게 더 게이머에게 이득이지 않을까요?”
“크리스 씨. 그러다 아타리(ATARI)꼴 나요.”
어느 한 업체가 시장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 업체가 고객을 위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이유를 없애버리는 원인이 된다고, 상혁은 생각하고 있었다.
“PTW VR이 SANY 플랫폼으로 발매된다고 해도, 양산부터 보급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SANY가 미친 듯이 생산 라인을 확장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MS에는 아직 여유가 있죠. 그동안 열심히 독점 타이틀을 확보하고, 좀 더 나은 서비스를 개발하고, 개발사들을 더 열심히 지원하세요.
언젠가 PTW VR이 시장에 공개되었을 때도, 자신 있게 ‘그래도 X-BOX가 더 매력적이다!’라고 외칠 수 있도록. 콘솔 개발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거 아니겠어요?”
결국 상혁의 말은 ‘PTW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라’라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크리스는, 그런 상혁의 설명을 들으며 그나마 어느 정도는, 이번 사건의 경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PTW가 어째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인지, 어째서 이전의 파트너인 MS에게 등을 돌리고 SANY와 손을 잡은 것인지.
결국 상혁이 원하는 그림은, PTW가 양대 콘솔 개발사의 사이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낼 수 있는 형세를 유지하는 게 목적이라는 것도.
그리고 크리스는 그런 상혁을 비난할 수 없었다.
만약 SANY가 코넥트를 가지고 있고 MS가 죽어가는 반대의 경우였다면, 상혁이 주저 없이 MS의 손을 들어주었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상혁 나름의 ‘공정함’이었고 납득 가능한 행동 원칙이었다.
적어도 그 안에 일관성은 있었으니까.
결국 크리스는 아쉬움을 안고 체념하는 목소리로 상혁에게 물었다.
“그 말씀은 결국 X-BOX 용 VR기기는 절대 출시 안 하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알겠습니다. 윌 게이트 씨도 오늘 미팅의 결과를 궁금해하시니, 그렇게 보고드리도록 하죠.
하지만 상혁 씨.”
“예?”
“제가 아는 게이트 씨라면, 이대로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뭔가 방법을 찾겠죠.”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기본적으로 PTW VR은 PC 연결을 지원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나마 괜찮은 소식도 있긴 하군요. 하지만 괜찮다면, 이전까지의 저와 PTW의 인연을 생각해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죠?”
“PTW VR을 한번 써보고 싶습니다.”
“그게 얼마나 난감한 부탁인지는 알고 계시죠?”
“예. 하지만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유를 들려주시면 고려해보겠습니다.”
상혁의 말에 크리스가 진지한 눈빛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말했다.
“적어도 저희 회사에서 한 명 정도는, 저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이 가진 무기의 힘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상혁은, 크리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
미팅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멀리 미국에서 한국까지 날아온 크리스가, 수확이라 부를 만한 성과를 전혀 얻지 못한 상태로.
하지만 미팅을 마친 크리스는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PTW VR이 생각보다 시원찮은 기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 이상으로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은 장비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가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상혁이 해준 원론적인 이야기 안에 현재의 MS가 PTW VR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힌트가 보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독점 타이틀을 확보하고, 좀 더 나은 서비스를 개발하고, 개발사들을 더 열심히 지원하세요.’
솔직히 말해서, 8세대 콘솔 전쟁을 MS가 일찍이 승리로 확정 지으면서, 현재의 MS는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진 상태였다.
굳이 독점 타이틀 확보에 무리해서 나서지 않아도, 퍼스트 파티 확보에 투자하지 않아도 미친 듯이 팔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크리스도, 몇 번이고 게임사 인수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가 ‘이미 잘 팔리고 있는데 무엇하러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가’라는 이유로 임원 회의에서 물먹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PTW VR의 등장은, 느슨해진 MS에 위기의 경종을 울리는 좋은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크리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저렇게 강력한 무기를 상대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현재의 경색된 MS의 운영방침도 빠르게 부드러워질 수 있을 테니까.
“후우···.”
PTW 본사 건물을 나와 천하대의 넓은 공터를 가로지르며, 크리스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최고 상관이자 MS의 CEO인 윌 게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게이트 씨. 접니다. 크리스. 방금 미팅을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향해 말했다.
“지금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무래도 게이트 씨도 미팅에 참석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회의의 구체적인 내용 말씀입니까?”
게이트의 질문에 크리스가 답했다.
“위기관리 대응 회의(Crisis Management Plan Meeting)입니다.”
***
크리스가 떠난 회의실에서, 상혁은 나머지 PTW의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의 형태는, 주로 팀원들이 상혁에게 질문하고 상혁이 답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상혁에게 질문한 사람은, 역시나 이번 VR개발의 중심축을 맡은 민준이었다.
민준은 상혁이 생각하는 앞으로의 콘솔 전쟁의 예상 흐름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MS쪽에 불만이 많았던 거 같은데, 문제가 쌓이기 전에 이야기해 보지 그랬어?”
“아니, 사실 내버려 두는 편이 SANY와 협업했을 때 좋은 핑계가 될 것 같아서 놔둔 거였어.
아무리 우리가 MS에 진 빚이 없다지만, 그래도 하라는 대로 다 해줬는데 이쪽에서 협력사를 갈아 치우는 건 좀 모양새가 안 좋으니까.”
“그래서 상대가 할 말이 없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 하지만 내 생각에 지금 MS의 가장 큰 문제는 코넥트의 양산과 보급문제가 아니야.”
“그럼?”
“오히려 PS보다 2배 이상 팔리면서 치솟아 오른 점유율이 문제지.”
상혁이 말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MS가 독점 타이틀 확보에 여유를 부리는 타이밍이 빨랐어.
오히려 MS에서 데려갔을 만한 기업들을 SANY에서 퍼스트파티로 끌고 간 사례가 많을 정도로.”
상혁이 말한 ‘예상했던’의 의미가 ‘회귀 전에 알고 있던’이라는 의미임을 잘 알고 있는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혁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코넥트의 존재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렇지. 덕분에 SANY는 PS4가 덜 팔려서 힘든 상황에서 독점 타이틀을 매우 많이 확보하면서 버티고 있었고.”
“그럼 SANY에서 PTW VR을 가져가게 되면, 이번엔 SANY가 그렇게 되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상혁이 말했다.
“시제품 넘겨준 지 2일 만에 MS에 정보 유출된 거 보면, 생각보다 SANY 내부 분위기가 많이 안 좋은 거 같다.”
“어쩌다 유출이 된 걸까?”
옆에서 듣고 있던 현주의 질문에 상혁은 짐작 가는 바를 말해주었다.
“아마도 사기를 북돋우려고 내부 테스트를 돌리면서 유출되었겠죠. 워낙 임팩트가 강한 물건이니까, 아는 사람에게 ‘너만 알고 있어’라고 말했더니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너만 알고 있어’라고 말하고, 그런 식으로 몇 다리 건너면 금방이에요. 이 업계는 생각보다 좁으니까.”
“우리 직원들은 그런식으로 유출 안 하잖아.”
“그거야 PTW 직원들은 정해진 공개일에 놀라는 게이머들 표정을 보는데 쾌감을 느끼는 변태들만 모아놨으니 그런 거죠. 거기에 저희는 월급과 별도로 비밀유지 비용으로 매달 일정 금액을 따로 지급하잖아요. 대가를 지불하고 성립된 비밀유지계약을 위반하면 위약금이 장난 아니니까요.”
상혁의 이야기를 듣던 현주가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질문했다.
SANY에게 PTW VR의 시제품을 보내기 전에, 상혁이 현주를 통해 SANY에 전달했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근데 SANY측에 직원들 사기를 위해서 내부 테스트시켜보는 게 좋을 거라고 권한 건 상혁이 네 아이디어 아니야?”
“맞죠.”
“그럼 유출될 것도 예상하고 있었어?”
“어느 정도는요. 어차피 게임기용 주변기기 개발은 100% 정보 보안을 지키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우선 주변기기만 꼴랑 발매할 순 없으니까 개발킷을 게임사에 제공해야 하는 데, 그 과정에서도 유출위험이 있고, 자세한 스펙을 유출하지 않더라도 입이 근질거려서 ‘SANY에서 엄청난 걸 준비하고 있다. 근데 엠바고 때문에 말 못 함’ 이따위로 힌트 흘리고 다닐 개발자도 많으니까.
어차피 빠르든 느리든 저희가 공개하기 이전에 어느정도의 정보 유출은 감수해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예상한 범위 안의 유출이다?”
“예. 그리고 생각보다는 크리스 씨가 알고 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네요.”
그러자 이번엔 서연이 질문했다.
“그런데 크리스 씨는 오늘 PTW VR을 테스트했잖아요? 그건 문제가 안 되나? SANY 입장에서는 경쟁사에 정보가 넘어간 건데?”
“먼저 PTW VR의 존재를 알게 만든 게 SANY측이니까, 그거 가지고는 뭐라고 못하지. 그리고 크리스 씨는 아마 PTW VR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숨기려고 할 거야.
그게 공개되는 순간, X-BOX의 물량이 달려서 대기하고 있던 콘솔 구매 수요가 PS진영으로 확 몰릴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우리가 먼저 공개하기 전에 MS에서는 최대한 숨기려고 하겠지. 그러니 SANY에서 오늘 크리스 씨가 PTW VR을 테스트했다는 사실을 알 위험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될 거고.
그리고 이번에 SANY쪽에 정보 유출이 될 만하게 테스트를 유도한 이유는 따로 있어.”
상혁의 말에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게 뭐예요?”
“내가 정확히 원하는 정보 통제의 수준은, 유저들이 PS 전용의 VR기기를 PTW와 SANY가 함께 만들고 있구나 하는 정도만 알 수 있게 하는거야.
구체적인 장비의 스펙이나 기능, 어떤 식으로 동작하는 기기인지는 비밀에 부치고.
그러니까 우리가 공개하기 전까진, 유저들이 적당히 기존 VR기기랑 비슷한데 PS전용인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지만 아까 말한 대로 PTW VR이 발매될 때 동시 발매될 타이틀의 개발을 위해서는, SANY의 협력사에 개발킷을 건네줄 필요가 있어.
그리고 협력사 개발자를 입단속 시키는 건, 본사 차원에서 입단속 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
그러나 일단 한번 작은 유출 건이 나서 얻어터지고 나면, SANY에서 필사적으로 보안 유지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씩 미소 지었다.
“원래 불을 모르는 존재는, 불에 한 번 데어 봐야 불이 뜨거운 걸 알 수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한 상혁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현주를 향해 말했다.
“선생님.”
“응?”
“저랑 같이 SANY 본사에 좀 가주셔야겠어요.”
“거긴 왜?”
“당연히 이번 정보 유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죠.”
그렇게 말하는 상혁을 보며, 현주는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가, 이번엔 SANY에서 뭘 뜯어낼 생각일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