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백악관 협상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대통령 비서의 안내를 받은 상혁일행은 영화에서만 보았던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도착한 상혁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신기하다는 듯이 사방을 둘러보는 현주에게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선생님.”
“응?”
“저거 보여요?”
상혁이 가리킨 책상 위에는 붉은 버튼이 달린 작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저게 뭐야?”
“핵 미사일 발사 버튼이요.”
“진짜!!? 하지만 영화에서는 핵 가방 안에 버튼이 있지 않았어? 열쇠를 가진 두 사람이 동시에 열쇠를 돌리고 버튼을 누르던데?”
“원래는 그렇죠. 근데 도람프 대통령이잖아요. 임기 첫날에 무엇보다 국제 위협에 빠르게 대응한다고 저 버튼을 주문했죠.”
“헐···. 누가 누르면 어쩌려고??!”
“지문 인식 기능이 있는 버튼이라 대통령만 쓸 수 있어요.”
“오, 역시 백악관···.”
현주의 뒤에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민준에게, 상혁은 윙크를 한번 날리고는 집무실에 있는 다른 일행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먼저 들어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헤지펀드 대표들과 SEC국장이 함께 서 있었다.
원망 섞인 눈으로 상혁을 바라보면서.
‘인사를 해야 하나?’
상혁은 잠시 고민했지만, 굳이 자신이 먼저 인사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이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이미 상대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상혁을 안내한 대통령 비서의 외침이 들려왔다.
“로널드 도람프 대통령께서 입장하십니다.”
아무리 타국의 대통령이라지만,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주는 위압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더욱 그러했고.
그렇기에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은 대통령이 입장한다는 비서의 외침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공손히 자세를 정돈하며 도람프의 입장을 기다렸다.
그러자 그들을 그렇게 기다리게 만든 도람프가, 태연한 걸음으로 집무실로 걸어들어와 그들에게 인사했다.
“미국 대통령 로날드 도람프입니다. 게이트 씨. 오랜만이군요.”
“미 합중국의 대통령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릴 적부터 전 항상 제가 언젠가 대통령이 될 것이란 사실을 믿고 있었어요.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 것이냐였지. 아무튼, 다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도람프가 말하자마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SEC 국장인 조지 벤자민이었다.
“존경하는 대통령 님. 저는 미 증권 거래 위원회(SEC) 국장 조지 벤자민입니다.”
“아니, 왜 내가 이미 아는 사람부터 자기소개를 시작하는 거지?”
“그건···.”
“윗 사람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싶다는 자네의 의욕은 높게 사지만 지금은 잠시 뒤로 물러서 있게. 내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나머지 사람들이니까.”
그러자 벤자민의 뒤를 이어 헤지펀드 대표들이 자신을 소개했다.
단순히 대통령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라, 현재의 경쟁자인 상대방에게 건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제가 바로 이번 공매도 작전을 설계한 장본인인 W. 얼 브라운입니다.”
그러자 PTW측에서도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참가한 인물 중에 대통령과는 이미 구면인 윌 게이트의 인사를 시작으로.
“MS의 CEO 윌 게이트입니다. 대통령님과는 사업가 시절에 몇 번 뵌 적이 있었죠.”
“PTW의 CEO 이현주입니다. 회사 경영에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PTW의 CCO 이상혁입니다. PTW에서 발매되는 모든 제품의 발매에 대한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PTW의 CTO 김민준입니다. PTW에서는 기술 관련 업무를 담당합니다.”
그러자 도람프 대통령이 민준의 자기 소개에 흥미를 느꼈는지 민준을 보며 질문했다.
“기술 관련 업무라면 그 스컹크 웍스도 담당하십니까?”
“맞습니다. 스컹크 웍스를 아십니까?”
“국방부에서 올라온 보고에서 몇 번 이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타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기술 중에 미국의 안보와 관련된 주요 기술 몇 가지를 스컹크 웍스에서 보유 중이라고 하더군요.”
“저희 기술을 딱히 미국에 넘길 생각은 없지만, 협조라는 측면이라면 보안이 허용하는 범위 내의 기술지원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게 재미있는 부분인데, 해당 기술의 강제 수용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정부 기관이 그 기술을 가장 원하는 국방부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PTW는 ‘미군의 친구’라는 표현까지 쓰던데요?”
“그건 아마 EOD 때문일 겁니다. 그 게임을 기반으로 한 훈련 시뮬레이터를 저희 PTW에서 개발해서 미군에 넘겨드렸으니까요.”
“맞습니다. 덕분에 병사들이 테러리스트와 민간인을 구분하는 훈련을 잘 받을 수 있어서 인명 피해가 크게 줄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도람프의 말에 상혁은 자신이 미군에 뭔가 좋은 것을 해준 적이 있었나 기억을 되짚었다.
그리고는 도람프를 향해 말했다.
“저희가 미군에 기부하고 있는 게임 콘솔 이야기겠군요.”
EOD를 개발할 때, 상혁은 현장에 있는 미군의 협조를 받기 위해 미군의 이라크 파견 부대에 수백 대의 X-BOX 콘솔과 코넥트, 그리고 대형 TV를 기부했었다.
굳이 고증 작업에 참여한 군인이 아니더라도, 미군이라면 누구나 PTW에서 제공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그것은 전장에서 별다른 취미 없이 여가를 보내는 병사들을 배려한 상혁의 아이디어였다.
“맞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현명한 투자라고 생각했지요.
전장에 있는 병사들이 PTW의 게임을 하면서, 고국에 돌아오면 그대로 PTW의 팬이 될 테니까요.”
“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는 말을 못 하겠네요.”
“의도가 어쨌든, 덕분에 미군 병사들의 상당수가 PTW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죠.
게다가 한국은 미국의 오랜 우방이자 동맹국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 위에 있는 녀석들은 현재 얼마 남지 않은 미국의 적이지만.”
“북한 말씀입니까?”
“그냥 그 위에 있는 나라 전부를 말하는 겁니다. 북한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요즘 그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픕니다.”
도람프는 그렇게 말하며, 집무실에 있는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위에 있는 나무상자에 달린 붉은 버튼을 눌렀다.
“허어어어어!?!?”
현주가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르자, 도람프가 깜짝 놀라며 현주를 바라보았고, 상혁이 웃으며 도람프에게 현주가 어째서 비명을 지른 것인지를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님께서 들어오시기 전에, 제가 저희 CEO에게 그 버튼이 핵 미사일 발사 버튼이라고 농담을 했거든요.”
“그걸 믿었단 말입니까?”
“저희 CEO는 좀 순진한 면이 있는 분이라서요.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로날드 도람프라는 것을.”
그것이 핵 미사일 발사 버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굳이 도람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람프가 버튼을 누르자 마자, 밖에 있던 비서가 시원한 콜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집무실에 들어왔기 때문에.
도람프는 그녀가 건넨 콜라로 목을 축인 뒤, 황당해하는 현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건 핵 미사일 발사 버튼이 아니라 비서에게 콜라를 가져오라고 호출할 때 쓰는 버튼입니다.
제가 콜라를 좋아하기 때문이죠.
아무리 제가 그런 이미지가 있다고 해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장치를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 내버려 두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재미있는 농담이긴 하네요.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와서 같은 회사 동료에게 장난을 치다니.
이상혁 CCO는 평소에도 그렇습니까?”
“틈만 나면 장난을 치려고 시도하곤 합니다. 그 때문에 곤란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죠.”
“장난을 잘 친다는 이야기는 그런 장난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영민하다는 이야기니까요.
원래 천재는 언제나 일반인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는 법이죠.”
도람프는 자신을 책상에 핵무기 발사 버튼을 장치한 얼빠진 대통령으로 현주에게 소개한 상혁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칭찬을 하며 집무실 안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상혁은, 그런 도람프를 보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만한 사람은 아니네.’
오랜 시간 세계에서 손꼽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결국엔 미국이란 초 강대국의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라간 이 남자는, 이 협상의 키를 PTW측이 가지고 있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쪽이 부탁을 해야하는 입장인지에 대해서도.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옆에서 갑갑함을 느끼던 헤지펀드 대표 윌턴 고긴스는 그런 훈훈한 분위기에 끼어들어 찬물을 쏟았다.
같은 미국인인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 ‘미 합중국 대통령’이, 상대와 더 훈훈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께서는 미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저희보다 한국 기업인 PTW에 호감을 더 가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 저의 착각이겠지요?”
“이름이···.”
“윌턴 고긴스입니다. 뉴욕의 헤지펀드 다니엘&고긴스의 대표입니다.”
“좋아요. 고긴스. 확실하게 이야기하지만 저는 미국 기업인 당신들보다 PTW가 더 마음에 듭니다. 그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도람프 씨는 미국의 대통령이십니다.
그럼 당연히 미국 기업의 편에서 주셔야죠. 저희 펀드가 투자한 미국 기업에 다니는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십니까?”
“알죠. 그리고 월가의 장난질로 문을 닫은 기업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기억합니다.
고긴스.
저는 월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하지만 당신의 우려나 세간에 알려진 제 이미지와는 다르게, 저는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업인 도람프가 아닌 미 합중국의 대통령 로날드 도람프는, 이 방에서 절대로 어느 특정 기업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 정도 대답이면 만족하실 수 있겠습니까?”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번 사태에 대해 논하도록 하죠.
SEC국장인 조지 벤자민 씨가 이번 사태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할 겁니다.
양측에서는 벤자민 씨의 설명을 듣고,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손을 들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상혁은 벤자민이 설명을 하면서 헤지펀드의 입장에서 상황을 입맛대로 해석하여 설명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벤자민의 설명은 의외로 철저하게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SEC 스스로가 실행한 실수에 대한 것도, 벤자민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사태의 문제는 MS가 SANY측과 수행한 계약에 그 원인이 있다는 거군요?”
묵묵히 설명을 들은 도람프는 그렇게 상황을 해석해 정리했고, 벤자민은 그런 대통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원래 예측이 불가능한 게 주식 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최대의 경쟁사가 자신이 확실하게 상대를 누를 수 있는 카드를 상대방에게 제공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SANY가 그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PTW가 딥 다이버의 개발 과정에서 SANY에게 건 계약 조건이 존재했고요?”
“맞습니다. 저희는 애당초 딥 다이버의 개발 협력 계약을 추진할 때부터, MS가 적자 보전을 조건으로 건다면 딥 다이버를 X-BOX에서도 사용 가능하다는 조건을 걸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이 거기에 있군요.
헤지펀드측에서는 그것이 고의적인 주가 조작을 위한 작전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고, PTW와 MS측에서는 그게 사전에 공모된 것이 아닌 상황이 흘러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발생 된 ‘필연’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거죠?”
“맞습니다.”
도람프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말했다.
“그것에 대한 문제라면, 저는 PTW측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겠습니다.”
“대통령님?!”
“조용히 하세요. 벤자민. 이야기를 종합해서 들어보고 판단한 제 결정입니다.
저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사업가였어요. 그리고 사업을 할 때는, 항상 상대를 자신이 만든 플레이그라운드로 끌고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PTW는 그걸 너무 잘 했을 뿐이고요.”
“하지만···.”
“그럼 SEC측에서는 MS가 사전에 이미 이 계약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 벤자민이 입을 다물자, 도람프가 말을 이어나갔다.
“있을 리가 없죠. 실제로 그런게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현재 SEC가 가진 것은 전부 정황 증거일 뿐이니까.
실제 증거를 가지고 있었으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윌 게이트 씨가 서 있지는 못했을 겁니다.
정말로 고의적으로 주가를 조작하기 위해 그 모든 계획을 펼친 것이란 증거가 있다면,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대통령 집무실이 아니라 교도소였을 테니까.”
도람프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 대한 부분에서는 PTW와 MS의 손을 들었다.
그러나 수습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SEC에서 MS를 기소했다는 건, 그리고 딥 다이버의 미국 내 판매 중지를 요청했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이번 사태로 인한 헤지펀드 측의 손해가 천문학적인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거군요.
MS와 PTW측은 정상적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했고, 헤지펀드측도 정상적으로 공매도에 나섰지만, 서로의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 충돌하여 이 사태가 발생한 겁니다.
그리고 이 경우, 손해는 헤지펀드 측에서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게 맞겠죠.”
“하지만 대통령 각하!”
“내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도람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자, 벤자민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도람프는 냉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SEC 입장에서는 이 사태를 그대로 흘러가게 둘 수 없었을 겁니다.
보고서를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이건 헤지펀드 한두 개가 망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 너니까요.
잘못하면 이번 사태로 인해 서프 프라임 사태가 다시 발생할 수도 있다고, SEC에서는 그렇게 판단해서 이번 일을 벌인 거겠죠.
하지만 벤자민. 자유 시장 경제에서 SEC가 그런 식으로 시장에 개입하면 안 됩니다.
증거가 있다면 모르되, 증거도 없는데 MS를 기소한 건 MS측에서 SEC를 악의적 기소로 역고소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도 있어요.
SEC에 있는 수많은 법률 전문가들이 그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습니까?”
“했지만, 무시했겠죠. 이번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고 판단했을 테니.”
상혁이 도람프에게 말하자 도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가 심각한 건 맞죠.
그리고 이번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 시장에 2007년의 서브 프라임 사태 수준은 아니더라도 심각한 타격은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되도록 제 임기 내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바라고 있죠.
이 자리를 만든 것은 그래서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저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 거죠?”
“합의를 해 주십시오. 양측에서 납득 가능한 수준의 합의를, 이 집무실에서 끌어냈으면 합니다.”
“합의요?”
이번에 질문한 것은 게이트였다.
이번 사태의 잘못은 전적으로 헤지펀드측에 있지 PTW나 MS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법적으로 따지면,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는 주가 조작의 근거를 SEC가 제시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정황 증거만 가지고 법원에서 SEC의 손을 들어줄 리도 없었다.
그리고 현재 치솟아 오르는 MS의 주가는, MS에게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었지 부정적인 신호는 아니었고.
그러니까 지금은 단순히 MS 측에서 버티기만 해도 헤지펀드 측은 막대한 손해를 입고 뒤로 물러서야 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확실한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MS가 합의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게이트는 도람프에게 질문한 것이었다.
“저희가 합의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을 텐데요?”
“합의라는 것이 무조건 양측이 만족하는 합의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양쪽이 수락하면 그것도 합의가 되는 거죠.
그리고 이번 사태의 모든 귀책사유는 100% 헤지펀드 측에 있죠.
제가 말한 합의는, 양측 모두가 만족하는 합의가 아니라, 헤지펀드 측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손해를 감수할 합의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도박에 진 사람답게, 패배를 인정하고 판돈을 내놓으라는 거죠.”
“그런 거라면···.”
“하지만 MS측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비(Mercy)를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SEC 국장인 벤자민이 말한 것처럼, 저는 제 임기 안에 서프 프라임 사태가 재현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 말씀은···.”
“이긴 건 알지만 적당히 받아 드시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제 이번 임기 내의 미국 정부의 호의는 온전히 PTW와 MS측으로 향하게 되겠죠.”
“그건 도람프 씨가 저희에게 빚을 지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미 정부가 당신들에게 빚을 지는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합의하죠.”
도람프의 제안은 절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었기에, 윌은 웃으며 도람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번 합의에서 대놓고 대통령에게 ‘패배자’라고 언급된 헤지펀드측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희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물론 저희가 잘못된 판단으로 투자를 진행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합법적인 것이었어요. 그리고 저희가 투자를 실행한 논거도 확실하고요.
저희의 패배라고요? 아직 청산일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우린 월 스트리트입니다. 전 세계의 돈이 저희를 통해서 움직입니다. 저희가 마음만 막으면, 판돈은 얼마든지 키울 수 있죠.
진짜로 저희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추가 공매도에 들어가면, 그때도 폭등하는 MS의 주가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보십니까?”
“폭등할 겁니다. 아니, 지금보다 더 빠르게 오르겠죠.”
그렇게 말한 것은, 이전에 비슷한 사태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상혁이었다.
“중요한 건 당신들이 언제까지 공매도한 주식을 갚아야 하는지 이미 시장에 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배팅했던 주가 하락 요인이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도요.
지금 상황에서 주가 하락 흐름을 만들기 위한 추가적인 베팅은 상대방이 단순히 블러핑이 확실한 카드에 전 재산을 거는 멍청한 행위로 보일 뿐이죠.
공매도 규모를 늘리신다고요? 해볼 테면 해 보십쇼.
전 세계 개미들이 당신들이 뿌리는 달콤한 과즙을 먹기 위해 몰려드는 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기관은? 전 세계의 기관들이 당신들의 패배에 배팅하게 될 겁니다.
거대 헤지펀드가 월 스트리트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들의 반대 방향에 설 거대 자본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월 스트리트와 머니게임을 해보자는 겁니까?”
“아뇨, 당신들과 머니게임을 하겠다는 겁니다.
월 스트리트 전체가 패색이 만연한 당신들의 공매도 계획에 찬동할 거라고 믿고 있다면, 그건 멍청한 거죠.
아마 태반은 배신하고 저희 쪽에 설 겁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이윤이지 편을 가르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 닥치고 패배를 인정하시죠. 그리고 도박에서 진 사람이라면 응당 내야 할 대가를 지불하고 조용히 손해를 메꿀 방법이나 찾아보시란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PTW가 하는 일에 숟가락을 얹을 생각도 하지 말고요.
만약 저희가 다음에 무언가를 하려 할 때 당신들이 개입되었다는 정보를 알게 된다면, 그때는 진짜로 주가를 가지고 논다는 게 뭔지 보여드릴 테니까.”
상혁의 경고에 고긴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상혁의 말대로, 월가의 모든 자본이 그들의 손을 들어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패배의 냄새를 맡는데 강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었고, 지금 패배의 문턱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자신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입을 다물자,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도람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혁에게 말했다.
“그 전투적인 태도는 젊을 때의 나를 연상하게 하는군요.
이상혁이라고 했죠? 전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더 인상 깊은 건, CEO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마음대로 싸우게 놔두는 현주 씨입니다.
그녀는 현재 상황에서 가장 잘 싸우는 사냥개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녀는 저를 전적으로 믿고 있으니까요.”
“젊은 기업은 활력이 넘쳐서 좋죠. 어찌 되었건 이번 사태는 온전히 헤지펀드 측의 패배입니다.
이제 그만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세요. 만약 당신들이 손해를 감수하지 않기 위해 이 싸움의 판을 키운다면, 그때는 미 정부에서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도람프의 마지막 말은 충고가 아니라 ‘경고’에 가까운 늬앙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헤지펀드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람프는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커다랗게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이제 협상의 가장 재미있는 파트가 남았군요!
조율. 전 이게 가장 재미있더라고요. 물론 여러분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협상을 조율할 수도 있겠지만, 설마 이 모든 사태를 정리하려는 저에게 그런 실망을 안겨주시는 않으시겠죠?”
윌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헤지펀드 측의 대표인 브라운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도람프는 웃으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있는 빨간 버튼을 연타하며 밖에 있는 비서를 향해 외쳤다.
“아만다! 콜라를 가져와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콜라를!”
그렇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든 도람프가, 씩 웃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음 이야기는 함께 콜라를 마시면서 진행해봅시다.
다 같이 멋진 거래를 만들어보자고요.”
그의 시원한 미소를 보며, 상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 거래가 끝나고 나서, 자신도 저 빨간 버튼을 하나 가지고 싶을지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