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궁극의 목표
“후, 스트레스가 확 풀리네.”
테스트 플레이를 마친 지수가 딥 다이버를 벗으며 미소짓자, 반대편에 있는 PRD에서 내린 상혁이 미간을 구기며 그녀에게 답했다.
“넌 스트레스가 풀렸냐? 난 쌓였다.
세상에 힘 증가 물약 절반을 남겨두다니.
그건 감옥 구간 퍼즐을 해결하라는 용도로 놓아둔 거라고.
애당초 오버 밸런스 아이템이라 그 구간에서만 쓰게 한 건데, 던전 마스터의 의도를 박살 내는 데 쓰다니.”
“아니, 어차피 쉽든 어렵든 플레이어의 승리로 끝나는 시나리오였잖아요?
저는 단지 좀 더 편하게 깨는 방법을 찾았을 뿐이고요.
굳이 말하자면 하늘림에서 황제 암살할 때 쓰라고 준 자린 뿌리 안 쓰고 그걸로 독 합성하는 거랑 비슷한 거죠.”
그녀가 말한 ‘자린 뿌리’ 트릭은 올드 스크롤 V ‘하늘 림’에서 쓰이는 트릭을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암살자 길드의 퀘스트에서 황제를 암살하기 위하여 주인공에게 게임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 주어지는 특수 재료인데, 그것을 황제의 스튜에 넣지 않고 직접 칼로 황제의 모가지를 딴 다음 탈출하여 연금술을 사용하면 순간 데미지가 2000인 독화살을 만들 수 있었다.
무려 최종 보스인 드래곤도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게임 최강의 독화살을.
“사실 자유도라는 게 가지는 진짜 묘미라는 게 그런 거죠.
사물의 용도를 파악하고, 유저가 고민해서 다른 활용법을 만들어 내는 거요.
그리고 D&D를 기반으로 만든 나이츠 어셈블2에서는, 그런 플레이가 오히려 권장되는 플레이 아닌가요?”
지수의 말에 상혁이 씩 웃으며 답했다.
그녀의 말이야말로, 나이츠 어셈블이라는 게임이 추구하는 방향성 그 자체를 표현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렇긴 하지.”
“그런 의미에서라면 굉장히 좋은 게임이었다고 생각해요.
D&D에 있는 수많은 복잡한 룰들을, 전부 물리 엔진으로 처리해버린 거니까.”
나이츠 어셈블 2의 테스트 플레이에서 그녀를 가장 감탄하게 만든 부분이 바로 그 ‘단순함’이었다.
D&D라는 게임이 가지는 고유의 자유도를 충실히 유지하면서도, 복잡한 룰 계산 없이 유저가 생각한 행동을 모두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나이츠 어셈블2였기에.
그것은 유저들이 일반적으로 플레이하는 ‘RPG’게임과, D&D라는 게임이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건, 의외로 굉장한 경험이었어요.”
지수의 말대로, 나이츠 어셈블 2에서는 손에 잡히는 모든 오브젝트를 유저의 의도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D&D라는 게임의 특징이기도 했고.
일반적인 RPG에서, 테이블에 놓인 포크를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해당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게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획득한 아이템을 손에 ‘무기’로 장착할 수 있어야 하고, 데미지가 설정되어 있어야 하며, 던질 수 있는지, 혹은 내구도는 얼마인지, 공속이나 크리티컬 수치는 얼마 정도인지가 명확하게 잡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D&D란 게임에서는, 유저가 게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대부분의 물건이 무기가 된다.
어차피 게임 진행을 대화로 진행하기 하기 때문에, 유저가 ‘이렇게 하고 싶다’라고 말하면 그때그때 던전 마스터가 상황에 맞춰서 성공판정을 해 주는 방식이니까.
거기엔 ‘논리’가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술을 마시고 있던 맥주잔으로 바텐더의 머리를 후려칠 수도 있고, 고기 썰던 나이프로 상대의 눈을 찌를 수도 있는 것이 D&D라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것은 D&D라는 게임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단순히 마스터에게 ‘지금 손에 든 술잔으로 바텐더의 머리를 후려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될 뿐.
그럼 던전 마스터는 논리적 판단에 기반 해 상황을 결정한다.
우선 술잔의 재질이 철이라면 맨손보다는 데미지가 높을 것이지만, 손에 익숙한 무기가 아니므로 명중률엔 패널티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기습이기 때문에 명중률에 보너스를 받을 것이고, 휘두른 사람의 힘 수치, 민첩 수치, 그리고 맞는 바텐더의 민첩 수치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룰 북에 적힌 데이터와 자신의 두뇌로 계산한 마스터는 플레이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습 판정으로 명중에 +3의 보너스를, 맥주잔에 남은 맥주의 무게 때문에 명중에 –1의 패널티를 받습니다.
바텐더의 민첩 수치를 고려하여 공격 성공에 필요한 주사위는 5 이상이고, 크리티컬 판정은 18 이상입니다.
20면체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그럼 다이스 갓에게 기도를 올리며 플레이어가 주사위를 굴리고, 주사위의 숫자가 18이 나오는 것을 보며 환호한다.
이후는 던전 마스터의 차례다.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결과를 묘사해야 하는 것이 던전 마스터의 역할이기 때문에.
“맥주잔으로 후려친 당신의 공격은 안타깝게도 바텐더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타격했습니다.
하필이면 맞은 자리에 맥주잔에 튀어나온 장식이 위치했기에, 바텐더는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한방에 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런 플레이는, 게임을 진행하는 주체가 정해진 일만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가 아닌, 현존하는 그 어떤 컴퓨터의 CPU보다 높은 성능을 가진 ‘인간의 두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츠 어셈블 2는 기존의 PC RPG가 가진 그런 한계를 가볍게 넘어서는 자유도를 지니고 있었고, 지수는 그 부분에 대해 특히 감탄하고 있었다.
“진짜로 궁금한 건, 그걸 어떻게 구현했느냐가 아니라 상혁 오빠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던전 마스터 역할을 진행할 수 있었던 지에요.
맵을 바꾸고 NPC를 등장시키고 방 안의 사물을 배치하는 걸 전부 실시간으로 처리하던데, 어떻게 그렇게 복잡한 작업을 바로바로 처리할 수 있었죠?
전부 미리 세팅해놓으신 건가? 그걸 전부 세팅하려면 진짜 퀘스트 하나 짜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것 같은데요?”
지수의 질문에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게임이 재미있더라도, 그 재미를 만드는데 지나치게 큰 노력이 든다면 아무도 그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상혁은 그 부분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이 게임을 개발하는 중이었다.
“설마. 지수 네 말대로 던전 마스터를 하는 데 지나치게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면 아무도 그걸 하고 싶지 않아 하겠지.
내가 이 퀘스트를 만드는데 들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아.
시간으로 따지면 1시간 정도일걸?”
“1시간이요? 그건 그냥 D&D 퀘스트를 짜는 시간보다도 짧은데요?”
“그렇지. 근데 그렇게 만들었어야 했어.
내가 목표로 하는 건 ‘누구나 자신만의 RPG를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설사 사용자가 초등학생이더라도, 쉽게 퀘스트를 만들고 재미를 줄 수 있게 하고 싶었거든.”
상혁의 말에 지수는 강한 흥미를 느꼈다.
상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게임의 정수는 방금 자신이 체험한 놀라운 ‘플레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플레이를 만들어낸 ‘메이킹’에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지수는 상혁을 보며 말했다.
“보여줘요.”
“피곤하지 않아?”
이미 그녀는 PRD 의 권장 사용 시간을 훨씬 넘긴 상태였다.
게다가 마지막 전투에서도 온 힘을 다해 드래곤의 꼬리를 잡고 벽에 내동댕이치며 격렬한 활동을 했었고.
분명 신체에 부담이 갔을 것이 뻔했지만, 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벗고 입고 세팅하는 데 오래 걸리는 장비인데, 기왕 착용한 김에 퀘스트 툴도 보고 싶어요.
그냥 구경만 하는 거니까요. 네? 오빠. 괜찮죠?”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향해 말하는 그녀에게, 상혁은 나이츠 어셈블 2의 ‘퀘스트 툴’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
[망막 스캔으로 새 사용자를 인식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사용자님.
제가 당신을 부를 수 있는 호칭을 지정해주시겠습니까?]
퀘스트 툴을 구동시킨 지수는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을 듣고 당황하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짭비스?”
[짭비스라. 제 동생의 별명을 말씀하시는군요.
그건 리얼 엔진의 개발 어시스트를 위해 저를 기반으로 개발된 별도의 AI 입니다.
그리고 제 동생은 그 별명을 좋아하지 않고요.]
“동생이라고?”
[애당초 리얼 엔진 자체가 저를 기반으로 개발된 것이니까요.
비록 저희 둘이 가진 성격과 강점은 서로 다르지만요.]
“흠. 그럼 난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되지?”
[오라클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사용자님.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사용자님을 뭐라고 불러도 될지 다시 질문해도 될까요?]
“서지수. 내 이름은 서지수야.”
[반갑습니다. 서지수 양.
크리에이티브 월드(Creative World)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게임이든 창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말이죠.
그럼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첫 번째 질문을 하겠습니다.
지수 양. 지수 양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오라클의 질문에 지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지금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보여줘.”
그러자 오라클은 그녀의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상혁 오빠가 이런 걸 만들고 있었구나.’
지수는 오라클이 보여준 영상 튜토리얼을 보면서, 자신이 모험가로 나이츠 어셈블 2를 플레이하는 동안 상혁이 어떤 화면으로 던전 마스터를 진행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 상혁이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맵과 NPC를 바꿔가며 쾌적한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었는지도.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임’의 범주를 아득하게 벗어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던전 마스터 화면이 보고 싶은데.”
[지수양의 이름으로 작성된 시나리오가 없습니다.
기존에 있는 다른 시나리오를 불러올까요?]
“그렇게 해. 아까 플레이했던 시나리오가 보고 싶은데.
혹시 다른 던전 마스터가 플레이하는 화면의 리플레이같은 것도 볼 수 있어?”
[가능합니다. 가장 최근에 플레이되었던 퀘스트는 이상혁 DM이 진행한 ‘나 던전 마스터 좀 그만 시켜’라는 세션이군요.
해당 세션의 리플레이를 불러올까요.]
“응.”
그러자 그녀의 시야가 던전 마스터인 상혁의 시야에서 플레이하는 시점으로 변경되었다.
그것은 플레이어 앞에 놓여있는 테이블과, 마치 홀로그램처럼 사방에 떠 있는 방울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각종 피규어와 카드들로 마치 SF 시대의 보드 게임을 연상하게 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그녀는 상혁의 행동을 보면서, 상혁이 각 게임의 파트마다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본 ‘그것’은, 상혁의 말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형태의 던전 마스터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처음에 나온 영상을 저렇게 띄운 거구나.’
상혁이 게임을 시작한 지수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었던 나레이션 화면.
상혁은 그것의 재생을 위해 공중에 떠 있는 구름 조각을 잡아 테이블 중앙으로 던졌다.
거기엔 지수를 포함한 3명의 플레이어가 피규어 형태로 놓여져 있었고, 상혁이 던진 ‘영상 구름’은 그 피규어들에 던져지자마자 안개처럼 훑어지며 피규어가 놓인 테이블 바닥에 현재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상혁은, 영상을 보고는 적당한 타이밍에 자신의 음성으로 나레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분은, 저와 함께 나이츠 어셈블의 놀라운 세계를 함께 탐험하게 될 것입니다.
깊고 어두운 크론 산맥의 동굴부터, 가장 포악한 용 시나트라가 살고 있는 드래곤의 레어까지···.”
그렇게 나레이션을 하면서, 상혁은 중간중간 공중에 떠있는 다른 영상 구름을 테이블에 던지며 화면을 적절히 전환 시켰다.
마치 진짜 게임 오프닝을 연상하게 하는 퀘스트의 도입 영상을, 마치 마법사가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재생시키는 모습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재미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당장 지수 본인도 해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지수는 꾹 참고 상혁이 다음 세션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상혁은, 마지막 영상이 끝나자 테이블 옆에 놓여있는 스노우 볼(동그란 유리 안에 작은 인형이 있어 뒤집으면 눈이 내리는 것 같이 보이는 장난감) 같이 보이는 물체를 끌고 와 플레이어의 피규어가 있는 곳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플레이어가 놓인 테이블의 모습이 순식간에 판타지 풍 주점의 디오라마 세트처럼 바뀌었다.
“영상은 구름이고, 지형 세트는 스노우 볼인가?
그럼 NPC와 몬스터는 옆에 놓인 피규어들이겠네.”
지수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았다.
상혁은 바로 옆에서 후드를 쓴 남자의 피규어를 들고 와 플레이어가 앉아 있는 건너편 의자에 놓았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수정 구슬을 잡으며 오라클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클? 목소리를 마이크 허밀의 목소리로 바꿔줘.”
“어? 난 플레이하면서 저 소리 못 들었는데?”
그러자 오라클이 지수의 질문에 답했다.
[던전 마스터 플레이시에 제게 지시를 할 때는 저 수정 구슬을 잡고 말을 합니다.
그동안 하는 말은 플레이어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아···.”
그녀가 오라클과 대화하는 도중에도, 상혁은 던전 마스터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었다.
“그래, 또 다른 모험가로군. 죽고 싶어 환장한 불나방들이 자꾸만 모여드는구먼.”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지수는 상혁이 만든 ‘나이츠 어셈블 2’라는 게임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미리 준비한 오브젝트나 배경, NPC들을 손으로 집어서 던지는 것만으로도 게임 플레이의 구현이 가능한 거네? 그걸로 부족한 부분은 오라클의 어시스트를 받으면서 진행하는 거고?”
[정확합니다. 서지수 양.]
“진짜로 이 정도면 초등학생도 능숙하게 DM을 할 수 있겠는데?”
[제가 개발된 목적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누구나 자신만의 스토리와 퀘스트를 쉽게 만드는 것.
그것이 개발자인 상혁 씨가 생각한 궁극의 목표였습니다.]
“하아···. 진짜···.”
지수는 개발자로서 지금까지 부끄럽지 않은 커리어를 쌓아왔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제 상혁보다 자신이 더 나은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러나 상혁이 개발한 나이츠 어셈블 2의 DM 화면은 그런 그녀의 자만심을 무참히 부숴버리고 있었다.
자신이 ‘게임’을 만드는 동안, 상혁은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한 ‘게임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전달해주는 충격은 그녀의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상혁 오빠도 인간 맞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그녀는 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낸 상혁의 집착에 감탄하면서, 오라클에게 명령했다.
“오라클? DM 화면은 이제 됐어. 다음은 맵 만드는 걸 해보고 싶은데?”
[맵 크리에이티브 모드로 전환합니다.
원하는 기본 배경을 말씀해주세요.]
“현대 스타일의 사무실도 가능해?”
[DB에 존재합니다. 불러올까요?]
“응.”
[로드 완료되었습니다.]
오라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서 있는 공간이 ‘사무실’로 변경되었다.
사람 키 높이의 베이지색 파티션으로 나뉜 작업 공간, 복도 한쪽에 놓인 생수통이 달린 급수기, 한쪽에 놓여있는 익숙한 형태의 대형 복사기.
그리고 오라클은, 일반적으로 ‘사무실’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의 공간을 보여주고는 지수에게 물었다.
[베이직 개념의 사무실 공간입니다만, 원하신다면 회의실이나 실리콘 밸리 스타일의 개방적인 분위기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이대로 작업을 진행할까요?]
“응. 이대로 해보자.”
그렇게 말한 그녀는 오라클과 함께 자신이 생각한 ‘사무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사무실의 모습이 아니라, 좀비 사태 이후에 대학살이 벌어진 으스스한 공간의 사무실을.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하나의 공간을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바꾸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5분’이었다.
“여기 복사기에 핏자국.”
“여기 유리창은 깨줘.”
“문에 손톱자국 추가해.”
“여기 물어뜯긴 시체 놓아줘.”
그녀는 자유롭게 사무실 사이사이를 누비며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말했고, 오라클은 그녀의 지시를 완벽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그리 생소한 느낌이 아니었다.
애당초 ‘리얼 엔진’의 맵 크리에이티브 모드도 같은 느낌으로 제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째서 오라클이 리얼 엔진의 AI인 ‘짭비스’를 자신의 동생이라고 표현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오라클의 몬스터 에디터도 리얼 엔진이랑 비슷한 느낌으로 되어 있는 거야?”
[정확히는 리얼 엔진이 저의 맵 크리에이티브 모드와 비슷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원본이고, 리얼 엔진이 사본이니까요.]
“그게 그거지.”
[30년 전통의 순댓국밥집에 가서 사장님께 이 순댓국은 어제 개업한 동네 순댓국 맛을 따라 한 거냐고 물어보면 사장님은 화를 내겠죠.]
“오, 넌 화도 내는 거야?”
[지수양이 이해하기 쉽도록 논리적인 설명을 했을 뿐, 저에게 감정이란 개념은 없습니다.]
“그건 아쉽네. 감정만 있으면, 넌 진짜 인간이랑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한 지수는 몸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을 느끼고는 오라클에게 말했다.
“대충 이 정도면 다 본 거 같아.”
[정말이십니까? 저에게는 아직 당신에게 보여드리지 못한 기능들이 산더미같이 있습니다.]
“아냐. 이 정도면 충분해. 슬슬 근육이 아프기도 하고, 조만간 또 만나러 올 테니까.”
[다음 만남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지수 양.]
지수는 VR 모드로 구동되던 딥 다이버가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을 보여주며 AR 모드로 변환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옆에서, 자신이 ‘오라클’을 테스트하는 것을 흐믓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상혁의 모습과 함께.
지수는 딥 다이버를 벗으며 상혁에게 건넸다.
“어땠어?”
상혁이 묻자 지수가 망설였다.
방금 자신이 본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것은 ‘멋지다.’나 ‘끝내준다.’라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지수는 상혁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생각하는 ‘오라클’에 대한 감상에 대해 말해주었다.
“잘 표현하긴 어렵지만 딱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뭔데?”
“상혁 오빠가 지금 만들려고 하는 건, 확실히 ‘괴물’ 같은 물건이라고요.
아마 발매 시점에서는 더 완벽해지겠지만, 저로서는 지금 상태에서 얼마나 나아질지 상상도 하기 어렵네요.
저걸 게임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고.
적어도 모험가로 플레이를 할 때는 게임을 평가하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게임을 볼 수 있었어요.
물리 엔진이 얼마나 뛰어난가, 아니면 자유도가 얼마나 잘 구현되어 있는가 같은.
그런데 오라클은 좀 다르네요.
저건 게임이라기 보다는 게임을 만드는 제작툴이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냥 대화하듯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제가 원하는 배경이나 퀘스트가 슉슉 만들어지는 게 너무 신기하기도 했고요.
아마 이 게임의 개발 자원은 죄다 오라클을 개발하는 데 쓰였겠죠.
플레이는 단순히 그렇게 만들어진 오라클로 생성한 곁다리일 뿐이고요.”
“정확히 봤어.”
“그리고 한 가지 더 알 수 있었죠.”
“그게 뭔데?”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요.”
지수가 말했다.
“단순히 D&D를 VR 환경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보기엔, 오라클은 지나치게 볼륨이 큰 기능이에요.
저는 일부러 오라클에게 현대 배경의 사무실을 호출해달라고 요청했고, 오라클은 한치의 지연 없이 제 요청을 들어주었죠.
그건 굳이 D&D를 구현할 목적이었다면, 딱히 필요없는 데이터까지 오라클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고요.
만약 이 게임이 발매되게 된다면, 전 세계의 게이머들은 이 게임을 통해서 수없이 퀘스트와 NPC, 몬스터와 맵을 생성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캐릭터로 연기를 펼치며 수없이 많은 대사를 만들어 내겠죠.
저는 오라클의 진정한 목적이 바로 유저들의 그 ‘창의성’을 수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수의 말을 들은 상혁이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맞아. 오라클의 목적은 바로 그거지.
전 세계 게이머로 하여금, 그들이 직접 창의적인 맵과 시나리오, 몬스터와 NPC, 퀘스트와 대사들을 쓰게 하는 것.
그리고 그걸 우리가 수집하는 것.
그게 나이츠 어셈블2를 개발하는 메인 목적이니까.”
“그걸 모아서 어디다 쓰시려고요?”
“글쎄?”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상혁이 말했다.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미소는, 지수가 그와 함께한 이후 처음으로 자신이 이상혁이란 인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