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 NE 컨벤션 피날레
“사람 정말 더럽게 많네.”
허먼이 광장을 가득 메운 VR 아바타 집단을 보며 말하자, 프라이도 입을 열어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게요.”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만.”
“그래요?”
“지금 접속자 수를 생각해봐. 전 세계에 있는 5천만에 가까운 딥 다이버 보유자가 전부 접속해 서 이번 쇼케이스를 보려 할 텐데, 그걸 전부 지금 그래픽 수준의 아바타로 표현하려다가는 하드웨어가 불타버릴걸?”
“그럼 이게 전부가 아니라···.”
“아마 하드웨어가 허용하는 수준의 숫자까지만 렌더링한 거겠지.”
“그렇다고 쳐도 매우 많아 보이는데요? 적게 잡아도 수천 명은 될 것 같은데.”
“그만큼 PRD에 달린 연산 칩의 성능이 우수하다는 거겠지.
아니면 STC가 극도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이 공간을 굴리고 있던가. 혹은···.”
“혹은?”
“클라우드의 힘을 빌리고 있을 수도 있고.”
“클라우드요?”
“PTW에서 괜히 기존 인터넷보다 빠른 전용회선을 설치해야만 PRD를 지원하게 만든 건 아닐 거 아냐.
이정도 성능의 대규모 접속을 구현하려면 서버 쪽에서도 엄청난 지원이 필요하겠지.
그렇다고 실제 지금 접속해 있는 수천만의 인원을 한눈에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보는 사람에게 사람이 엄청 많다고 느끼게 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지.
하지만 PTW에서 개별 단말기 별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번에 보여주고 있는 건 사람이 많은 편이 분위기를 띄우기 좋아서라는 단순한 이유는 아닐 거야.
그런 용도라면 실제 참여자가 아닌 일부만 다른 플레이어의 아바타로 채우고 나머지 인력은 네트워크 부하가 적은 NPC로 교체하는 게 더 나은 방식일 테니까.
하지만 여기엔 지금 NPC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관중들이 현재의 월드에 접속해 있는 실제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아마 그 이유는 스트레스 테스트 때문일 거고.”
“스트레스 테스트요?”
“서버와 장비가 어느정도의 인파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테스트 하는거지.”
프라이는 광장에 설치된 거대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관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희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PRD와 새 인터넷을 통해서 랙 없이 구현할 수 있는 동시접속자 수의 한계라는 거군요.”
“맞아.”
“공성전도 가능한 인력 같은데요?”
“그렇지.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거야.
잘하면 PTW가 다음에 개발하는 새 게임이 MMORPG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니까.”
“PTW가 개발하는 VR 기반 MMORPG라···.”
프라이는 지금까지 체험했던 PRD의 놀라운 기능들을 떠올리며, PTW가 만들지도 모르는 이상적인 MMORPG의 모습을 상상했다.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이, 거대한 성벽 앞에서 판타지스러운 장비를 입고 고함을 치며 앞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그리고 성벽 위에서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쏴 대는 장면을.
거기엔 굳이 마법이나 드래곤의 존재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중세시대의 전장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상상만으로 게이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한 위력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PRD로 구현된 중세시대 공성전은 꼭 한번 해보고 싶긴 하네요.
이 많은 인원이 한번에 달려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일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하늘을 가르며 내 방패에 꽂히는 화살의 반동이라던가 상대의 검이 내 강철 갑옷을 찌그러트리는 순간의 무게감이 그대로 전달될 테니까.
현실에서는 목숨이 걸려있어서 절대 할 수 없는 행동도, 이 세계에서는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지.
그것도 더 이상의 성능 향상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컴퓨팅 성능을 바탕으로 구현된 현실적인 그래픽의 세계에서.
이 세계를 보니 확실히 알 것 같더군.
PTW가 어째서 이번 행사의 메인 타이틀을 ‘게임 체인저’라고 명명한 것인지.
PRD는 말 그대로 게임판을 바꾸는 하드웨어야.
그리고 이번 4차 NE 컨벤션은, 수천만의 유저들이 그런 PRD에 대한 욕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된 행사고.”
“그래요? 그런 것 치고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딥 다이버 유저들의 후기도 괜찮은 편인데요?
다들 ‘PRD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게 좋았겠지만, 딥 다이버만 가지고도 행사를 즐기는 데 크게 문제가 없었다.’라고 하니까요.”
“그 문장의 내용은 결국 PRD가 가지고 싶다는 게 핵심이야.
나나 자네야 지금 PRD를 사용해서 100% 완성된 경험을 마음껏 체험하고 있지만, 딥 다이버만 있는 유저들은 단순히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경험만으로 만족해야 했을 테니까.
아마 컨벤션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을걸?
‘이걸 PRS로 즐겼으면 얼마나 끝내주는 기분이었을까?’
반대로 PRS로 컨벤션을 즐기는 유저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거고.
‘PRS로 체험하는 것도 이렇게 멋진데 PRD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야?’라고.”
“그럼 PRD 유저들은요?”
“그건 자네가 말해봐. 자네도 PRD로 컨벤션을 3일 내내 즐긴 소수의 행운아 중의 한명이니까.”
허먼의 말을 들은 프라이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그에게 답했다.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오 맙소사, 이건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끝내주는 경험이야!’라고.”
“나도 동감이야. 아마 내가 이 행사를 PRS나 딥 다이버만 가지고 참가했다면 난 질투심에 돌아버렸을지도 몰라.”
“그건 배부른 소리죠. 물론 허먼 씨가 하나 남은 PRD를 저에게 빌려주셨기에 제가 행사를 100% 즐겁게 즐길 수 있긴 했지만, 제 집에는 PRD가 없으니까요.
저는 이번 컨벤션이 끝나면 제 방에서 PRS만 가지고 게임을 즐겨야 해요.
그리고 그건 엄청나게 갑갑한 느낌이겠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빼앗긴 느낌이겠군.”
“맞아요. 그것도 안의 내용물이 뭔지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요.
컨벤션이 끝나는 대로, 저는 대출을 받아서라도 PRD를 한 대 장만할 겁니다.
지금 제가 사는 아파트가 좁아서 거실에 PRD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제 방 침대를 다 치우고 쇼파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우겨넣겠죠.”
“그건 꽤 불편하지 않을까?”
“어차피 PRD가 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집에서 보내는 거의 모든 시간을 가상 세계 속에서 보내게 될 테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잠은 PRD 안에서 자도 상관없어요.
아니, 오히려 PRD 안에서 자는 게 편할 수도 있죠.
슈트가 온도를 정확하게 맞춰주는 데다 덮고 자는 이불의 촉감부터 가상 세계 안에서 구매한 침대의 폭신함까지 전부 구현해주니까요.
현실의 제 방에 있는 침대는 매트리스가 낡아서 잘 때마다 허리가 박살 날 것 같은 기분을 주지만, 가상 공간 안에서의 침대는 그것보단 더 좋은 경험을 전달해 주겠죠.”
“뭐, 선에 매달려서 공중에 뜬 상태로 자는 거니 일종의 해먹 같은 느낌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행사까지 얼마나 남았지?”
허먼이 묻자, 프라이가 가이드를 스케쥴 페이지를 확인하고 허먼의 질문에 답했다.
“두 시간 정도요.”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늦어?”
“이 자식이요?”
“게임기자 리차드.”
“아, 두 분 아는 사이시죠?”
“어. 피날레 전에 서로 얻은 정보를 공유하자고 이야기하길래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늦네.
이쪽은 1분 1초가 아쉬운데.”
“3일 내내 하루 4시간도 안 자고 식사도 5분 만에 끝내면서 하이페이스로 게임을 하셨는데 아직도 모자라세요?”
“모자라. 물론 컨벤션이 끝난 이후에도 게임 자체는 할 수 있겠지만, 나도 직장인인 이상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까.
오늘 이후엔 출퇴근에서 빠지는 시간을 생각해야지.
그러니까, 오늘처럼 마음 편히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려면 다음 주말까지는 기다려야 한다고.”
“거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때, 허먼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엔 한 남성 아바타가 조금 화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차드?”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더 일찍 오고 싶었지만, 저는 허먼 씨와 다르게 PRD가 없기 때문에 여기 접속하려면 회사에서 공금으로 산 PRD로 접속해야 했어요.”
“회사에서 PRD를 샀다고요? 3만 달러짜리 비품을?”
“게임뉴스를 다루는 회사니까요. PRD 관련 게임 리뷰를 하려면 1대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서 어떻게 하나 가져다 놓기는 했는데, 동료 기자들이 죄다 들러붙어서 놓지를 않는 바람에 사용하기가 무지막지하게 힘들더군요.
오늘 접속도 기사 쓴다는 핑계로 첫날 5시간 플레이하고 나서 3일 만에 접속하는 겁니다.
지금은 아예 문 앞에 시간표를 붙여놓고 기자별로 예약해서 돌아가며 쓰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피날레 행사 시간대를 예약할 수 있었다니 기적이군요.
아무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했을 텐데?”
프라이가 말하자 리차드가 그를 보며 물었다.
“이쪽은?”
“제이콥 프라이. 내가 진행하고 있는 TV쇼의 프로듀서야.”
허먼이 프라이를 소개하자 프라이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제이콥 프라이입니다. 기자님의 팬입니다.”
“그럼 제 소개는 따로 할 필요 없겠군요.
편하게 리차드라 불러주시죠.
저도 그쪽 TV쇼의 팬입니다.
이번 NE컨벤션에서 방송을 쉰다고 해서 엄청나게 충격받은 팬이기도 하고요.”
“그건 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프라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허먼을 바라보자 허먼이 당당한 표정으로 리차드에게 말했다.
“이번 행사에서의 나는 한 명의 PTW 팬으로써 참가한 평범한 게이머일 뿐이라고.
그리고 이번 컨벤션 때문에 3일 연차 낸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습니다. 하도 휴가 신청자가 많아서 뉴스까지 떴던데.
아무튼, 두 분은 지금 그럼 PRD로 접속 중입니까?
허먼 씨야 PRD를 집에 들여놨다고 그렇게 자랑했으니 당연히 PRD로 접속중이실테고, 프라이 씨는 어떤가요?”
“저는 허먼 씨 집에서 3일째 숙식하면서 PRD로 컨벤션을 즐기고 있죠.”
“아니, 잠깐만요. 그럼 허먼 씨 집에 지금 PRD가 두 대란 말입니까?”
“거실에 한 대, 차고에 한 대.”
“와···. 너무하네···. 그럼 저도 좀 빌려주시지···.”
리차드가 원망 섞인 눈으로 허먼을 바라보자 허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분명히 기사거리 찾는다고 3일 내내 날 괴롭혔을 게 분명하니까.
말했잖아요? 이번엔 순수하게 게이머의 입장에서 행사를 즐기고 싶었다니까?”
“그럼 그 게이머의 입장에서 즐긴 NE 컨벤션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리차드는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의자를 하나 끌어온 후 허먼과 정보교환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두 사람이 교환한 정보는, 역시나 PRD로 구현한 세계의 리얼리티에 대한 것이었다.
“현재 콘솔이나 PC의 그래픽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가는 그래픽과 해상도.
그런데도 랙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쾌적함.
뭐랄까, 저는 이 세계를 처음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마지막이구나.’라고요.”
리차드의 말에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기서 더 실사와 가깝게 그래픽 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그 조금의 향상을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해보면 그건 게이머에게 계륵같은 존재가 되겠죠.
전 그래픽은 향상되면 향상될수록 좋다고 주장하는 파였지만,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더 그래픽이 좋아진다고 해도 미세한 차이가 될 테니까요.”
“그렇죠. TV로 따지면 8K 해상도의 성능을 가지고 있는 장비니까요.
여기서 성능이 더 올라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아마 향후 10년은 타 업체들이 PRD의 그래픽을 따라가는 형국이 되겠죠.”
“전체적인 행사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HC101은 해보셨나요?”
“잠깐 해보았습니다만 대부분의 플레이는 PRS로 진행했습니다.”
“그럼 그 차이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대화가 가능하겠군요.”
리차드는 허먼과 PRD와 PRS로 즐기는 HC101의 두 가지 버전에 대한 차이점을 서로 비교하는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허먼 씨의 생각은 PTW가 이번 4차 NE 컨벤션을 통해서 VR 게임들이 나아갈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려는 거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HC101에서 쓰인 대부분의 기술이나 시스템이, 다른 게임에서도 응용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죠.
리차드 씨도 올드 게이머이시니 드라곤 퀘스트에서 세이브 시스템이 개발되기 전의 RPG를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 전의 RPG들은 유저의 스토리 진행 상황이나 레벨, 장비들을 하나의 코드로 만들어 유저들에게 기억하게 했죠.
다음에 그 코드를 입력하면, 그걸 역산해서 다시 게임 플레이 상태를 불러올 수 있도록.
그러다 세이브 파일이 나오고 나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횡스크롤도 마찬가지고요.
1980년 Williams Electronics사의 디펜더(Defender)가 발매되기 이전의 게임들은, 모두 고정된 화면 안에서 캐릭터를 움직이며 플레이하는 게임들이었죠.
그러다 최초의 횡스크롤 게임인 디펜더가 발매되고, 사람들은 화면 자체가 이동하는 게임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후에 수많은 게임들을 탄생시켰죠.
제가 생각하기에 HC101은, 바로 그런 가이드 라인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이것이 이상적인 VR 경험이다.’라는 가이드를 제공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파생될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게임 말이죠.
PTW에서 이번 행사의 타이틀 카피를 ‘게임 체인저’로 정한것도 아마도 그 이유에서 였을테고요.”
“흠···. 저는 잠깐밖에 즐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인상은 받지 못했는데요.”
“그건 PRS로 체감할 수 있는 감각 피드백이 PRD에 비해 약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단순한 예로, 크리티컬을 예로 들어보죠.
모니터나 TV같은 평면 매체를 사용하는 기존의 게임들에서, 혹은 현재 제공 되고 있는 원시적인 VR게임들에서, 크리티컬은 유저의 스테이터스를 기반으로 일정 확률로 터지게 되거나 혹은 정확한 타이밍이나 정확한 위치를 공격했을 때 발동되는 게 일반적인 크리티컬의 개념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HC101의 크리티컬 시스템은 기존의 그것들과 조금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건 VR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구현 방식이라 할 수 있죠.”
“어떻게 구현되길래?”
“HC101을 해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기본적으로 HC101의 공격 스킬은 ‘모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키운 캐릭터의 메인 스킬 중 하나인 ‘로켓 펀쳐’의 경우는 가라데의 정권 지르기와 유사한 스킬 모션을 가지고 있죠.
게임 안에서 저는 ‘프리샷 루틴’이라 불리는 준비 자세를 통해 스킬을 호출합니다.
그럼 제 움직임을 보고 제가 스킬을 발동시키려는 것임을 인지한 PRD가 스킬을 시전하죠.
스킬이 시전되면, 중간에 다른 동작을 할 수 없도록 PRD가 강제로 신체의 자세를 스킬 모션으로 변경시키고요.
그 상태에서, 저는 다른 동작을 할 수 없습니다.
제 몸에 연결된 와이어들이 강제로 제 자세를 정권 지르기 자세로 변경하니까요.”
“그야 그렇겠죠. 스킬을 썼으면 모션이 나가야 하니까.”
“문제는 제가 거기에 저항할 때 발생합니다.
아마도 부상의 방지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PRD가 신체에 거는 부담은 ‘이 자세를 취해주세요.’ 수준의 압력이지 강제로 근육과 관절을 꺾지는 않거든요.
대신 PRD는 다른 식으로 패널티를 적용하죠.”
“데미지가 줄어드는 겁니까?”
“맞습니다. HC101에서, 스킬을 시전할 때 유저가 스킬 모션을 제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데미지가 깎여서 들어가죠.
그건 마치 골프 코치가 제자의 자세를 교정해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제 등 뒤에 서서, 제 팔을 붙잡고 올바른 자세를 가르쳐주는 거죠.
그건 참 재미있는 시스템이지만, PTW에서는 그 시스템을 크리티컬과도 연동시켰습니다.”
“어떤 식으로요?”
“그러니까 시스템의 보조를 받지 않고, 유저가 몸에 저항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완벽하게 스킬 모션을 외워서 시전하면, 데미지가 무지막지하게 들어가게 만든 거죠.
이 게임에서 강해지고 싶다면, 유저는 현실에서 무술을 익히는 것처럼 하나의 스킬 모션을 시스템 어시스트가 느껴지지 않을 수준으로 엄청나게 반복해서 연습하면 됩니다.
그럼 모든 스킬이 크리티컬로 나가게 되니까요.”
“그런 부분들이 VR에서의 이상적인 가이드를 제시하는 것이라는 뜻이군요.”
“그렇죠. 장비의 장착, 강화, 시스템 창의 호출, 로그인과 로그 아웃, 게임 내에 있는 가상 엔터테인먼트 장비의 처리.
식사와 수면, 대화와 전투.
각 히어로의 능력 계열에 따른 다양한 직업 구현 방식과 성장 방식.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검과 방패를 든 히어로나 활을 쏘고 창을 다루는 히어로, 마법을 쓰는 히어로나 탈것을 타는 히어로를 등장시킨 것도 역시 가이드를 제시하려는 PTW의 의도가 느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가상 세계를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가이드 라인이 HC101엔 포함된 거죠.
그중에 아무 직업이나 하나 떼서 다른 세계관으로 옮기면 게임 하나가 완성되는 거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게임을 하는 내내 압도당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모든 경험이 새롭고 모든 디테일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절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은, 이토록 멋진 게임을 하면서도 이게 겨우 PRD가 제공하는 VR 세계의 입구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전 더욱 기대하고 있죠.”
“뭘 기대하고 있다는 거죠?”
“이 행사의 피날레를, PTW가 어떤 식으로 장식할지를 말이죠.
이 행사의 시작부터 가상의 카페에 앉아 대화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3일간의 4차 NE 컨벤션은 저에게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제공해 주었어요.
이제 뭐가 등장해도 더 놀라지 않을 정도로요.
하지만 PTW니까, 뭔가 더 준비하긴 했을 것 같은데.
완전히 새로운 가상 세계라는 선물을 시작부터 오픈한 PTW가 마지막 쇼 케이스에서 뭘 준비했을지가 너무 궁금하네요.
제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테니.
하지만 사실 쇼케이스의 내용이 별것 없더라도 PTW를 비난하진 않을 겁니다.
이미 저는 3일간 너무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요.”
쇼케이스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면서도, 허먼은 쇼케이스가 실망스러웠을 때를 대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3일간 체험한 모든 것들이 너무나 경이로웠기 때문에, 제 아무리 PTW라도 그 이상의 뭔가를 내놓기는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허먼이 모르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그가 그런 대화를 리차드와 나누고 있는 사이, 그의 머리 위를 거대한 비행기가 가로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비행기 안에는, 잠시 후 행사에 참가한 모든 사람을 경악하게 만든 인물이 타고 있었다.
보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만드는, 붉은빛과 금빛의 반짝이는 금속 슈트를 입은 채로.
로밧트 다우니 주니어는 비행기 뒤쪽의 열린 게이트를 통해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VR 행사장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옆에 서 있는 상혁의 아바타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제집 거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군요!
진짜로 비행기에 탄 느낌인데요?”
그러자 상혁이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2편 첫 장면에 나온 비행기를 그대로 똑같이 모델링 했으니까요.
지금 입으신 슈트도 그때와 같은 모델이고요.”
“사실 그 장면은 스튜디오에서 CG로 찍은 거라 주변은 다 그린 스크린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보니 촬영장에서도 이렇게 실제 같은 풍경을 보면서 연기할 수 있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능할지도 모르죠.
이번 일만 잘 해주신다면.
영화 촬영용 PRD를 따로 제작해서 넘겨드릴 수도 있을 테니까.”
“그건 기쁜 소식이네요.
하지만 지금은 역할에 집중하는 게 먼저겠죠.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본 없이 가도?”
상혁이 로벗트에게 주문한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지정한 타이밍이 되면, 행사장 상공의 비행기에서 아이론 맨 슈트를 입고 뛰어내려, 히어로 랜딩 포즈로 무대 위에 착지해달라고.
그 이후는 알아서 애드립으로 처리해달라는 게 상혁의 주문이었다.
“지금은 슈트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행사장에 내려가시면 자연스레 알게 되실 겁니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로벗트는 행사의 내용이 매우 중요한 쇼케이스를 그런 식으로 진행한다는 게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그것도 나름 즐거웠기에 미소지으며 상혁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순간 열려있던 슈트의 마스크 내려가며 강철이 부딪히는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로 아이론맨 슈트를 입은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로밧트는 상상의 산물을 그대로 구현해 낸 PTW의 기술력에 감탄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상에 젖었다.
‘내가 진짜 아이론 맨이었다면 이런 느낌이었겠군.
모든 게 영화랑 똑같네.
배역에 몰입하는 게 어렵진 않겠어.’
그러나 그 순간, 로벗트는 상혁이 손가락을 몇 번 휘젓고 허공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생각을 바로잡았다.
자신이 있었던 영화촬영장에서는, 저런 식으로 비행기 세트 안에서 공간 이동하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아냐, 저건 다르네.”
[뭐가 다르다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순간 로벗트는 귓가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답했다.
“자비스?”
[그게 제 이름이죠.]
“PTW에서 자비스도 구현해준 건가?”
[절 만드신 것은 스타크 씨 본인입니다. PTW가 아니라요.]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은 로벗트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맞아. 넌 내가 만들었지.
하지만 내가 하나는 틀린 것 같군.
PRD는 배역에 몰입하기 쉽게 돕는 도구가 아니었어.”
그리고는 비행기 벽에 걸린 붉은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제로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도구지.”
조금이라도 더 빠른 시기에 그린 스크린의 역할을 PRD가 대신하길 바라며, 로밧트는 조용히 비행기의 낙하 신호 램프가 녹색으로 바뀌길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 로밧트의 눈앞에 반투명한 텍스트가 등장했다.
[4차 NE 컨벤션의 쇼케이스.
피날레(Finale)가 곧 시작됩니다.
10분 후 모든 유저를 쇼케이스 현장으로 순간 이동시킬 예정이니 현재 게임을 진행 중인 유저분들께서는 플레이를 마무리해주시기 바랍니다.]